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②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 나무 끝 부용꽃 산 속 붉은 떨기 피웠네. |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 시내가 집 적막히 사람 없는데 분분히 피었다간 또 떨어지네. |
역시 왕유(王維)의 「신이오(辛夷塢)」란 작품이다. 산속 가지 끝에 붉은 부용꽃이 망울을 터뜨렸다. 그 옆으로 졸졸 흘러가는 시내, 다시 시냇가엔 초가집 한 채. 집에는 하루 종일 사람의 기척이 없다. 자태를 뽐내어도 보아줄 이 없는 적막한 이 산중에서 무엇이 바쁜지 꽃들은 어지러이 피고 진다. 시간도 숨을 멈춘 것만 같다. 꽃이 피고 또 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시의 화면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단지 화면의 바깥에서 독자를 자기 옆에 정답게 앉혀 놓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함께 보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무아지경이다.
昔我往矣 揚柳依依 | 옛날 내가 떠날 때는 수양버들 능청댔지. |
今我來思 雨雪霏霏 | 오늘 내가 돌아가면 눈비만 흩날리리. |
行道遲遲 載渴載飢 | 가는 길 멀고 멀다 목 마르고 배고프네. |
我心傷悲 莫知我哀 | 내 마음 서글퍼라 아무도 몰라주네. |
변방 전쟁터로 수자리 살러 간 병사의 자기 연민에 찬 노래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채미(采薇)」란 작품이다. 첫 네 구절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도 돌아갈 기약은 아득하기만 한데, 아련한 기억 속의 고향은 능수버들 하늘대는 봄날의 따사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변경(邊境)의 신산(辛酸)은 지친 병사에게 그 고향의 모습마저 눈비만 흩날리는 스산함으로 일그러뜨려 놓았다. 이를 굳이 변방 수자리 병사의 노래라고만 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 고향을 품고도 돌아가 안기지 못하고 국외자로 타향을 떠도는 우리의 노래는 아닐 것인가? 유아지경(有我之境)이다. 그러나 유아지경이라고 해서 위 시와 같이 반드시 문면에 화자의 정서가 드러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인용
6. 생동하는 봄풀의 뜻①
7. 생동하는 봄풀의 뜻②
8. 생동하는 봄풀의 뜻③
9. 생동하는 봄풀의 뜻④
13. 속인(俗人)과 달사(達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