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단적치인 (8)
건빵이랑 놀자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軆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詡가 부뚜막..
7. 주제를 뚜렷하게 세우고 글을 쓰라 대저 갈 길이 분명치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추騅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이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침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夫蹊逕之不明, 則一字難下, 而常病其遲澁; 要領之未得, 則周匝雖密, ..
6. 글쓰기에 상황만 있을 뿐 정해진 법칙은 없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대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아마득하기 굳센 성과 같은지라, 눈앞의 붓과 먹은 산 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웠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皆不識合變之機, 而制勝之權者也. 譬如不勇之將, 心無定策, 猝然臨題, 屹如堅城, ..
5. 글이 좋지 않은 건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夫長平之卒, 其勇㥘非異於昔時也, 弓矛戈鋋, 其利鈍非變於前日也, 然而廉頗將之, 則足以制勝, 趙括代之, 則足以自坑. 이렇게 해서 글쓰기와 병법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설명한 연암은, 이어지는 둘째 단락에서 다시 전고典故와 비유, 억양반복의 방법을 활용하여 글쓰기와 병법의 관련성을 보다 더 긴밀하게 다진다. 여기서 병법의 예로 든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이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는 진나라 왕흘의 군대를 맞이하여 저들을 지치게 할 양..
4.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Ⅲ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鏖戰撕殺]이라고 했다. 억양이란 한 번 높이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낮추거나, 반대로 낮추기 위해 한 번 추켜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은 못생겼는데 마음씨는 착하다”와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억양은 문장 단위에서 뿐 아니라 단락 단위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억양이 점층되어 마침내 주제가 완전히 피력될 때까지 반복되고 나서 글은 끝난다. 적군과의 전투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이거나 투항하기 전에는 끝난 것..
3.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Ⅱ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鼓旌旗也;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고 했다. 별도의 통신수단이 없던 과거 전쟁에서 명령의 전달은 나팔과 북, 그리고 깃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군나팔은 전진을 명령하고, 북은 퇴각 명령을 전달한다. 나팔과 북소리로도 혹 부족할까하여 깃발을 가지고 또 명령을 전달한다. 깃발이 시각의 배려라면, 북소리 나팔소리는 청각의 배려이다. 멋있는 군악대의 취주吹奏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북과 나팔이 적군을 무찌를 수는 없지만, 이것 없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2.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Ⅰ 먼저 그 각각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善爲文者, 其知兵乎?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글자는 비유하면 병사이고, 뜻은 비유컨대 장수라 했다. 한편의 글이 수없이 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듯, 하나의 부대는 수많은 병사들로 구성된다. 병사가 아무리 씩씩하고 수가 많고 지닌 무기가 훌륭해도 지휘관이 우왕좌왕 허둥대고 보면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문장력이 제 아무리 좋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도 주제의식이 분명치 않고 보니 지리멸멸하여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부대에 유능한 지휘관이 없어서는 안 되듯이, 한편의 글에는 뜻, 즉 주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 주제가 없는..
1. 모범답안을 모아 합격집을 만들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해마다 출제되는 문제는 같지가 않고, 채점하는 사람의 기준 또한 서로 다르니, 예전 모범 답안을 외우는 것이 과연 수험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논술고사를 준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