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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8. 관물론, 바라봄의 시학 -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8. 관물론, 바라봄의 시학 -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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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128일 아침. 매화 분에 물을 주라 하셨다. 날씨는 맑았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다. 조금 뒤 선생께서 누울 자리를 정돈하라 하시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으신 채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구름이 흩어지고 눈은 걷혔다.

 

 

문인(門人) 이덕홍(李德弘)이 쓴 퇴계선생고종기(退溪先生考終記)이다. 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 본 제자의 기록으로는 투명하리만치 담담하다. 슬픔이 묻어날 빈틈이 없다. 스승의 용태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창밖의 날씨로 쏠려 있었다. 그는 과연 무슨 마음으로 스승이 서거하던 날의 기후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임종하던 날 아침, 스승은 방안 매화에 물을 줄 것을 명했고, 제자는 그것을 무슨 조짐으로 알았다. 과연 저물녘이 되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며 난데없는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펑펑 쏟아졌다. 죽음을 예감한 스승은 누운 자리의 정돈을 명하고, 마른 형해를 부축해 일으키자 마지막 숨은 앉은 선생의 비간(鼻間)을 빠져나갔다. 아픈 곡성도 들리지 않았다. 정밀이 흐르는 가운데 찌푸렸던 하늘은 다시 열리고, 흩지던 눈발이 맑게 걷히었다. 분분히 흩날리는 설중(雪中)에 선생 방의 매화는 그날 꽃망울을 터뜨렸던가 터뜨리지 않았던가. 세상을 뜨기 닷새 전 선생의 동태를 이덕홍(李德弘)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123. 설사를 하셨다. 매화 분이 그 곁에 있었는데, 다른 데로 옮기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매형(梅兄)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미안하구나.”하셨다.

 

 

매처학자(梅妻鶴子)임포(林逋)의 말도 있고, 황산곡(黃山谷)산반시제해시형(山礬是弟梅是兄)”의 구()도 있지만, 퇴계(退溪)의 매화(梅花)에 대한 애호는 마치 하나의 인격체를 대하는 듯하다. 임종하던 날조차 그는 매화 분에 물 줄 것을 명했고, 불결한 냄새가 매화 분에 닿는 것조차 신경을 쓰고 있다. 사물에 자아를 얹고, 관물(觀物)을 통해 천기(天機)를 읽었던 선인들의 삶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와 비슷하게 조식(曺植)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던 문인 정인홍(鄭仁弘)은 당시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1215일 아침. 인홍(仁弘)과 우옹(宇顒)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 정신이 전과 다르니 죽을 모양이다. 다시는 약을 올리지 마라하시고, 손으로 두 눈을 부비고 눈동자를 열어 보시더니 자세하고 밝은 것이 평시와 다름이 없구나하셨다. 또 창을 열게 하시더니, “하늘 해가 참 맑다하셨다. 이날로 선생은 약을 끊으시고, 미음조차 입에 대지 않으셨다. 종일 가만히 누워 계셨으나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칠정(七情)에 얽매여 사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은 감히 생각키 어려운 광경들이다. 창 쪽을 가리키며 빛을 더하고 운명했다던 서양 어느 철학자의 죽음보다 훨씬 더 장엄하지 않은가. 죽음 앞에서도 사물을 보는 눈은 닦아낸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일찍이 조식(曺植)이 지은 무제(無題)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雨洗山嵐盡 尖峯畵裏看 산안개 말끔히 비 씻어 가니 그림 같이 드러나는 뾰족 묏부리.
歸雲低薄暮 意態自閑閑 저물녘 녈 구름은 낮게 깔리어 그 모습 제 절로 한가롭구나.

 

비가 지나가자, 자욱하던 이내가 말끔히 걷히었다. 그래도 산허리엔 저물녘 하루 일과를 마친 구름이 귀가를 준비하고 있고, 그 위로 뾰족한 묏부리가 발묵(潑墨)의 그림처럼 새틋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바쁠 것 하나 없는 구름의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깊은 편안함에 잠겨든다. 유유자적하다.

 

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산과 구름 모두 다 희고 희거니 구름인지 산인지 분간 못하네.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峯 구름 가자 산만이 홀로 섰구나 일만이야 이천봉 금강이라네.

 

송시열(宋時烈)금강산(金剛山)이다. 천인(千仞) 절벽 위에서 바윗돌을 굴리는 기상이 느껴진다. 개골(皆骨)이라 산도 희고 구름도 희다. 시인은 불변용(不辨容)’의 상태에서 운귀(雲歸)’로 미망(迷妄)을 걷어냄으로써 일만 이천 멧부리의 특립독행(特立獨行)을 돌올(突兀)하게 펼쳐 보인 것이다. 노산 이은상이 일찍이 금강을 노래하여, “금강이 무엇이더뇨 돌이요 물일래라. 돌이요 물일러니 안개요 구름일러라. 안개요 구름일러니 있고 없고 하더라의 영탄을 발하였더니, 이제 고금의 솜씨가 방불함을 알겠다.

 

萬物變遷無定態 만물이 변천함은 일정함이 없나니
一身閒適自隨時 한가로이 자적하며 때를 따라 사노라.
年來漸省經營力 근년 들어 사는 일은 돌보질 않고
長對靑山不賦詩 청산을 마주 보며 시도 짓질 않는다.

 

이언적(李彦迪)무위(無爲)란 작품이다. 소동파(蘇東坡)적벽부(赤璧賦)에서 대개 장차 그 변하는 것으로부터 본다면 천지는 일찍이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그 변치 않는 것으로부터 본다면 물()과 아()가 모두 다함이 없다[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고 했던가. 젊은 날 성취를 향한 집착과 작위하고 경영하던 마음을 훌훌 던져 버리고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 다만 일신(一身)의 한적(閒適)을 추구할 뿐이다. 청산은 말이 없으니 그를 보며 묵언(默言)의 마음을 배운다. 도학자의 구김 없는 마음자리가 잘 펼쳐져 있다.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높은 경계다. 활연(豁然)한 탈속(脫俗)의 경계를 맛보게 한다.

 

 

관물(觀物)함으로써 그 속에 구현된 리()를 읽어내고, 그 리()를 체법(體法)함으로써 인간 삶과 연관 짓는 것은 유가(儒家) 인식론의 바탕이 된다. 송대의 이학자 소옹(邵雍)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관물(觀物)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리()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의 물()은 리()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 없는 것이 없다.

 

 

그는 눈으로 사물의 외피만을 보는 것을 이아관물(以我觀物)’, ()으로 리()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이물관물(以物觀物)’에 견주고, ‘이물관물(以物觀物)’반관(反觀)’이라 하여, ()로써 물()을 보니 그 사이에는 아()가 개재될 수 없다고 하였다. ()로써 물()을 봄은 성()이고, ()로써 물()을 봄은 정()이다. ()은 공변되고 밝지만, ()은 치우치고 어둡다[以物觀物性也, 以我觀物情也, 性公而明, 情偏而暗].”고 부연하였다. 이때 성()은 천리(天理), ()은 인욕(人慾)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선비는 격물(格物)함으로써 치지(致知)할 뿐 완물(玩物)로 상지(喪志)하지 않는다. 앞서 이익(李瀷)이 자신의 관찰 기록을 관물편(觀物篇)이라 이름한 것도 실은 소옹(邵雍)의 말에서 취한 것이다.

 

권호문(權好文)관물당기(觀物堂記)에서 소옹(邵雍)의 뜻을 부연하여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관물(觀物)의 뜻이 크도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은 물류(物類)일 뿐인데, ()은 제 홀로 물()일 수 없으니 천지가 낳은 바이다. 천지도 제 홀로 생길 수는 없으니 물()은 리()가 낳게 한 것이다. 이 리()가 천지의 바탕이 되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이 됨을 알아, 천지로 만물을 본다면 만물은 각기 한 물건일 뿐이고, ()로 천지를 본다면 천지 또한 한 물건일 뿐이다. 사람이 능히 천지만물을 살펴 그 리()를 다할 수 있다면 영장(靈長)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천지만물을 능히 보지 못하여 그 소종래(所從來)에 어둡다면 박아군자(博雅君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에서 보는 바가 어찌 다만 외물에 눈길을 빼앗겨 연구의 실지가 없는 것이겠는가?

嗚呼! 觀物之義大矣. 盈天地之間者, 物類而已. 物不能自物, 天地之所生者也; 天地不能自生, 物理之所以生者也. 是知理爲天地之本, 天地爲萬物之本, 以天地觀萬物, 則萬物各一物; 以理觀天地, 則天地亦爲一物. 人能觀天地萬物而窮格其理, 則無愧乎最靈也. 不能觀天地萬物, 而昧其所從來, 則可謂博雅君子乎. 然則堂之所觀, 豈但縱目於外物, 而無硏究之實哉

 

한가로이 지내며 두루 바라보는 것은 강물이 흘러가고 산이 우뚝 솟으며,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이고, 천광운영(天光雲影)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일 것이다. 비잠동식(飛潛動植)와 초목화훼(草木花卉)의 종류가 형형색색으로 각기 그 천진(天眞)을 얻으니, 일물(一物)을 보면 일물(一物)의 리()가 있고, 만물(萬物)을 보면 만물(萬物)의 리(0가 있어 한 근본에서 나와 만수(萬殊)로 흩어지며, 만수(萬殊)를 미루어 한 근본에 이르나니, 그 유행(流行)의 묘는 어찌 이리 지극한가? 이런 까닭에 관물(觀物)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봄만 같지 못하고, 마음으로 봄이 리()로 봄만 같지 못하니, 만약 리()로 볼 수 있다면 만물(萬物)에 환히 통하여 내게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다.

閑居流覽, 則水流也, 山峙也, 鳶飛也, 魚躍也, 天光雲影也, 光風霽月也. 飛潛動植, 草木花卉之類, 形形色色, 各得其天, 觀一物則有一物之理, 觀萬物則有萬物之理. 自一本而散萬殊, 推萬殊而至一本, 其流行之妙, 何其至矣. 是以, 觀物者觀之以目, 不若觀之以心, 觀之以心, 不若觀之以理, 若能觀之以理, 則洞然萬物, 皆備於我矣.

 

 

 이인문, 관수도(觀水圖), 18세기, 21X30cm, 개인소장.

지팡이 짚고 서서 물을 바라본다. 쉼 없이 흘러가는 저 물처럼 내 삶도 정체되지 않기를.

 

 

인용

목차

1.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3. 생동하는 봄풀의 뜻

4.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5. 속인과 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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