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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 2012 본문

책/밑줄긋기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 2012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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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고장 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리한다, 일종의 고난이도 곡예에 비유할 수 있는 어려운 일입니다. -pp 20

 

우리 교육이 추구해야 할 것은 비용절감과 조직의 경직화가 아니라, 교사들의 교육적 성취도를 향상시켜서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겁니다. 현장 교사들을 위해 창의적인 기운이 충만한,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정치인과 지식인, 교육관료들의 생각과는 정반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교사를 겁먹게 만들고 무기력하고 비굴한 존재로 만들지에만 골몰하고 있으니까요. -pp 24

 

학교는 영리기업이 아닙니다. 수익을 올리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학교는 원래부터 이익이 창출되지 않는 곳이고, 여러 사람에게 지원을 받아서 가까스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익을 올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로 고쳐 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원이라는 것은 출자와 다릅니다. 확실한 배당을 목표로 한 지원 같은 건 받을 수 없습니다. 미안한 이야깁니다만, 이 논리는 지원하는 쪽이 예상보다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그 결실이 부담한 비용에 상응하는 형태로 지원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형태로, 그것도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언젠가돌아옵니다. , 학교제도는 투여한 것과 다른 형태로 그 결과가 언젠가 돌아오는그런 제도입니다. -pp29~30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곧바로 판정을 내려주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재미있습니다. , 옳은 일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옳은 것이죠. 그래서 비즈니스 세계에서 투자부터 그 성패 판정까지의 시간은 가능한 한 짧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돈이니까.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시간을 화폐로 치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단적으로 그만큼 돈이 든다는 것이지요. 신제품을 만들었는데 시장이 곧바로 반응하지 않을 때, ‘언젠가 팔리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팔리지 않는 상품의 생산라인을 유지하며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고 재고를 늘리는 것은 손실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 제가 앞에서 교육은 타성이 강한 제도라고 말한 것은, 교육은 자판을 누르고 나서 문자가 표시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시스템이라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육은 공들인 것과는 다른 모양새로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되돌아오는 시스템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자판을 두드리면 화면에 문자가 뜨는 게 아니라 사흘 후에 그림엽서가 도착한다든지 삼 년 뒤 호박을 두 개 받게 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pp 31~32

 

 

여기의 가치관에 매몰된 아이

 

무인도에 표류한 교사와 아이들이 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야자잎으로 지붕을 만들거나 물고기를 잡겠죠. 어느 정도 입고 먹는 것이 해결되면 교사는 당연히 , 그럼 슬슬 공부를 해볼까?”하고 말을 꺼낼 겁니다. 그런 말을 안 할 리가 없습니다. 역사와 문학, 신화에 관해서 수학과 천문학, 미술과 음악에 대해 교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려 하고, 아이들 또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험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학력을 쌓아서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서일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문화자본을 체득해서 양극화 사회 상위층에 오르기 위해서일까요?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무인도니까요. 하지만 교육하고 싶은 열정과 교육 받고 싶은 욕망은 무인도라 하더라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무인도라서 더 간절히 배움을 원하는 아이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육의 본질이 여기와는 다른 장소, 여기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회로를 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교육의 본질은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무인도라는 유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고 보다 넓은 세계와 연결되는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 안으로 어디에선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청량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pp 42~43

 

 

교사는 주주나 교수와는 다르다

 

교육의 중심은 가르침과 배움의 만남에 있습니다. 그 만남 속에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교사에게도 아이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외부라 해도 좋고, ‘타자’, ‘3라 해도 좋습니다. 교육에서 교사 이외의 어떤 주주도 아이와의 대면 상황에서 그러한 제3자를 불러낼 수 없습니다. 오직 교사와 아이의 대면 상황에서만 제3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그곳이 여기와는 다른 장소, 여기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회로가 열리는 기적적인 지점입니다. 교사가 그 이외의 주주와 전혀 다르게 기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역할 때문인 것입니다. -pp 43~44

 

교육을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은 여기에 속합니다. 정부, 교육위원회, 학부모, 지역사회, 대중매체, 시장, 이 모든 것들은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동일한 가치관이라는 대기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모든 아이들에게 큰 권력, 명예, 풍부한 재화와 문화자본을 획득하여 상위계층에 올라서기 위해 가혹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부모들에게 전면적으로 교육을 맡기면 아마 이기는 아이를 만들려고 할 겁니다. 대중매체에 부탁해도 문부성에 부탁해도 재계에 맡겨도-실은 맡기려고 해도 그쪽에서 거부할 테지만-역시 여기의 가치관에 매몰된 아이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pp 44

 

유비쿼터스 교육은 상품 교환의 법칙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통신판매 모델을 차용한 것이겠죠. 통신판매는 카탈로그를 보고 상품을 고르고 돈을 지불하면 상품이 배달돼옵니다. 유비쿼터스 교육을 실현한 사이버대학도 똑같습니다. 카탈로그를 보고 상품을 고르고 그 대가로 일정 시간 동안 과업을 수행합니다. 과업이 합격점을 달성하면 노동가치의 보상으로서 학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상품 교환의 원리입니다. 과업으로 지불한 노동가치에 대해 학점이라는 상품을 교부받습니다. 학점을 채우면 학위가 발행됩니다. 아무리 봐도 통신판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비즈니스맨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이상형이라며 좋다고 덩실거리겠지요. 그러나 유감입니다만 이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쇼핑입니다. 배움은 쇼핑과 다릅니다.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pp48

 

두 만화(‘허니와 클로버’, ‘모야시몬’)는 주인공이 이미 시작된 게임에 말려든다는 배움의 역동성을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도 수치적 목표와 외형적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묵묵히 달성하기 위해 대학에 온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죠. 무엇을 하러 왔는지 잘 모르는 무구한 상태, 단지 안테나 감도만 최대치로 높인 상태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지적인 구심력을 반응하려고 대학에 입학했을 겁니다. 그때, 학생들은 자기에게 강한 흡인력을 발휘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것이 바로 멘토입니다. 선배라도 좋고 선생이라도 좋고, 누구라도 좋습니다. 우리를 게임에 끌어들이는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자기만의 멘토가 없으면 안 됩니다. 멘토를 갖지 않는 자, 즉 독학자는 이 게임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수면학습으로 쿵푸, 하이점프 능력을 습득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자고 있는 동안에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때문에 정말 편할 것 같다는 시선도 있겠지만,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모든 수면학습 과정에 교사가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점프하는 기술을 습득할 때 점프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네오의 마음속에 움트는 공포심입니다. 이 공포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점프할 수 없습니다. 모피어스는 쉽게 점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 자신의 힘을 믿고 날아봐!”하고 네오를 격려합니다. 첫 시도에서는 실패하지만 네오는 결국 공포심을 극복하고 점프에 성공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기주도적인 수면학습임에도 불구하고 가상공간에서도, 지성과 기량을 신뢰할 만한 살아 있는 인간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기주도적인 과정 그 자체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학생을 격려하고, 실패를 질책하고, 기량 향상에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대응하는 멘토와의 대면 상황이 없으면 어떤 지식이나 기술도 제대로 익힐 수 없습니다. , 배우는 데 돌파를 가져오는 것이 멘토의 역할입니다. -pp56~58

 

 

배운다는 것은 시좌를 넓히는 것

 

배운다는 것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부름을 받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물듦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잣대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힐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격증도 딸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pp 59

 

 

교육의 상품화는 교육의 자살행위

 

제가 알고 있기로 교육 서비스는 최근에 우리 어휘 세계에 들어온 말이자, 교육을 비즈니스 모델로 생각하는 사람이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모델에서는 교육활동의 콘텐츠는 교육상품이고 교사는 그 상품의 공급자, 보호자와 학생은 고객의 입장이 됩니다. 교육자라면 이런 모델 안에서 교육을 논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상품거래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은 교육의 자살 행위입니다. -pp 63

 

 

수요가 없는 곳에 수요를 만드는 자본의 논리와 교육

 

미국에서는 학위공장을 배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제대로 된 대학이 모여 대학의 품질을 보증하는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제대로 된 대학이 모여서 회원제 클럽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입회 심사를 합니다. ‘제대로 된 대학 클럽은 임의단체이기 때문에 무한정 엄격하게 심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대학에는 법적으로 인가받은 대학제대로 된 대학클럽의 품질보증서가 붙어 있는 대학’, 이 두 가지 기준이 생겼습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영화 [굿모닝]에 험악한 인상을 한 강매상인이 주부들을 실컷 겁주고 가면,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청년이 방범 벨을 팔러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두 사람은 술집에 앉아 사이좋게 술을 마십니다. 이처럼 수요가 없는 곳에 수요를 만들어내는자본주의의 뼈대, ‘학위공장과 질 보증이라는 한 쌍도 이 영화 속 상인콤비와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pp 72~73

 

 

질보증, 그건 문제없음을 증명하는 持難한 행위

 

요로타케시養老孟司 선생이 자주 사용하는 비유 하나를 빌려오겠습니다. ‘츠쿠바산에 호랑나비는 없다라는 주장이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일이 많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츠쿠바산에 호랑나비는 없다는 명제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츠쿠바산에 가서 호랑나비 한 마리만 잡으면 됩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로 이 명제는 부정됩니다. 반대로 츠쿠바산에 호랑나비는 없다증명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갑니다. 츠쿠바산을 구석구석 조사해서 유충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츠쿠바산에서 채집된 호랑나비라고 하는 것은 가짜이거나 혹은 태풍으로 어디선가 날아온 것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보증작업은 마치 츠쿠바산에 호랑나비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pp 77

 

질 보증은 역으로 유죄 추정의 원칙을 채용합니다. ‘결백함을 입증하라는 겁니다. 이 요청에 응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죄라는 증거를 아무리 쌓아올려도 유죄 증거가 하나라도 나오면 모든 게 뒤엎어지니까요. 유죄 추정 상태에서 결백함을 열거하며 증명하는 작업에 이것으로 끝!”은 없습니다. 증명작업은 끝이 없지요. 실제로 질 보증을 위한 증명 작업도 끝이 없습니다(이 증명 작업이 평가활동입니다.). -pp 78

 

 

예악사어서수 중 악에 관해

 

음악은 시간 의식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풍부한 의식이 없는 사람은 음악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악기 연주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이미 사라져버린 소리가 아닌 들리고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과거와 미래의 확장 속에 자신을 두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p 84

 

 

교양교육은 존재의 비약을 위한 교육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알고 있어도 자신이 예전 그대로의 자신인 한, 그 텍스트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아마도 이런 것이 쓰여 있음에 틀림없다고 해석의 방향을 일정하게 한정짓는 자신의 지적인 편협함을 부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이미지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서, 한 번도 언어화되지 않은 명제가 이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텍스트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pp 92~93

 

교양교육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자각을 기초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모를 때 그럴수록 더욱 적절하게 행동하는 방식을 익히는 훈련이 바로 교양교육입니다.

그러나 전공교육은 결코 그런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공교육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존립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문영역에서 자신이 인정받길 원한다면 내가 지금부터 배울 전문영역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합니까?”라든지 어떤 전문영역과 협력하는 것이 목표입니까?” 같은, 전문영역을 거시적으로 포착하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이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pp 95

 

 

전문가란?

 

[황야의 7][대탈주]라는 액션 영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10에 들어가는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은 전문가를 채용하는 방식이 볼 만합니다. [황야의 7]에서는 크리스, [대탈주]에서는 빅 엑스가 큰 프로젝트에 필요한 전문가 리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걸맞은 인재를 채용합니다. 이 두 사람이 프로젝트의 리더가 된 것은 탁월한 전문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무엇이 안 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증명서 위조를 할 수 없다, 도둑질을 할 수 없다, 터널을 팔 수 없다 등등). 리더십은 이런 것이지요. -pp 102

 

 

경쟁력으로 학력 증진? No! 학력 저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력 향상은 경쟁을 통해서 달성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확실히 개인의 학력은 경쟁을 통해서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가르치면, 아이들은 가까운 장래에 자기 혼자만 유능하고 상대적으로 나머지는 자기보다 무능한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상대적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경쟁에서 이긴다에 한정해서 보자면 자신의 학력을 올리는 것과 경쟁 상대의 학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학력을 올리는 노력에 상응하는 노력을 경쟁 상대의 학력을 떨어뜨리는일에 투입합니다. 물론 태반은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은 실로 바지런히 경쟁 상대의 지적 성취도 향상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가령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아이는 학교에서 종종 자신이 이미 배운 단원의 수업을 방해합니다. 수업 중에 돌아다니거나 노래를 부르고, 옆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합니다. 보통은 이미 알고 있어서 재미없어 한다고 해석합니다만 아닙니다. 그들은 수업을 방해함으로써 경쟁 상대의 학력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겁니다. -pp 103

 

경쟁을 강화해도 학력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일본처럼 닫힌 상황, 한정된 구성원들 사이의 실험쥐 경주에서 우열을 정하는 한, 학력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떨어질 따름입니다. 학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있는 곳과는 다른 장소, ‘바깥과의 관계 맺기가 필수적입니다. [황야의 7]에서는 산적이, [대탈주]에서는 독일군 간수가 주인공들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결함을 메우지 않으면 바깥을 상대로 한 프로젝트-산적 퇴치, 포로수용소 탈주-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줄 친구에겐 깊은 경의를 표시하고 가능한 한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pp 104

 

 

교사란?

 

(교사는) 권력과 부, 명예나 문화자본에서 다른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서고 싶은 사람, 양극화 사회를 인정하는 출세주의자가 선택할 직업은 아닙니다. 교사는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과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교사의 요건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pp 109

 

세상은 이것으로 됐어’ ‘지금 일본은 이상적인 사회야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조적으로 교단 위에 설 수 없습니다. 사춘기에 세상은 좀더 공정하고 좀더 평등하고 좀더 평화로운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던 청년들이 교단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초등교육에서는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p 110

 

 

모순적인 교사란 존재

 

이 이상주의적인 교사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하면,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견해서 지원하고 공부시켜서 상급학교에 진학시키고, 입신양명하여 금의환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하층으로 등급 매기는 출세주의에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분신 같은 아이들이 사회 상위층에 서는 것에는 무방비했고, 오히려 기대를 했죠. -pp 111

 

 

교사의 역할

 

아이는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선생이 말하는 것과 부모가 말하는 것-혹은 이웃 어른이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게 됩니다. 최초의 갈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선생도 부모도 역시 저마다 말하고 있는 것이 일관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갈등이죠. 그것으로 된 겁니다. 아이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배워야 하는 것은 깔끔한, 모순 없는 사회의 매끄러운 성립이 아니라-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모순된 사회의 모순된 성립에 대한 넓은 포용력과 거친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자신이 모순된 존재라는 것은 교육적으로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 승리와 패배의 경쟁구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아이들이 성공과 승리를 거두도록 자극하는 선생, 약자나 패자에게 깊이 공감하면서도 강자나 승자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 선생, 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완전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그 안에서 분열되어가는 선생, 그래서 종종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선생, 그런 선생이 좋은 선생입니다. -pp 112~113

 

 

배움이란?

 

궁지에 몰리면 안테나의 감도가 올라갑니다. ‘도움을 줄 사람이 누구인가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인간은 그것을 감지할 잠재적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멘토는 누구인가?’도 그와 똑같은 종류의 중요한 정보입니다. 멘토라는 존재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어서 틀림없이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가? 왜 유독 그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아마도 몇 번의 작은 실패를 통해 판단하는 힘이 생긴 것이겠지요. 자신이 왜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멘토를 고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예의를 다하여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됐으니까 가르쳐줘!” 건방지게 말하면 아무리 보채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때는 제대로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는 뭔가를 배울 때 쓰는 마법의 주문입니다.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환경부 공무원이 고스트 버스터들의 수상한 유령 체포 기계를 조사하겠다며 지하실을 보여 달라고 주인공을 위협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쌀쌀맞게 거절하니까 공무원이 화가 나서 ?”라고 묻자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마법의 주문을 잊어버렸으니까.”

마법의 주문이라니?”

부탁합니다!please!” -pp 119~120

 

 

학생에게 던지는 메시지

 

아이는 반드시 어른들이 하는 제각각의 말에서 그 모두가 똑같은 메시지라는 지점에 이르고자 합니다. 반드시. 반항적인 아이일수록 더 그렇죠.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군. 세상은 다양하군!”하며 달관한 듯 말하는 불량소년은 없습니다. 불량하다면 반드시 어른들이 말하는 건 다 똑같다고 합니다. 무조건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자신을 향해서 똑같이 말하고 있는 공통의 메시지를 어떻게든 들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어른이 아이를 향해서 발신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숙해져라!” -pp 127

 

 

성숙이란?

 

성숙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이라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메시지를 엄청 비틀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리려면 좁고 험한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만 합니다. 그 수고로움이 귀찮아 찾지 않거나 당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게 뭔지 전부 알았어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입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거나 그 이상의 노력을 멈췄을 때, 그 사람의 성숙은 끝이 납니다. 계속 성숙하고 싶으면 다른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깊은 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이라는 프로세스의 동적 구조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성숙하는지, 왜 성숙하는지를 알려면 지금 성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 역동적인 과정에 물들게 하려면 그들을 깊은 갈등속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pp 129~130

 

 

다른 성숙의 두 요소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적 연구에서 발견한 규칙은 전 세계 모든 사회 집단에서 아버지와 삼촌은 사내아이에게 다른 육아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엄격하게 아이를 키우는 사회에서는 삼촌이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아버지와 아들이 친밀한 사회에서는 삼촌이 성가실 정도로 까다로운 역할을 맡습니다. , 아버지와 삼촌은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합니다.

사내아이는 두 명의 동성 어른, 사회적 위치에서 동격인 어른, 즉 성숙의 롤 모델이 될 두명의 어른에게서 다른 것을 배웁니다. 보통 한쪽은 대세에 순응해서 다수가 최하는 행동을 흉내 내며 모난 돌이 되지 않기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꺾지 말고 성취하라고 가르칩니다. ‘약자의 생존전략강자의 생존전략이라고 바꿔서 말해도 되고, ‘살아남기 전략이겨서 살아남는 전략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pp 130~131

 

 

교사는 배우는 존재

 

교사는 학생을 응시해서는 안 된다거나 학생을 조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교사 자신이 배움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방법은 지금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계속 배우고 있는 배움의 당사자가 아니면 아이들은 배우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pp 137

 

인간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만 배웁니다.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만 배웁니다. 또 자신이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만 배웁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일은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 그뿐입니다. ‘외부의 지에 대한 욕망을 기동시키는 것, 그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외부의 지에 대한 격한 욕망에 불타올라야 합니다. -pp 152

 

 

생각 이전에 행동하라

 

춤추기는 실로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댄스에서 스텝은 미리 움직임을 정해놓고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짧은 시간 추는 거라면 안무가 있는 댄스도 가능하겠지만, 끝없이 계속 춤을 춰야 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춤을 추는 것은 입니다. 머리로 스텝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중앙장치에서 말단으로 전해 근육운동을 지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계속 춤출 수는 없습니다. 발이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스텝이 맞는지 어떤지는 발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추면 좋을지 몰라도 계속 출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한 스텝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도 똑같습니다. 곡을 듣고 그 흐름을 타는 것, 왜 이 곡인지, 왜 제대로 추지 않으면 안 되는지, 춤을 멈추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도 소용없습니다. 생각하면 발이 멈추고, 발이 멈추면 게임이 끝납니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춤을 추고 있는가뿐입니다. -pp 156~157

 

 

학교사회

 

학교는 아이들을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해서 보호하는 것을 그 본질적인 책무로 삼아야 합니다. 학교와 바깥 세계 사이의 ’, 즉 아이들을 바깥으로부터 지키는 벽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온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론이 있는 분도 많겠지만-반 이상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양보할 수 없는 제 교육관입니다.

학교가 하는 일, 교사의 일은 무엇보다도 외부를 향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만,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어차피 욕망으로 점철된 곳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외부와의 회로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부모와 주위 어른,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세속의 가치관과는 다른 문법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측정법으로 잴 수 있는 叡智의 경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교육이 무너진 것은 학교와 사회를 격리해온 이 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사도 부모도 교육행정도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부는 스스로 알아서, 일부는 싫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온도차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pp 174~175

 

 

개성이란?

 

선생님 반에 사이가 좋은 남자아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항상 같이 놀았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아이가 함께 하교를 하는데, 교문 밖에서 다른 학교 불량배를 만나 돈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나 지금 학원에 가야 해!”하고 친구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그 다음날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같이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 실은 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리스크는 자기가 떠맡고 자신의 이익은 자신이 독점한다는 생각이 꽤 깊게 내면화 돼있는 거겠죠. 타인과 운명공동체 같은 걸 형성하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들의 개성적인 행동도 타자와의 차별화를 과잉 의식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pp 179~180

 

 

이지메란?

 

이지메에만 고유한 문맥이 있는 게 아니라 집단 형성에 대한 기피와 집단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서로 뒤엉켜 매우 불안정한 집단적 심리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사소한 계기로 균형을 잃게 되면, 경우에 따라 이지메라는 형태로 발현됩니다. ‘집단에 익숙하지 못한 개체집단에 과잉 적응한 개체양쪽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집단에 녹아들지 못하는 개체가 배제와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논리는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쉽게 알기 어려운 것은 집단에 과잉 적응한 덕분에 타인과 개체 식별이 안 되는 개체 또한 쉽게 이지메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자의 설명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의 아이들이 집단 형성하기개체로서 홀로 있기라는 두 가지 요청을 동시에 받아들여서 깊은 혼란 상태에 놓인 것이 이지메라는 병적 상황의 바탕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p 184~185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집단 형성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혹은 그보다 빨리 개성의 발현이라는 과제가 부과됩니다. 또래 친구들과 먼저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과 호흡을 맞추고 감각을 공유하고 하나의 신체를 만들어내는 데 전념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집단을 만들지 마라, 멍청하게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마라, 개별화 해라, 자신만의 태그를 만들어 붙여라,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을 타인과 나누지 마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인사 규칙이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pp 186

 

 

나다움의 내막

 

1980년대부터 사회 전반에 나다움은 상품 구매로만 표현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소비단위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이 소비 단위일 때는 소비 활동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습니다. 소비에 앞서서 가족의 합의가 필요하니까요. 혹 여윳돈이 생기면 아빠는 차를 바꾸고 싶다고 하고 엄마는 냉장고를 새로 장만하고 싶다고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묘를 세우라고 하는 상황일 때, 전체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소비는 억제됩니다. 결과적으로 소득은 충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소비 행동-다 같이 회전초밥을 먹으러 가는 것으로 끝을 낸다든지-이 서로의 타협점이 됩니다. 이는 가족 전원에게 유쾌하지 못한 결론인 동시에 시장도 유쾌하지 않은 결론입니다. 물건이 안 팔리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장은 소비 행동의 최대 억제 요인인 가족의 합의라는 과정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간단합니다. 가족을 해체하면 됩니다. 가족 전원이 저마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상품 구매를 하면 소비 행동은 급격하게 빨라집니다. 소비 단위의 사이즈를 작게 할수록 소비활동은 활발해집니다. 논리적으로는 자명합니다.

그렇게 관과 민이 힘을 합쳐 나답게 살기캠페인을 20년에 걸쳐 전개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방을 자기가 좋아하는 인테리어로 꾸미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를 자기가 좋아하는 그릇에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시간에 일어나 자기가 좋아하는 시간에 잠들고, 좋아하는 때에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 놀거나 여행을 합니다. -pp 187~188

 

 

면접에서의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

 

이전에 큰 출판사의 베테랑 편집자들과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취업 시즌이었기 때문에 편집자들에게 여러분은 면접을 볼 때 어떤 기준으로 합격, 불합격을 결정합니까?”하고 물어본 적이 잇습니다. 인사에 관련된 중요 정보를 알아내서 학생들에게 알려주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까지 수백 명을 면접해온 경험자들입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은 첫 대면 후 5초 만에 합격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수험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의자에 앉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할 때 이미 합격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겁니다. 남은 시간은 불합격인 사람을 어떻게 기분 좋게 퇴실시키느냐 하는 서비스 시간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5초에 어떻게 결정이 되는 걸까요? 애당초 뭘 보고 결정하는 걸까요. 구직 활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이해 불능이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즐겁게 일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판정 기준입니다. -pp 196~197

 

 

면접기술

 

노동의 장은 말을 바꾸면 협동의 장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입시학원에서 요구되는 한 사람만을 부각시켜 주위 사람을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지식과 기술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그 감화력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활력을 찾고 조금이라도 반짝거릴 수 있는, ‘집단의 에너지를 높이는 지식과 기술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취업 활동에서 면접을 잘하는 비결은 간단하다고 하면 간단하다고 학생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함께 면접을 보러 온 경쟁자들을 포함해서-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겁니다. -pp 201

 

문부성과 재계가 생각하고 있는 진로교육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개인의 부가가치를 어디까지 올릴 것인가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도 노동시장에서 졸업생=노동자의 몸값을 어디까지 올릴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진로교육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로교육의 결과로 대량의 전직자와 이직자가 구조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pp 202

 

 

수험공부와 일의 차이

 

수험공부와 일의 또 다른 차이는 원칙적으로 보상이 집단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수험공부의 경우 개인의 노력은 개인의 성적으로 게시됩니다. 하지만 협동작업인 일의 경우 플러스의 공헌도 마이너스의 실책도 개인의 성적으로 게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평가보다 자기평가를 높게 하고 있어서, “나는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옆에 있는 사람은 일을 거의 안 하는데도 왜 월급이 똑같은 거야하면서 그 부조리를 견딜 수 없어 합니다. -pp 205

 

 

모듈화 문제

 

두 사람이 떡을 만들고 있는데 그 일을 모듈화해서 한 사람은 반죽을 하고 한 사람은 팥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분업 덕분에 작업 속도가 붙습니다. 자기 일이 끝나면 귀가해도 좋습니다. “떡은 맛있는데 팥소가 좀 그렇다라는 말을 들어도 속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니까!”하며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떡 전체에 관한 포괄적 평가가 아니라 개별 평가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듈화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 빠지기 쉬운 중대한 함정이 있습니다. ‘떡 반죽모듈을 선택했기 때문에 시중에서 파는 팥소 대신 삶은 팥을 으깨어 직접 만든 팥소로 하면 떡이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옆 모듈에 관련된 의견을 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딸기모듈을 추가해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듈 변경은 매니저의 일이기 때문이죠. 모듈화한 일을 선택하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얻은 대가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할 권리를 내던진 셈이기 때문에 매니저가 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자기 일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매니저 권한을 내던졌다는 것은 요컨대 계층조직의 하층에 자신의 포지션을 못박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한테든 폐를 끼치든 않는 대신에 누구한테도 폐끼침을 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느 날 문득 좁은 구덩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자신을 자각하게 됩니다. 안됐지만. -pp 206~207

 

 

진로교육의 맹점

 

진로교육이 도입되길 희망하는 이는 기업 경영자들입니다. 알기 쉽게 그리고 지극히 산문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다루기 쉽고 비용이 싼인재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비즈니스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자기들이 신입사원 교육을 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대학에 부담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요즘 신입사원은 일을 하려는 동기가 약해서 동료와 협력도 못하고, 과장에게 한 번 야단 맞은 걸로 금방 그만 둔다, 모두 대학교육의 질이 문제다, 그러니 어떻게든 좀 바꿔 달라는 것이 경영자들의 목소리입니다.

(……) 그러나 실제로 대학이 지금 하고 있는 진로교육은 안타깝게도 대학이 자발적으로 생각해낸 게 아니라 대개는 기업인의 생각을 받든 컨설턴트가 대학에 제안해온 것이고, 그 본질은 변함없이 자기다움의 추구화려한 소비생활의 실현을 청년들에게 거의 국민의 의무로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pp 213~214

 

 

생각이 표현되는 게 아닌, 받아들인 언어가 표현된다

 

아이들은 먼저 언어적 환상속에 던져져야 합니다. 자기 몸의 감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언어만은 알고 있다. 이 같은 언어 상황이야말로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기충천하다든지 마음을 비워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조차도 시원하다같은 말은 아이들에겐 말만 먼저 있고 신체적 실감이 뒷받침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앎으로써 신체 감수성은 아이를 가두고 있던 일상을 넘어서 바깥으로 확장되려고 합니다. 저는 아이들의 촉수가 바깥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는 현상들을 교육적이라고 부릅니다. -pp 226~227

 

 

생각과 말의 괴리

 

교육 현장의 문제로 봤을 때, ‘먼저 생각과 느낌이 있다라는 전제를 취함으로써 아이들의 언어가 한없이 빈약해졌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봐야만 합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내면은 풍부한데 말이 부족해하는 가설을 받아들인 경우-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이런 전제를 취하고 있습니다-그 아이에게 말은 늘 종속적인 지위에 놓입니다. 그렇죠, 말은 말의 주인인 내면의 결함을 채워주기 위해 봉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종속자로 치부된다면, 말은 야위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 존재하는 것은 생각과 말은 늘 괴리한다실감뿐입니다. 그 괴리감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말을 이어가도록 추동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의 괴리감은 한탄해야 할 것도,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그 느낌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계기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괴리감이 우리를 타자의 말, ‘바깥으로 꾀어내는 것입니다. -pp 229~231

 

저는 제 자신이 미숙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미숙하고 어떻게 하면 그 미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 앞에서는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스승이란 그 앞에서 스스로 미숙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 앞에 있을 때 자신의 미숙함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그 사람 등을 보면서 뒤따라 걸어갈 때 한 걸음 한 걸음 성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pp 254

 

 

바깥으로 향하는 영적 교육

 

제가 정치적인 종교교육을 싫어하는 것은 이 바깥으로라는 근원적인 경향성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국민국가에서 종교는 여기와 저기 사이에 절대적인 분할선을 긋는 기능을 합니다. 근대적인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개념은 정치사적으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와해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국경선을 확정하는 기준이 된 것이 종교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을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만의 두 나라로 분할한 것이죠. 국민국가는 본질적으로-현실적인 가능성 여부는 별도로 하고- 단일 종교에 의한 국민의 정치적 재편을 목표로 합니다. 여기는 여기만의 종교로 저기는 저기만의 종교로 고정시켜, 양쪽은 영적으로 단절되고 그 사이에 어떠한 영적인 연결다리도 있을 수 없는 것이 국민국가가 신봉하는 종교관입니다. 여기에서는 단절과 배제의 역학만이 작동하고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험의 계기는 치명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 왜냐하면 제 정의는 영적이다, 바깥과 소통하고 싶다는 지향으로 가득 찬 것에 모든 것이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경지를 향해서 그 경지를 넘으려고 하는 지향만이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pp 259~260

 

 

 

인용

목차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돼지엄마와 비즈니스식 교육, 그 너머

단재학교에서 전체여행이 중요한 이유

제주를 보니 열정이 샘솟는다

교탁에 올라서라

열심히 하는 교사가 되지 말자

공생의 기술: 잡색의 삶

학교 평가가 교육의 질을 더 떨어뜨린다

온실 같은 학교 만들기

여기의 가치관과 배움

배우고 싶다면 여기의 가치관을 박차라

신나던 체육대회와 고기파티

공부를 잘한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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