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무상과 부벽루의 정감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 성은 텅 빈 채 달 한 조각 있고, 바위(조천석)는 천년 두고 구름뿐인데, |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 기린 말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이여 어디서 노시는가? |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 길게 바람 부는 돌계단에 기대어 읊조리니, 산을 절로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는구나. 『東文選』 卷之十 |
『소화시평』 권상43번에 나오는 「부벽루」라는 시는 읽은 적이 여러 번 있었을 테지만, 기억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려운 글자가 없어 수월하게 변역되었다는 정도로 만족했었지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이 시는 주몽의 설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주몽=선군의 이미지’를 입힘과 동시에, 그런 선군이 다시 한 번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수님은 고려 말에 살던 이색은 부벽루에 올라 국운이 다해가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부벽루와 직접 관련된 주몽과 같은 선군이 다시 나와 이 스러져 가는 고려를 다시 한 번 부흥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을 거라고 하셨다.
거기에 덧붙여 이 시엔 인생무상이 아주 잘 나타난다. 우선 여기서는 인생무상이란 주제를 통해 두 가지 부분에서 주의를 하며 봐야 한다. 첫째 인생무상은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하며, ‘허무주의’를 나타내기도 하기에 이 시에선 어떤 인생무상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 시에선 허무주의까지 나가지 않았다. ‘천손하처유(天孫何處遊)’라는 구절을 통해 현실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 ‘떠났지만, 돌아올 것이다. 언젠지 모르지만, 돌아와야 한다’는 마음이 읽힌다.
둘째, 인생무상의 주제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연유상(自然有常)이 등장한다. 이걸 좀 더 쉽게 말하면 ‘인생은 무상한데, 자연은 유상하다’는 것이고, ‘자연은 변화가 없는데, 인생만 무수히 변한다’는 것이다.
人生無常 | 自然有常 |
성(城), 인마(麟馬) | 석(石), 산(山), 강(江) |
사람과 관련된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텅빈 성, 이 성엔 무수한 영웅들이 살았을 것이고, 한때는 천손이 길들이던 기린마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져 성 안은 고요하기만 하고 기린마는 자취를 감춰 버린 지 오래다. 그에 비하면 이끼 낀 바위나, 나무로 뒤덮인 산이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곳에서 흐른다. 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과 대비되어 보여 질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는 근세의 이육사가 지은 「광야」란 시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단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육사 시인은 목은의 시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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