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도마복음서가 몇백 년 전에만 발견되었더라도 그것은 이단의 불경한 서물로 몰려 불태워졌을 것이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역사는 은폐의 역사였다. 그러나 양식사학으로부터, 나그함마디문서의 발견으로 촉발된 현대신학에 이르는 찬란한 20세기 신학의 성과는 기독교를 2천 년 동안 한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본질적 해부의 시험대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기독교는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천국이 하늘에 있다 하면 새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고, 천국이 땅속에 있다 하면 물고기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리라 하는 이야기는 판에 박힌 기독교 교리 만을 신봉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는 도마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4복음서에 이미 들어있다. 도마복음서는 생동하는 예수의 말을 생생하게 전했을 뿐이다. 누가복음 17장을 펼쳐보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고 ‘하늘 위, 바다속’ 운운하는 수사법도 성서에 이미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지혜문학인 욥기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산들을 뿌리째 파헤쳐도 지혜를 찾을 길 없고, 물속의 용도 이 같이 외친다. ‘이 속에는 없다.’ 바다도 부르짖는다. ‘나에게도 없다’ (욥 28:9~14).
하나님의 계명에 관해서도 모세의 말씀은 이러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 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 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신 30:11~14)
사도 바울도 믿음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증언한다.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올리기 위하여 땅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롬 10:6~7, 공동번역, 이후 ‘공역’으로 略, 비슷한 표현들이 바룩서 3:29~32, 35~37, 시라크서 1:1~3에도 있다).
신실하다 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마복음서와 같은 정경 외의 성서들을 성서로 간주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소위 ‘외경(外經)’에 대한 편견이 아니다. ‘정경(正經)’에 대한 곡해요 왜곡이요 무지인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이 정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경이라고 믿고 있는 문헌들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들고 맥락적으로 더 심오하게 만든다.
가장 결정적인 사태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신약성서 27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요일날 교회에 나가 들은 성서와 무관한 목사들의 설교로써 자기들의 신앙의 기준을 삼으며, 외부로부터 잡다하게 주입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일 뿐인 그러한 가치관을 잣대로 하여 자기를 크리스챤으로 규정하면서, 비록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성서를 깊게 상고하는 경건한 수행자들을 보고 크리스챤이냐고 묻고 따지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유대교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있으나, 신약에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다. 큐자료가설로부터 시작하여 양식사학운동, 역사적 예수의 탐구, 나그함마디 성서와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 영지주의의 재해석, 예수세미나운동 등등 20세기 한 세기 동안의 찬란한 신학논쟁사는 2천 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해부하지 못했던 금단의 영역에 걸쳐 있던 금줄을 낱낱이 끊어놓았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이제 우리 조선땅의 기독교인 사람들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는 20세기 현대신학의 탐구를 통하여 다시 넘을 수 없는 다리를 넘었다. 프린스턴대학 석좌교수 엘레인 페이겔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성서들이 1천 년 전에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이 소중한 성문서들은 이단서로 몰려 확실하게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이 문헌들은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20세기 중엽에나 빛을 보았다. 바로 인간세의 문화적 진보가 이 문헌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관하여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성서들을 다른 눈을 가지고 읽는다. 광기나 불경으로서 내치는 것이 아니라 1세기의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경험한 방식대로 읽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정통기독교 전통에 대한 강력한 얼터너티브가 아닐 수 없다.”(The Gnostic Gospels 154-5).
누가복음의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이해가 쉽다. 즉 세속적 인도자들이 천국을 외재화시키는 데 반하여 철저한 내재화, 내면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내 맘 속에 내 몸속에’ 있을 뿐이다.
▲ 기름 값이 치솟는 한국의 실정에서 시리아는 참 부러운 나라다. 휘발유 1리터 당 70원, 한국 휘발유 값의 27분의 1. 휘발유 값이 싸니까 주변 터키에서도 운전사들이 트럭을 끌고 와서 기름을 넣는다. 시설이 빈곤해서 드럼통으로 붓는다. 주유소는 만원일 수 밖에. 그런데도 코리안인 나에게 먼저 넣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밥 같이 먹자고 서로 끌었다. 못사는 것 같지만 풍요로운 삶을 이들은 즐기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우리의 이러한 상념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만다. ‘진실로,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외재화를 반대하여 내재화를 주장했는데 어찌하여 또다시 ‘네 밖에’를 동시에 말하는가? 천국은 내 밖에 있는가? 또다시 저 푸른 하늘 위에 있단 말인가?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일상적 가치관은 또다시 전도된다. 그것은 우리 사고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 천국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안다면 동시에 천국이 바로 내 밖에 있다는 것도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 동방사상에서는 전관(全觀)이라고 부른다. 일면의 상대적 논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相對)의 양단(兩端)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다. 천국은 물론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내 밖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천국운동은 식탁교제운동이었고, 소외와 빈곤의 극복이었고, 나눔이었고, 율법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것은 나 밖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인 것이다. 천국은 내 ‘안의’ 관념이 아니라, 내 ‘밖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동시에 네 밖에 있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근원적으로 안과 밖이 없다(Th.22), 안과 밖이 근원적 융합되는 곳에 하나된 자로서의 ‘나’라는 아이덴티티가 엄존하는 것이다.
▲ 유프라테스강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을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를 만나는데 석조건축들의 장관에 압도되고 만다. AD 2·3세기 때만 해도 4만 명의 거주민이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팔미라(Palmyra, Tadmor 고대 셈족 말)는 BC 2000년경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연결하는 문명권의 요충지였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곳을 왕조의 한 중심지로 삼았다. 로마제국이 남쪽의 나바태안왕국을 멸망시키면서(AD 106년) 중국·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카라반루트가 이곳 중심으로 개발되었고 따라서 상인들의 자치구가 형성되었다. 하드리아누스황제도 AD 130년 이곳을 방문하고 ‘자유도시’임을 선포했다. 3세기 중엽에는 이 지역의 귀족 오다이나트(Odainat)가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고 AD 256년에는 로마의 속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67년 그가 살해되자 그의 둘째 부인 제노비아(Zenobia)는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자신에게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부여하고 로마군대와 끝까지 타협 없이 싸웠다. 오늘날 일본이 독도문제로 또다시 우리민족을 모독하고 있다. 제노비아의 주체적 응전을 생각해본다. 1954년 당시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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