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⑤강: 배우고 싶다면 ‘여기의 가치관’을 박차라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 이 학생에게 연극수업을 빠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한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하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여기의 가치관’에 매몰되면 공부를 할 수 없다
이 학생은 공부를 ‘투입-산출’의 등가교환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공부한 후에 얻게 될 이득이 명확히 보일 때만 공부를 하려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로 평가절하하며 아예 하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말 자체가 투자 대비 산출의 경제학적 개념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투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고, 그에 반비례하여 산출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산출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반대로 최대의 투자로 최소의 산출이 나왔다면 자신이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는 우치다쌤이 『하류지향』이란 책에서 ‘노동주체와 소비주체’라는 개념으로 꼼꼼히 설명했다.
그런데 소비주체적인 이런 생각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사람을 사귈 때도 ‘이 사람을 사귀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라는 이해타산으로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관계를 맺으려 하고, 공부할 때도 ‘이걸 배우면 어떤 이익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지금 당장 가치를 알 수 있는 것만 공부하려 한다. 거기다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게 이익이라고만 생각하니,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부하여 단기간 내에 높은 성적을 얻을까?’를 궁리하게 된다. ‘여기의 가치관’에 함몰된 사람은 오히려 공부를 한다고 스스로 착각할지는 모르지만, 공부와는 오히려 담을 쌓고 점차 멀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 교육은 투자와 산출이 일치하지 않고, 그 과정 또한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교육과는 멀어진다.
‘여기의 가치관’을 버릴 때 공부할 수 있다
삶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지금 당장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아니 어쩌면 동섭쌤이 말한 것처럼 ‘모든 가치는 사후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가치를 알 수 없지만 해야 하는 게 있고, 왜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배워야 하는 게 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아예 경험조차 안 한다면, 그건 어찌 보면 ‘난 내 생각 이외의 것들은 하려 하지 않을 거다’는 말과 같고, 그건 ‘난 여기의 가치에만 머물 거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삶이 점차 협소해지고 관계는 비좁아지며, 앎은 편견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부란 지금 공부를 했다 해서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상품거래는 돈과 상품의 교환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공부는 노력과 성취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그 가치 또한 언제 알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면 ‘투자-산출’의 경제학적인 관점은 철저히 버려야만 하고, 모름에 투신하려는 용기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일 때에야 비로소 공부를 할 수 있고, 일상적인 가치로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너른 세계를 향해 다가갈 수 있다.
▲ 작년 1월에 제주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모악산과 전주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조감적 시좌란 이런 것.
‘배운다’는 것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부름을 받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이 ‘물듦’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잣대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힐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자격증도 딸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조감적 시좌의 높이로 이륙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출판사, 2011년, pp 59
‘여기의 가치관’으로 공부하려 하면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히거나 자격증은 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울타리를 수평으로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에 반해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 판단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부하면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조감적인 시좌로 이륙할 수 있다. 그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되어 자신이 바뀌고 생각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이건 고미숙 선생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과 공명하는 말이다.
▲ 공부라는 한자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건 천인합일을 담고 있고, 낯선 세상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교육은 증여다?
여러 얘기를 했지만, ‘교육은 등가교환의 정신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지금의 가치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되었다면, 이젠 교육에 대해 ‘배워서 성공한다’는 식의 기존의 정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애초에 이 강의가 ‘트위스트 인생학’이라 불릴 수 있다고 한 만큼 교육의 일면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동섭쌤은 단호히 ‘교육(삶)은 증여다’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다음 후기엔 증여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정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교육은 증여라는 이야기, 그리고 증여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Give & Take'를 완전히 붕괴시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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