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③
관물(觀物)함으로써 그 속에 구현된 리(理)를 읽어내고, 그 리(理)를 체법(體法)함으로써 인간 삶과 연관 짓는 것은 유가(儒家) 인식론의 바탕이 된다. 송대의 이학자 소옹(邵雍)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관물(觀物)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리(理)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의 물(物)은 리(理)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명(命) 없는 것이 없다.
그는 눈으로 사물의 외피만을 보는 것을 ‘이아관물(以我觀物)’에, 심(心)으로 리(理)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이물관물(以物觀物)’에 견주고, ‘이물관물(以物觀物)’을 ‘반관(反觀)’이라 하여, 물(物)로써 물(物)을 보니 그 사이에는 아(我)가 개재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물(物)로써 물(物)을 봄은 성(性)이고, 아(我)로써 물(物)을 봄은 정(情)이다. 성(性)은 공변되고 밝지만, 정(情)은 치우치고 어둡다[以物觀物性也, 以我觀物情也, 性公而明, 情偏而暗].”고 부연하였다. 이때 성(性)은 천리(天理)에, 정(情)은 인욕(人慾)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선비는 격물(格物)함으로써 치지(致知)할 뿐 완물(玩物)로 상지(喪志)하지 않는다. 앞서 이익(李瀷)이 자신의 관찰 기록을 「관물편(觀物篇)」이라 이름한 것도 실은 소옹(邵雍)의 말에서 취한 것이다.
권호문(權好文)은 「관물당기(觀物堂記)」에서 소옹(邵雍)의 뜻을 부연하여 이렇게 말한다.
아아! 관물(觀物)의 뜻이 크도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은 물류(物類)일 뿐인데, 물(物)은 제 홀로 물(物)일 수 없으니 천지가 낳은 바이다. 천지도 제 홀로 생길 수는 없으니 물(物)은 리(理)가 낳게 한 것이다. 이 리(理)가 천지의 바탕이 되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이 됨을 알아, 천지로 만물을 본다면 만물은 각기 한 물건일 뿐이고, 리(理)로 천지를 본다면 천지 또한 한 물건일 뿐이다. 사람이 능히 천지만물을 살펴 그 리(理)를 다할 수 있다면 영장(靈長)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천지만물을 능히 보지 못하여 그 소종래(所從來)에 어둡다면 박아군자(博雅君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堂)에서 보는 바가 어찌 다만 외물에 눈길을 빼앗겨 연구의 실지가 없는 것이겠는가?
嗚呼! 觀物之義大矣. 盈天地之間者, 物類而已. 物不能自物, 天地之所生者也; 天地不能自生, 物理之所以生者也. 是知理爲天地之本, 天地爲萬物之本, 以天地觀萬物, 則萬物各一物; 以理觀天地, 則天地亦爲一物. 人能觀天地萬物而窮格其理, 則無愧乎最靈也. 不能觀天地萬物, 而昧其所從來, 則可謂博雅君子乎. 然則堂之所觀, 豈但縱目於外物, 而無硏究之實哉
한가로이 지내며 두루 바라보는 것은 강물이 흘러가고 산이 우뚝 솟으며,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이고, 천광운영(天光雲影)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일 것이다. 비잠동식(飛潛動植)와 초목화훼(草木花卉)의 종류가 형형색색으로 각기 그 천진(天眞)을 얻으니, 일물(一物)을 보면 일물(一物)의 리(理)가 있고, 만물(萬物)을 보면 만물(萬物)의 리(理0가 있어 한 근본에서 나와 만수(萬殊)로 흩어지며, 만수(萬殊)를 미루어 한 근본에 이르나니, 그 유행(流行)의 묘는 어찌 이리 지극한가? 이런 까닭에 관물(觀物)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봄만 같지 못하고, 마음으로 봄이 리(理)로 봄만 같지 못하니, 만약 리(理)로 볼 수 있다면 만물(萬物)에 환히 통하여 내게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다.
閑居流覽, 則水流也, 山峙也, 鳶飛也, 魚躍也, 天光雲影也, 光風霽月也. 飛潛動植, 草木花卉之類, 形形色色, 各得其天, 觀一物則有一物之理, 觀萬物則有萬物之理. 自一本而散萬殊, 推萬殊而至一本, 其流行之妙, 何其至矣. 是以, 觀物者觀之以目, 不若觀之以心, 觀之以心, 不若觀之以理, 若能觀之以理, 則洞然萬物, 皆備於我矣.
인용
6. 생동하는 봄풀의 뜻①
7. 생동하는 봄풀의 뜻②
8. 생동하는 봄풀의 뜻③
9. 생동하는 봄풀의 뜻④
13. 속인(俗人)과 달사(達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