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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일기 1, 김용옥, 통나무, 2015 본문

책/밑줄긋기

중국일기 1, 김용옥, 통나무, 2015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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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을 이야기했지만, 인생이란 역시 필연보다는 우연이 더 지배적이다. 세포의 활동자체가 필연보다는 우연이 더 결정적이다. 진화라는 것이 결국 우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연이 없으면 모험이 없고, 모험이 없으면 창조가 없다. -16

 

나는 젊은 날, 1972년 만 24세의 나이에 유학의 장도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내가 유학을 가게된 가장 절실한 이유는 우리민족의 역사가 과학을 포함하여 학술적으로 너무 뒤져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서양에 뒤져있어 깔뵘을 당한다는 것이 몹시 분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서양을 배워서 서양을 극복해야겠다는 일념에서 조선땅을 떠났던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은 개인의 스펙이나 캐리어를 위해서, 혹은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유학을 간다 할지라도 우리세대의 사람들처럼 거창한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전통적 의미의 유학생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개화기 마지막 주자였던 것이다. -19

 

1972년 내가 유학의 장도에 오른 것은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2014년 연길행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교학상장이라 했으니 크게 차이가 날 것은 없다. 학기에 지극한 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배워보지 않으면 그 도의 위대함을 알 길이 없다 했다. 그러므로 배워본 연후에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고, 가르쳐본 연후에나 교육의 곤요로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안 연후에나 스스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게 되고, 가르침의 곤요로움을 깨달은 연후에나 스스로 자기를 보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교학상장이라 한 것이다. 가르침이나 배움이나 서로를 자라나게 해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적인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논리가 배어있는 명언이라 할 것이다. -22

 

역사는 한 시점에서 하나의 모순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모순관계가 화엄적으로 얽혀있는 인드라망 같은 것이다. 그 모순관계의 경중을 가려 다양한 전술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을 말하는 주역變通論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천론은 인간의 인식에 관한 서구의 존재론적 해석방석ontological interpretation을 거부하고, 인식을 존재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동적과정dynamic process으로 귀속시켰다. 인식은 실천을 통해서만 앎의 자격을 획득한다. 실천은 인식을 확충하고, 확충된 인식은 더 큰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진보적인 양명학자들이 추구했던 동적인 지행합일론의 명제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28~31

 

그러나 생각해보라! 십계명의 첫 계명이 무엇이뇨?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다시 말해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현현된 야훼의 모습이 바로 다신론자였던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독재자였던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들도 골고루 잘 섬기고 평화를 이룩하자고, 야웨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했다면 인류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야훼는 야비한 똥시였다. 약자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였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꾸란의 하나님, 모두 인류역사의 되돌이키기 어려운 촌스러운 퇴보를 의미한다. 지상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탐내는 자들의 독점욕이 만들어낸 허상인 것이다. 지상의 권력의 통일이 없어 만신의 통일이 없다. 유일신은 지상의 가상적 절대권력의 백업back-up일 뿐이다. -128

 

근대가 없이도 우리는 과학을 더 잘 배울 수 있고, 자본주의보다 더 풍요로운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 근대는 우리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 역사 속에서 창조해나가는 것이지, 실학자들이 있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극복되고, 우리 역사가 근대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는 조선왕조로 족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조선왕조 나름대로 유니크한 가치를 지닌다. 반주자학적인 실학을 찬양하면서 조선조의 주자학적 성과를 모두 虛學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조선문명을 바라보는 정당한 자세일 수가 없는 것이다. -136~137

 

예술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떠나서 그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이데아가 아니었다. 에술은 우리의 삶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그 삶의 미래적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한 현실적 기능을 충족시키기도 하는 심미적 고양이다. ‘다기의 예술은 당연히 다기의 생활기능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기본 전제위에서만 전개되는 다양한 심미적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151

 

통역은 해석이지 逐語的 직역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통역자들이 반드시 숙지해야할 이 원칙 하나도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상해희극학원 개막식에서 상해부시장이 나와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누구, 누구하면서 한 20명 정도의 고관이름을 나열했는데, 미국인 교수 통역자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유명하신 여러분들하고 한마디로 축약했는데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때에 따라서는 이런 방식이 진짜 통역이다. 부시장이 나열한 사람들은 이미 중국사람들이 알아들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세계인들은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77

 

지금 단일 국가를 단위로 하여 그 국가의 강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시론적으로 기술하는 역사를 대개 민족사national history’라고 하는데, 이 민족사는 민족국가nation state’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민족국가는 대개 20세기 전반에 정착된 개념이다. 그 개념을 가지고 역사적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많은 경우 터무니없는 무리를 수밚나다. 사실 독일역사’ ‘불란서역사라는 개념은 역사학에서 정밀한 개념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는 비교적 단일개념이 장시간 지속된 경우에 속하는 특이한 케이스다. 그러나 그것도 고려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곤란하다. 통일신라까지는 소급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통일신라의 역사는 발해사를 포함하는 남북국시대의 역사로 다시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통일이 아니다. 더구나 삼국시대의 역사, 혹은 그 이전의 역사, 혹은 고조선의 역사에 한국이라는 단일민족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오늘의 편협한 현대사의 역사인식을 광활한 무경계의 대지에 무리하게 팻말을 꽂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고대사에 현대사적 민족개념을 부과하는 것은 움직이는 배에서 바다에 영역표시의 선을 긋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것이다. 강역도 민족도 국가도 다 유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미족의 단위라기보다는 문화적 교류의 네트워크이며, 그 네트워크 속에서 생존하는 인간들의 주체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의 전승태가 어떠한 정체politeia와 강역의 족적을 남겼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285~286

 

동물을 애완하는 자들은 동물을 자기의 일방적 종속물로 만들며, 그만큼 휴먼 인카운터human encounter를 상실한 인간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인의 감정을, 사감의 영역에 종속된 동물에 대한 애완의 정념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정신 내면의 공허를 애완의 허구적 감정으로 메꾸고 있는 것이다. 어찌 사람을 위한 길과 공원에 개똥과 오줌을 뿌리고 다리며 하등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여하간 동물은 애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305

 

주덕해(연길 조선자치주를 만든 이)는 이 혼란시기(조선 해방, 중국 국공내전 돌입)에 동북지역을 다니면서 외쳤다. 그가 말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민주의 절절한 현실이었다.

당신들은 왜 여기에 왔습니까? 무슨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왔습니까? 당신들은 배고파서, 땅이 없어서, 농사지으러 바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이 땅을 개간하고 논밭을 만들며 어렵게 어렵게 생활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이제 이 땅은 우리 민족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특정시기의 이주민이라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편면적입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어디로 간들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주인입니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남의 땅에서 천시당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가 확립되어야만 남들이 믿어주는 것입니다. 조선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이런 자세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320~321

 

 

 

 

인용

목차

우연처럼 두려움을 안고 제주행 비행기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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