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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관물론(觀物論), 바라봄의 시학(詩學) - 12.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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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관물론(觀物論), 바라봄의 시학(詩學) - 12.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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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花開因雨落因風 비를 맞고 피어나서 바람 따라 떨어지니
春去春來在此中 봄 오고 가는 소식 이 가운데 있구나.
昨夜有風兼有雨 간밤에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더니
桃花滿發杏花空 복사꽃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오.

 

권벽(權擘)춘야풍우(春夜風雨)이다. 물리(物理)의 순환하는 이치를 절묘하게 꼬집어 내었다. 비가 와서 꽃을 피우면, 바람은 와서 이를 떨군다. 어제 만발했던 살구꽃은 진흙탕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엔 어느새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져버린 살구꽃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가버릴 것이고, 우리네 인생도 그렇듯이 흘러가 버릴 것이 아닌가. 시인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는 데도 시는 다분히 주관적 색채로 물들어 있다. 소옹(邵雍)의 관점으로는 이물관물(以物觀物)에서 더 나아가 이리관물(以理觀物)의 경계에 근접하였으나, 왕국유(王國維)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이아관물(以我觀物)의 유아지경(有我之境)에 가깝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란 있을 수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가 없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무아지경이란 시인의 정신이 물경(物境) 가운데 녹아들어 사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고, 마침내 자신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심응형석(心凝形釋)’의 경계이다. 현대시를 가지고 살펴보자.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의 윤사월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그렇지만 시의 화자는 문맥에 끼어듦 없이 눈에 비친 장면만을 포착할 뿐이다. 외딴 봉우리에 송홧가루가 날리고, 나른한 윤사월의 긴 오후가 꾀꼬리 울음 속에 뉘엿해진다. 외딴 집이 있고, 눈먼 처녀는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그녀가 엿들은 것은 무슨 소리였을까. 긴 봄날이 덧없어 우는 꾀꼬리의 울음 소리였을까, 송홧가루를 날리는 바람소리였을까. 윤사월의 애절한 느낌이 문설주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의 몸짓 속에 잊히지 않는 영상으로 다가온다. 무아지경 속에 유아지경이 있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너머 바다는

보름살이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의 영산홍이다. 멀리 만조(滿潮)의 바다는 넘실대고, 일렁이는 봄볕은 영산홍 꽃잎에 산빛을 어리었다. 만월(滿月)로 차오르는 보름사리 때에 그녀는 쓸모없이 놋요강을 툇마루에 놓아두고 낮잠이 혼곤하다. 슬픈 것은 소실댁(小室宅)이건만, 우는 것은 갈매기다. 슬픈 그녀는 정작 낮잠이 깊었는데, 갈매기만 소금발이 쓰라리다며 끼룩끼룩 울어대는 것이다.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은 그 상황설정의 유사함이 흥미롭다. 가난한 산지기의 외딴 집에서 바깥 세계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눈 먼 처녀, 산자락 집에서 놋요강을 옆에 두고 툇마루에 누워 기다림에 지쳐 낮잠에 빠져든 슬픈 소실댁은 등가의 심상을 이룬다. ‘슬픈쓰려서우는의 감정 이입이 있어 윤사월보다는 주관 정취가 강하다. 또한 유아지경 속에 무아지경의 느낌이 있다. 이것은 이른바 미학에서의 이아관물(以我觀物), 이물관물(以物觀物)이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2.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3.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4.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5.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6. 생동하는 봄풀의 뜻

7. 생동하는 봄풀의 뜻

8. 생동하는 봄풀의 뜻

9. 생동하는 봄풀의 뜻

10.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11.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12.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13. 속인(俗人)과 달사(達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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