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의 평가가 시를 깊이 있게 보도록 한다
『소화시평』 권상46번에선 화운한 시를 보며 어느 작품이 더 낫냐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천에 있는 명원루(지금의 조양각)를 보고서 정몽주가 먼저 시를 지었고, 그 시에 탄복한 이안눌도 차운을 하며 시를 짓고자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 끙끙 앓다가 결국 시를 쓰긴 했는데, 이에 대한 홍만종의 평가는 “청신한 시구를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정몽주의 굉장하고 원대한 기상에는 미치지 못했다[李詩雖淸絶, 然終不逮鄭詩宏遠底氣像].”라는 평가를 내린다. 교수님은 “그러면 전문을 한 번 해석해보면 그때서야 홍만종이 왜 저런 평가를 했는지 느낌이 올 거예요”라고 알려준다. 난 그 순간 ‘어디서 약을 파시려고?’라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했다.
靑谿石壁抱州回 | 맑은 시내와 석벽은 고을을 안고 회돌아 |
更起新樓眼豁開 | 다시 새로운 누대에 오르니 시야가 트였네. |
南畝黃雲知歲熟 | 남쪽 들녘 잘 익은 벼들이 풍년임을 알려주고 |
西山爽氣覺朝來 | 서산의 상쾌한 기운에 아침이 옴을 깨닫네. |
風流太守二千石 | 풍류스런 태수는 2천석 자리인데, |
邂逅故人三百杯 | 친구(정몽주 자신)를 만나 3백 잔을 기울이네. |
直欲夜深吹玉笛 | 다만 심야에 옥피리 불고 싶어 |
高攀明月共徘徊 | 높이 뜬 달과 함께 배회하려 하네. 『東文選』 卷之十六 |
결국 긴 시간 공을 들여 포은과 동악의 시 해석이 끝났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니, 뭐에라도 씌인 것처럼 그 느낌이 확 와 닿았다. 포은의 시는 ‘호방, 유쾌, 통쾌’하단 느낌 때문인지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의 밤거리를 거닐며 자유롭게 사색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海天霜落塞鴻回 | 바닷가 서리 내리니 변방의 기러기 돌아가고 |
節近重陽細菊開 | 절기가 중양절에 가까우니 가는 국화 피어난다. |
高閣凌雲山勢斷 | 구름 뚫듯 높은 누각, 산세는 가파르고 |
長沙畫野水聲來 | 들판을 구획 짓는 모래톱, 물소리 오네. |
四年南國身千里 | 4년 간의 남국생활(영천) 몸은 천리 밖에 있고 |
萬事西風酒一盃 | 온갖 일은 가을바람 속 술 한 잔에 푸네. |
目極鳳城何處是 | 눈길을 다해 바라봐도 서울은 어디일까? |
半峰斜日獨徘徊 | 산허리 지는 해에 홀로 배회한다네. 『東岳先生集』 卷之十一 |
그 반면, 동악의 시는 ‘처량, 비애, 외로움’의 페이소스(pathos)가 짙게 배어나왔기 때문이다.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시구는 ‘共徘徊↔獨徘徊’였고, 그 다음이 홍만종이 발췌해 놓은 구절이었다.
風流太守二千石 邂逅故人三百杯 | 四年南國身千里 萬事西風酒一盃 |
풍년을 만든 태수는 나에게 호탕하게 술을 사준다 | 4년 동안 떠돌던 시름 술 한 잔에 푼다 |
두 구절의 정조는 확연히 다르며, 그 때문에 홍만종은 포은의 시를 굉원하다고 평가함과 동시에 동악의 시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풀고 보니, 작가의 평가는 인상비평에만 그치는 줄 알았고, 그 당시에만 통용되는 시적 미감(지금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감)인 줄만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마치 지금 우리가 서양의 유명한 작품을 보면서 감동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으며,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나 영화를 보며 깨닫는 것처럼, 시라는 것도 시대를 넘어선 감흥이 있고, 시에 대한 작가의 평가도 지금 우리와 통하는 공통의 미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나니, 겨우 시 2편을 봤을 뿐이지만, 여러 가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엔 한시가 무작정 어렵거나 난해하지만은 않다는 깨달음도, 한문이 버겁고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즐거움도 있었다. 이래서 내가 한문을 그만 둘 수가 없고, 이래서 내가 수요일 스터디에 빠질 수가 없다. 한문을, 그리고 한시를, 그리고 한시에 대한 평가를 지금의 언어로 생생히 살려내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수업이니 말이다.
인용
'연재 > 한문이랑 놀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화시평 감상 - 상권 47. 삼봉도 전횡을 노래했지만 스승에게 비판을 듣다 (0) | 2021.10.26 |
---|---|
소화시평 감상 - 상권 47. 한문공부의 방향잡기 (0) | 2021.10.26 |
소화시평 감상 - 상권 44. 친숙한 것을 낯설게 표현하는 한시의 저력 (0) | 2021.10.26 |
소화시평 감상 - 상권 43. 인생무상과 부벽루의 정감 (0) | 2021.10.26 |
소화시평 감상 - 상권 43. 작가 비평의 문제점과 한계 (0) | 2021.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