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속인(俗人)과 달사(達士)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된 사람은 의심스런 바가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을수록 괴이함도 많다는 것이다. 대저 어찌 달사(達士)라 하여 물건마다 쫓아가서 눈으로 본 것이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앞에 열 가지가 펼쳐지고, 열을 보면 마음에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을 도로 사물에 부칠 뿐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는 까닭에 마음은 한가로와 남음이 있고, 응수(應酬)함은 다함이 없다.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제 스스로 괴이함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성을 내며,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만물을 온통 의심한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己, 廼生嗔一事不同, 都誣萬物.
박지원(朴趾源)이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한 말이다. 달사(達士)의 관물(觀物)은 보지 않고도 보는 이물관물(以物觀物), 이리관물(以理觀物)인데, 속인(俗人)의 관물(觀物)은 직접 눈으로 본 것만 전부로 아는 이목관물(以目觀物)에 머문다. 달사(達士)와 속인(俗人)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에서 찾을까? 그것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대해 김택영(金澤榮)은 「수윤당기(漱潤堂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천하에 이른바 도술과 문장이라는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예전에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예전에 천만 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며, 전날 어근버근하여 알기 어렵던 것이 매끄럽게 쉬 이해되며, 전날 천만 권의 책에서 구하던 것이 한 두 권이면 충분하게 되고, 예전에 법이 어떻고 판결이 어떻고 하던 자가 이른바 법이니 판결이니를 말하지 않게 된다.
天下之所謂道術文章者, 莫不由勤而精, 由悟而成. 苟能悟之, 則向之聞一而不知一者, 可以知十百矣; 向之遠在千萬里之外者, 可以逢諸左右矣; 向之戛戛乎難者, 可以油油然化爲易矣; 向之求之於千萬卷之書者, 一二卷而足矣; 向之言法言訣者, 無所謂法訣者矣. 瓦礫可使爲金玉, 而升斗可使爲釜鍾. 入之無窮, 出之不竭, 何其快矣.
비록 그렇지만 이를 깨닫는 법은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어 손으로 쥘 수도 없고 무어라 규정할 수도 없다. 예전에 성련(成連)이란 사람은 파도가 넘실대는 것을 보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도를 깨달았다. 성련이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고 하여, 가령 어떤 사람이 성련의 일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안고서 다시금 파도가 넘실대는 곳에 서 있는다면 어떠하겠는가? 대저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 동안 깊이 생각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까닭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雖然悟之之道, 無方無體, 不可以握, 不可以定. 昔者成連見海波之洶湧而悟琴之道, 成連固如此矣. 假令復有人慕成連之事, 而抱琴更立於海波洶湧之際, 則當何如哉? 夫成連之悟, 乃屢年深思之力之所爲, 而非一朝之間無故而致者.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모두 ‘눈뜬 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해서 보이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를 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는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 버린다. 속인(俗人)과 달사(達士)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상 살펴본 관물론(觀物論)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설음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친숙하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觀物論)이 시학(詩學)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 또는 관물(觀物)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탄성 계수를 유지하지 못하는 관물(觀物)은 관물(觀物)이 아니다. 그것은 견물(見物)일 뿐이다. 여기에 무슨 생의(生意)로움이 있던가. 눈앞 사물과의 설레이는 만남, 세계와 줄다리기 하는 팽팽한 긴장이 없이 좋은 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
인용
2.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3. 생동하는 봄풀의 뜻
4.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5. 속인과 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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