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글쓰기에 상황만 있을 뿐 정해진 법칙은 없다
글쓰기와 병법이 이렇듯 한 가지 원리일진대, 훌륭한 장수가 되고자 병법서를 열심히 읽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 이론을 열심히 익히면 되는가? 시론 책을 줄줄 외우면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소설작법대로 따라 쓰면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는가? 논술 참고서만 열심히 읽고 외우면 논술시험에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시론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시는 점점 더 쓰기가 어려워지고, 작문 이론을 배우면 배울수록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려서 한 줄도 더 쓸 수가 없다. 병법을 열심히 익히긴 했지만, 이론에 얽매이다 보니 막상 실전에서는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 좌충우돌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연암은 이를 ‘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승지권制勝之權’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찔러 말한다. 논술고사 답안지를 채점할 때마다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단락 개념도 분명하고 주제 의식도 더할 수 없이 선명한데, 막상 읽고 나면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문제지를 나눠주고 3분쯤 지나고 나면 수험생으로 가득 찬 교실에서는 일제히 볼펜을 가지고 맨 종이 위에 글씨 쓰는 소리가 흡사 말 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10분쯤 지나고 나면 그 소리가 그치고 여기저기서 볼펜을 굴리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난다. 작정도 없이 기세 좋게 시작한 글쓰기가 금세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연암은 이를,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산 위의 풀과 나무만 보고도 늘어선 적병인 것만 같아서 기가 팍 꺾이고 마는 것에 비유했다.
글쓰기의 원칙은 있지만 정해진 법칙이란 있을 수 없다. 글의 법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마다 달라지고, 때마다 달라진다. 주변 상황의 미묘한 변수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란을 일으킨다. 병법도 다를 바 없다. 융통성 없는 교주고슬膠柱鼓瑟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 수학문제를 외워 답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논술 시험을 잘 보려면 사고력과 창의력을 길러야지, 답안을 외워서 쓸 수는 없다.
▲ 전문
인용
- 합변合變이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변화하여 달라짐을 말한다. 『사기』에서 왕이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쓰려하자 인상여藺相如가 조괄은 한갖 제 아비의 글로 전하는 것을 읽어 교주고슬膠柱鼓瑟함과 같을 뿐 합변은 알지 못한다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 진晉나라 때 부견苻堅이 군대를 일으켜 성에 올라 왕사王師를 바라보매 부진部陣이 정제되고 군대는 정예로와 주눅이 들었는데, 또 북으로 팔공산八公山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과 같은 지라 군대가 주둔하여 에워싼 것으로 알았다는 고사. 『진서晉書』 권 140 「부견」하下에 보인다. 여기서는 글을 쓰기도 전에 기운이 꺾여 쓰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 주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 가서 군대가 모두 죽어,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는 고사. 『태평어람太平御覽』 「학鶴」에 『포박자抱朴子』의 인용으로 보인다. 한유韓愈는 「송구홍남귀시送區弘南歸詩」에서 “목왕穆王이 예전 남정 가 군대가 못돌아오니, 벌레와 모래, 원숭이와 학만이 엎드려 날리우네. 穆昔南征軍不歸, 蟲沙猿鶴伏以飛”라 하였다. 여기서는 평소에 써먹으려고 외워 두었던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아무 짝에 쓸모 없게 된 것을 뜻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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