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
관물(觀物)의 정신이 미학(美學)의 경계로 넘어오면 앞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가 된다. 청말(淸末)의 왕국유(王國維)는 소옹(邵雍)의 관물론에서 개념을 빌려와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설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이 있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있다. “눈물 어린 눈으로 물어봐도 꽃은 말이 없고, 붉은 꽃잎 어지러이 그네 위로 떨어지네[淚眼問花花不語, 亂紅飛過鞦韆去].”와 “외론 여관 문을 걸고 봄 추위를 견디니, 두견새 소리 속에 기운 해가 저무네[可堪孤館閉春寒, 杜鵑聲裏斜陽暮].”는 유아지경(有我之境)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네[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와 “차가운 물결은 담담히 일고, 흰 새는 유유히 내려앉는다[寒波澹澹起, 白鳥悠悠下].”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은 이아관물以我觀物하는 까닭에 물(物)과 아(我)가 모두 아(我)의 색채로 물들게 되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이물관물(以物觀物)하므로 어느 것이 아(我)이고 어느 것이 물(物)인지를 알 수가 없다.
유아지경(有我之境)은 예시에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의 감정이 객관 물태(物態)에 스며들어 강렬한 주관의 색채를 띠는 경우이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일체 시인의 주관 정서가 드러남 없이 아(我)가 물(物)과 혼융되어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계를 연출하는 경우이다. 왕국유(王國維)는 이어지는 글에서 무아지경은 호걸의 인사만이 도달할 수 있다 하여 유아지경 보다 무아지경을 높이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왕국유(王國維)가 소옹(邵雍)의 개념을 빌려와 유아지경(有我之境)을 이아관물(以我觀物)에,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이물관물(以物觀物)에 각각 견주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이아관물(以我觀物)과 이물관물(以物觀物)의 함의는 소옹(邵雍)과는 자못 다르다. 소옹(邵雍)은 이물관물(以物觀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리관물(以理觀物)까지를 요구함으로써 사물의 저편에 존재하는 도리(道理)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해, 왕국유(王國維)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을 도(道)의 전제 없이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심미경계(審美境界)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輕陰閣小雨 深院晝牗開 | 그늘 진 누각에 보슬비 내려 깊은 뜰 한낮에야 문을 열었네. |
坐看蒼苔色 欲上人衣來 | 앉아서 이끼 빛을 보고 있자니 내 옷 위로 스물스물 오르려 한다. |
당나라 왕유(王維)의 「서사(書事)」란 작품이다. 옅은 그늘이 지나가고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비가 지난 뒤에야 방에 틀어 박혀 있던 시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보슬비에 촉촉이 젖은 이끼 위에 가만히 앉아 본다. 비온 뒤의 상쾌한 기운, 이끼의 푸른 빛. 가만히 앉아 있는 시인의 옷깃 위로 이끼는 제 몸을 나누어 올라오려 한다. 시인의 옷마저 이끼로 덮으려 한다. 우연히 빈 뜰에 나와 앉았다가 물(物)과 아(我)가 하나로 만나 나누는 흐뭇한 교감. 그대로 앉아 있으면 나는 곧 이끼 덮힌 바위가 될 것만 같다. 물(物)로 향하는 아(我)의 삼투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폰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그 과정은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 | 나무 끝 부용꽃 산 속 붉은 떨기 피웠네. |
澗戶寂無人 紛紛開且落 | 시내가 집 적막히 사람 없는데 분분히 피었다간 또 떨어지네. |
역시 왕유(王維)의 「신이오(辛夷塢)」란 작품이다. 산속 가지 끝에 붉은 부용꽃이 망울을 터뜨렸다. 그 옆으로 졸졸 흘러가는 시내, 다시 시냇가엔 초가집 한 채. 집에는 하루 종일 사람의 기척이 없다. 자태를 뽐내어도 보아줄 이 없는 적막한 이 산중에서 무엇이 바쁜지 꽃들은 어지러이 피고 진다. 시간도 숨을 멈춘 것만 같다. 꽃이 피고 또 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시의 화면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단지 화면의 바깥에서 독자를 자기 옆에 정답게 앉혀 놓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함께 보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무아지경이다.
昔我往矣 揚柳依依 | 옛날 내가 떠날 때는 수양버들 능청댔지. |
今我來思 雨雪霏霏 | 오늘 내가 돌아가면 눈비만 흩날리리. |
行道遲遲 載渴載飢 | 가는 길 멀고 멀다 목 마르고 배고프네. |
我心傷悲 莫知我哀 | 내 마음 서글퍼라 아무도 몰라주네. |
변방 전쟁터로 수자리 살러 간 병사의 자기 연민에 찬 노래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채미(采薇)」란 작품이다. 첫 네 구절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도 돌아갈 기약은 아득하기만 한데, 아련한 기억 속의 고향은 능수버들 하늘대는 봄날의 따사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변경(邊境)의 신산(辛酸)은 지친 병사에게 그 고향의 모습마저 눈비만 흩날리는 스산함으로 일그러뜨려 놓았다. 이를 굳이 변방 수자리 병사의 노래라고만 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 고향을 품고도 돌아가 안기지 못하고 국외자로 타향을 떠도는 우리의 노래는 아닐 것인가? 유아지경(有我之境)이다. 그러나 유아지경이라고 해서 위 시와 같이 반드시 문면에 화자의 정서가 드러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花開因雨落因風 | 비를 맞고 피어나서 바람 따라 떨어지니 |
春去春來在此中 | 봄 오고 가는 소식 이 가운데 있구나. |
昨夜有風兼有雨 | 간밤에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더니 |
桃花滿發杏花空 | 복사꽃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오. |
권벽(權擘)의 「춘야풍우(春夜風雨)」이다. 물리(物理)의 순환하는 이치를 절묘하게 꼬집어 내었다. 비가 와서 꽃을 피우면, 바람은 와서 이를 떨군다. 어제 만발했던 살구꽃은 진흙탕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엔 어느새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져버린 살구꽃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가버릴 것이고, 우리네 인생도 그렇듯이 흘러가 버릴 것이 아닌가. 시인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는 데도 시는 다분히 주관적 색채로 물들어 있다. 소옹(邵雍)의 관점으로는 이물관물(以物觀物)에서 더 나아가 이리관물(以理觀物)의 경계에 근접하였으나, 왕국유(王國維)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이아관물(以我觀物)의 유아지경(有我之境)에 가깝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란 있을 수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가 없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무아지경이란 시인의 정신이 물경(物境) 가운데 녹아들어 사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고, 마침내 자신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심응형석(心凝形釋)’의 경계이다. 현대시를 가지고 살펴보자.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의 「윤사월」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그렇지만 시의 화자는 문맥에 끼어듦 없이 눈에 비친 장면만을 포착할 뿐이다. 외딴 봉우리에 송홧가루가 날리고, 나른한 윤사월의 긴 오후가 꾀꼬리 울음 속에 뉘엿해진다. 외딴 집이 있고, 눈먼 처녀는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그녀가 엿들은 것은 무슨 소리였을까. 긴 봄날이 덧없어 우는 꾀꼬리의 울음 소리였을까, 송홧가루를 날리는 바람소리였을까. 윤사월의 애절한 느낌이 문설주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의 몸짓 속에 잊히지 않는 영상으로 다가온다. 무아지경 속에 유아지경이 있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小室宅)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너머 바다는
보름살이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의 「영산홍」이다. 멀리 만조(滿潮)의 바다는 넘실대고, 일렁이는 봄볕은 영산홍 꽃잎에 산빛을 어리었다. 만월(滿月)로 차오르는 보름사리 때에 그녀는 쓸모없이 놋요강을 툇마루에 놓아두고 낮잠이 혼곤하다. 슬픈 것은 소실댁(小室宅)이건만, 우는 것은 갈매기다. 슬픈 그녀는 정작 낮잠이 깊었는데, 갈매기만 소금발이 쓰라리다며 끼룩끼룩 울어대는 것이다.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은 그 상황설정의 유사함이 흥미롭다. 가난한 산지기의 외딴 집에서 바깥 세계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눈 먼 처녀’와, 산자락 집에서 놋요강을 옆에 두고 툇마루에 누워 기다림에 지쳐 낮잠에 빠져든 ‘슬픈 소실댁’은 등가의 심상을 이룬다. ‘슬픈’과 ‘쓰려서’와 ‘우는’의 감정 이입이 있어 「윤사월」보다는 주관 정취가 강하다. 또한 유아지경 속에 무아지경의 느낌이 있다. 이것은 이른바 미학에서의 이아관물(以我觀物), 이물관물(以物觀物)이다.
인용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3. 생동하는 봄풀의 뜻
4.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5. 속인과 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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