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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3. 당음, 가슴으로 쓴 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3. 당음, 가슴으로 쓴 시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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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

 

 

이달의 낭만적 느낌이 담긴 시

 

당시(唐詩)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宋詩)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觀照)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眺望)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 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高遠)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함축을 중시하고 의흥(意興)이 뛰어난 시를 당음(唐音)’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유현(幽玄)한 맛을 풍기는 시를 송조(宋調)’라고 일컬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풍격은 실제 작품 상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가. 먼저 당시풍의 시를 감상해보자. 이달(李達)은 조선 중기 삼당(三唐)시인으로 일컬어진 사람이다. 다음은 그의 양양곡(襄陽曲)이다.

 

平湖日落大堤西 평호 긴 뚝 서편으로 해가 기울고
花下遊人醉欲迷 꽃 아래 놀던 이들 취해 비틀거리네.
更出敎坊南畔路 다시금 교방 남쪽 길로 나서려니
家家門巷白銅鞮 집집 골목마다 백동제 가락일세.

 

평호(平湖)는 중국 남방에 있는 아득히 넓은 호수다. 호수가로 끝도 없이 긴 방죽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장엄한 봄날의 하루 해가 저물고 있다. 꽃놀이 나온 벗님들은 벌써 술에 잔뜩 취하여 걸음조차 가누질 못한다. 아스라한 수면과 끝없이 긴 방죽, 호수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저녁노을, 붉은 꽃과 불콰하게 취한 사람들. 그들은 다시 기생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교방 남쪽 길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고 있다. 거리 거리마다에선 흥겨운 노래 가락이 흘러넘친다.

 

시인은 상상을 통해 멋진 한 폭 봄날의 장면을 그려 보이고 있다. 무슨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철학적 사변이 끼어들 틈은 아예 없다. 이 시를 읽고 감상하는 독자들의 정서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시인이 그려 보이고 있는 이국적 풍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자신이 봄날의 흥취에 듬뿍 취해 교방 남반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되며, 술집에서 들려오는 농탕한 노래 가락을 듣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시인이 그려 보이고 있는 경물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일 뿐 제 3의 의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엄하리만큼 아름다운 봄날의 풍광 속에 그려지는 젊음의 낭만은 곧 관념 속에 남아 있는 태평성대에의 열망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낭만적 상상은 일그러지고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자아를 멀찌감치 떼어 놓아 정서적 정화(淨化)와 일탈(逸脫)을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달(李達)이 언어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은 서구 낭만주의 시들이 그려 보이고 있는 이국정서의 표출과 다를 것이 없다. 상상의 화면으로 그려낸 평호의 긴 뚝은 곧 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의 호도(湖島)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박목월이 그려낸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눈에 비친, 남도(南道) 삼백리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과도 본질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日入投孤店 山深不掩扉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립도 닫지를 않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닭 울어 앞길을 묻노라니까 누런 잎만 날 향해 날려 오누나.

 

이달(李達)보다 조금 뒤진 시기의 걸출한 시인 권필(權韠)도중(途中)이란 작품이다. 권필은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 두시(杜詩)의 경지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당시풍에 정통한 시인이다.

 

시를 보면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주막이 있고,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는 삶에 지친 나그네가 있다. ‘황엽(黃葉)’이라 했으니 계절은 늦은 가을이다. 하루 종일 길을 걸은 나그네는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에야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주막에 들 수가 있었다. 2구에서 밤까지 열어 둔 사립문이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깊은 밤까지 도적 걱정 없이 문을 열어 둘 수 있는 편안함을 그는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자신을 내몬 부조리한 현실이 더 이상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멀어진 데 대한 안도감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닭이 우는 가을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나그네는 다시 쫓기듯 길을 재촉한다. 뼈를 저미는 추위.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묻는 나그네 앞에 들려오는 대답은 공허한 바람소리와 자신을 향해 날려오는 누르시든 낙엽뿐이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갈 길은 있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이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닌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대개 20자에 불과하지만 길가는 나그네의 신고(辛苦)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시이다.

 

 

 

변방의 추위에 괴롭지만 어머니껜 봄처럼 따뜻합니다라고 말하다

 

欲作家書說苦辛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恐敎愁殺白頭親 흰 머리의 어버이 근심하실까 저어하여,
陰山積雪深千丈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장인데
却報今冬暖似春 금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말하네.

 

선조 때 시인 이안눌(李安訥)기가서(寄家書)란 작품이다. 이안눌은 평생에 두보(杜甫)의 시를 일만 삼천 번을 읽었다는 시인이다. 그가 함경도 북평사의 벼슬을 살러 북방에 가 있을 때 집에 편지를 보내면서 지은 시이다. 문집에 보면 편지를 받고 지은 시가 위 시 바로 앞에 실려 있다. 그 사연인 즉, 지난해 집에서 보낸 편지와 겨울옷을 해를 넘겨서야 받았는데, 집 식구는 남편이 변방에서 고생하느라 야윈 것도 모르고, 옷을 예전 입던 옷에 맞춰 보낸 까닭에 헐겁기 그지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위 시는 그 편지와 옷을 받고 보낸 답장이다. 따뜻한 남쪽 고향을 떠나 북풍한설(北風寒雪) 휘몰아치는 낯선 변방에서 키를 넘게 쌓이는 눈과 혹독한 추위 속에 보낸 겨울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몸도 견디다 못해 예전 옷이 헐거울 정도로 야위었다. 이러한 괴로움을 편지에 쓰려 하니 안 그래도 변방에 자식을 보내 놓고 근심에 쌓여 계실 늙으신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도리어 어머님! 이번 겨울은 마치 봄처럼 따뜻합니다하는 거짓말을 적고 말았다는 것이다.

 

 

 

봄에 편지를 쓰고 가을에 썼다고 거짓으로 적다

 

塞遠山長道路難 먼 변방 산은 길고 길은 험하니
蕃人入洛歲應峐 서울에 닿을 제면 한 해도 늦었겠지.
春天寄信題秋日 봄날 올린 편지에 가을 날짜 적은 뜻은
要遣家親作近看 근래 부친 편지로 여기시라 함일세.

 

이어지는 둘째 수이다. 아득한 변방, 험한 길, 인편을 구해 편지를 보낸대도 이 편지는 연말이 다 되어서야 서울에 닿을 것이다. 그래서 봄날 쓰는 편지에 가을 날짜를 적었다. 조금이라도 날짜가 가까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까닭이다. 봄날 보낸 편지를 겨울에야 받는다면 또 그 상심은 오죽하시겠는가.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붉은 마음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와 같이 당시(唐詩)는 가슴으로 전해오는 정감의 세계를 노래한다. 때로 들뜬 어감으로, 간혹 슬픔에 젖어 노래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는 법은 좀체 없다. 이런 까닭에 당시풍(唐詩風)의 시는 이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보다는 감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즐겨 불리워진다. 당시풍과 송시풍이 시사(詩史)의 전개에서 반복 교체의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송암(餞松巖), 중남해영대(中南海瀛臺), 20세기.

넘실대는 물결. 버들 휘늘어진 둑길. 유정한 봄날의 하루해가 간다. 청춘이 간다.  

 

 

 

인용

목차

1. 꿈에 세운 시()의 나라

2.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

3.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

4.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

5. 배 속에 넣은 먹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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