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학원 강사는 ‘다른 사람과 같은 수준에 도달했는가?’로 당신을 평가합니다. 반면 레이스 드라이버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로 당신을 평가합니다. 그 평가를 실시하기 위해서 한쪽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도달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한쪽은 ‘끝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도달점을 소거시킵니다. 두 교사가 다른 점은 이것입니다. 네, 이것뿐입니다. -35쪽
배움에는 송신하는 자와 수신하는 자, 두 명의 참가자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신자’입니다. 제자가 선생님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가르침’이라 믿고 수신할 때 비로소 배움은 성립합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배움’으로서 수신된다고 하면 그 메시지가 ‘하품’이든 ‘딸꾹질’이든 ‘거짓말’이든 상관없습니다. -39쪽
지금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은 처음으로 준비했던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는 욕망도 아니고(왜냐하면 당신이 타인의 마음속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추측한 상대방의 ‘욕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이야기한 것은 ‘당신이 이야기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이 듣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라 당신이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닐까”란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인 것입니다.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이끈 것은 대화에 참여한 두 당사자 중 그 어느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작’도 아닙니다.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둘 중 누구도 아닌 그 누군가입니다.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말할 생각도 없던 이야기들이 끝없이 분출되는 듯한,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처음부터 형태를 갖춘 ‘내 생각’ 같은 미묘한 맛을 풍기는 말이 그 순간에는 넘쳐 나옵니다.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58~59쪽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 것은 일부러 그랬다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실은 명백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 오해의 폭에 의해서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것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은 불확실하고 애매한 위치에 멈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訂正의 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만약 쉽게 알기 쉬운 방식으로, 여러분이 알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오해 따위는 생겨날 리 없겠죠 -자크라캉, 『정신병 하』
‘물음 문問’이라는 것은 ‘訂正으로 가는 문’을 가리킵니다. 즉 누군가 뭔가를 말하면 “그건 이런 걸 말하는 거야?”라고 되묻고, 그것에 대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라는 식으로 ‘정정’이 있는, 주고받음으로 시작되는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죠. 자물쇠가 풀려서 문이 열리고, 바깥 공기가 들어오는 느낌…. 그것이 에세이 안에 담겨 있으면 읽는 사람은 어쩐지 구원받는 느낌이 듭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암기한 문구를 읽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더듬더듬 말을 찾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110쪽
한 권의 책에 심을 수 있는 수수께끼는 논리적으로 무한합니다. 독자 한 명당 수수께끼가 한 개만 있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어릴 때와 어른일 때 책의 양상은 전혀 다릅니다. “아, 이 책에 이런 게 있었던가.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아이였을 때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을 어른이 되어서 자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하거나 취직을 하거나 아이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거나 친한 사람이 죽는 등 우리에게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실연 전과 후가 다르듯 같은 책이 사건 전후로 보여주는 ‘수수께끼’는 다릅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수수께끼는 무한대인 셈입니다. -119쪽
우리가 경의를 품는 대상은 ‘학생에게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는 선생’도 아니고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선생’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옳은 의견을 말하는 선생’도 아닙니다.
우리가 경의를 품는 것은 ‘수수께끼 선생님’입니다. 혹은 무지의 선생님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표현입니다만(하지만 이 책은 ‘계속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의견을 표명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무지한 선생님이 아니라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즉 나의 지가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선생님을 가리킵니다.” 선생님은 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에만 제자들은 몸이 떨리는 경의를 느낍니다. -125~126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오답자로서의 독창성’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어느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이 그 수신자의 독창성과 아이덴티티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131쪽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언어는 이미 성립되어 있어, 그의 탄생은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고, 아이는 규칙을 모른 채 강제로 게임에 참가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머지않아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의 의미를 하나씩하나씩 발견해갑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말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는 음성이 어떤 것을 기호로 대리 표상한다는 ‘말의 규칙’을 모른 채 말 속에 던져지기 때문에 알아갑니다.
이 프로세스의 경이로움은 규칙을 모르고 게임을 하는 중에 규칙을 발견한다는 역설에 있습니다. 아이가 사람들의 음성이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뜻도 모를 음성을 듣고 “이것은 뭔가를 전하려는 게 아닐까?”하고 물음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음성에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기호 배열에는 어떤 규칙성이 있는 게 아닐까? 이것이 바로 모든 배움의 근원에 있는 질문 던지기입니다. 배움의 모든 여정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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