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Ⅲ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1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鏖戰撕殺]이라고 했다. 억양이란 한 번 높이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낮추거나, 반대로 낮추기 위해 한 번 추켜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은 못생겼는데 마음씨는 착하다”와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억양은 문장 단위에서 뿐 아니라 단락 단위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억양이 점층되어 마침내 주제가 완전히 피력될 때까지 반복되고 나서 글은 끝난다. 적군과의 전투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이거나 투항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전투가 소강국면에 접어들어 진전이 없으면 성벽에 사다리를 걸친다. 일단 어느 한 지점이라도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성을 공략할 거점을 마련할 수가 있다. 적은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저항할 것이다. 먼저 성벽을 타고 올라 교두보를 확보하고 나면 성문을 여는 것은 시간문제다. 파제란 원래 글의 첫 서두를 일컫는 말이다. 이 글의 서두는 그런 의미에서 파제의 한 실례를 보여준다. 글의 첫 부분은 “글을 잘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라고 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연관 짓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글의 제목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다. 앞서도 말했듯 ‘소단’이란 ‘문단’과 같은 뜻이니 글쓰기와 관련된 말이고, ‘적치’란 대장군의 ‘붉은 깃발’이니 군대와 연관된 것이다. 이 글은 ‘소단적치’란 제목이 붙은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를 파제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한 자리에서 나란히 이야기 하게 된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貴含蓄者, 不禽二毛也; 有餘音者, 振旅而凱旋也.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다. 싸움에 승리를 거두고, 포로를 점검해 보니 반백의 늙은이도 끼어 있다. 중늙은이가 싸워 보았댔자 아군에 무슨 해를 미쳤겠으며, 마지못해 끌려 나온 것이 분명할 진대, 이들은 오히려 석방하여 놓아 주는 것이 점령군의 금도襟度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는 적중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효과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시시콜콜히 다 말해야 맛이 아니다. 말할 듯 말하지 않고 함축을 머금는데서 글쓴이의 의도가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장한 승리를 거두었으면 대오를 가다듬어 돌아와야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냥 그곳에 머물 수만은 없다. 점령지를 정돈하고 후속 조처를 취한 뒤 하루빨리 개선하여 다음 전투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쓸 때 혹 독자들이 못 알아 들을까봐 시도 때도 없이 중언부언 주제를 되풀이 해 말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의 태도가 아니다. 독자의 식상을 부른다.
이상 첫 번째 단락에서 제시한 글쓰기와 병법을 견준 12가지 비유를 설명해 보았다. 이 단락 원문의 구문 변화를 눈여겨 보면 연암이 말한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단위의 병렬인데도, 처음엔 ‘A 譬則B也’의 구문으로 시작하고서, 곧바로 ‘A者 B也’의 구문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여기서도 B에 해당하는 단위를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점층시켜 변화를 주었다. 다시 ‘A猶B也’의 구문으로 바꾼 뒤 금세 ‘A者 B也’의 구문을 다시 연결시켰다. 이 경우에도 A와 B에 해당하는 부분에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다시 다섯 글자로 점층시키는 등의 굴곡을 주어 문장에 끊임 없이 변화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 전문
인용
- 파제破題 : 글의 모두冒頭에 제목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말함. 명청대 과거 시험에서는 팔고문八股文의 처음 두 구절을 파제破題라고 하였는데, 뒤에는 사작寫作의 한 법식으로 자리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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