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한 것을 낯설게 표현하는 한시의 저력
平生南與北 心事轉蹉跎 | 평생 남북으로 떠돌았지만, 마음 둔 일이 갈수록 어긋났네. |
故國海西岸 孤舟天一涯 | 고국의 바다는 서해안 쪽에 있고, 외로운 배만 하늘 한 끝에 매어 있구나. |
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 | 매화 핀 창이라서 봄빛이 빠르고, 판잣집이라서 빗소리 많이 들리네. |
獨坐消長日 那堪苦憶家 | 홀로 앉아 긴 하루 보내려 하니, 자꾸 생각나는 집 생각을 어이 견디랴. |
『소화시평』 권상44번에서 이 시를 스터디할 땐 정말 넋이라도 있고 없고 했다. 거의 두 시간을 꽉 채우며 수업이 진행되어 너무 머리를 많이 쓰다 보니 지끈지끈해지며, 거의 마지막에 이르고 보면 분명 시를 배우고 있긴 한데, 뇌는 작동은 멈춘 듯, 나는 이 자리에 없는 듯 소리와 교실 안의 공기는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이곳이 마치 꿈 속 같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를 했으니,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다. 그럼에도 3구는 역시나 강인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구를 준비해온 아이는 ‘매화창 봄빛이 이르고, 판옥집 빗소리 많다’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이상할 게 없고, 나 또한 이 시를 맡았더라도 그처럼 해석했을 거다. 이렇게 해석하면 ‘매화창으로 보니 이른 봄이 왔다는 게 보이고, 나무 판잣집엔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5구가 쉽게 이해가 되질 않지. 그러면 6구부터 보고 오면 5구는 훨씬 잘 이해가 될 거야.”라고 말을 하며 6구를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판잣집과 빗소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감이 와?”라고 물어본다. 아이들의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무거운 침묵만이 교실을 휘감고 있었지만, 난 회심의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일전에 다겸이네 앞뒷 집이 모두 슬레이트 판넬로 공사를 해서 비가 오면 정말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고 했던 기억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두두둑 떨어지다가 판넬에 부딪히면 자연히 공명음까지 만들어지고 판넬의 불규칙한 충격음까지 곁들여져 천상의 하모니 내지는 최악의 소음이 발생하리라. 더욱이 그 당시엔 나무집이었을 테니, 빗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을 테고 그에 따라 가라앉은 마음을 흔들어젖혀 고향생각이 짙게 배어나오도록 했을 것이다.
교수님은 이런 광경이야말로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고려에선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아마 낯선 경험이 정몽주에게도 강인한 인상을 남겼기에 이 시를 지은 것이고, 일본인들은 너무도 익숙하여 잘 몰랐는데 타국인이 오히려 자신들의 정감을 제대로 살려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기에 감탄했던 게 아닐까. 이것만 봐도 역시 낯섦이란 매우 친숙하여 어떤 고민도 안겨주지 않는 것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볼 때, 삶은 그만큼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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