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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2장 - 지혜와 왕(王)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장 - 지혜와 왕(王)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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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와 왕()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도마복음의 언어는 고도의 상징적 체계이다. 그 은밀함을 푸는 열쇠 중의 하나가 지혜문학전통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신학도들이 암암리 기독교를 서양 종교로 규정하고 동양적 가치관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AD 1세기의 기독교는 동·서양이 완전히 융합된 가치관의 산물이었다.

 

 

2

1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and he will reign over all.”

 

 

상식인들이 보통 기독교를 생각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이나 신화적 기술 때문에, 그것을 매우 유치한 종교로 생각하기가 쉽다. 실제적으로도 이적이나 부활 때문에 예수장사가 잘된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쟁이들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상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유치하게 비친다. 대한민국은 유독 그러한 열렬한 쟁이들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나의 상식적 언급을 오히려 터무니없다고 말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북 치고 장구 치며 방언하고 앉아있는 방방곡곡 서낭당 휴거파들의 행태를 비상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정상인은 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탄생된 그레코로만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지적 분위기는 그러한 뮈토스가 극복된 매우 성숙한 것이었다. 희랍고전철학의 고도의 논리적 탐구와 추상적 사유가 전달되어 있었으며, 알렉산더대제의 세계정복 이후에 전개된 헬레니즘의 다양한 삶의 철학사조가 꽃을 피웠다. 이미 폴리스(polis)의 시대는 지나가고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유도 다양한 이방문명과의 접촉을 거치면서 거창한 신화적 영웅담을 탈피하여 보다 상식화되고 인간화되고 일상화되는 일련의 담론을 노출시킨다. 우리 동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중에서 욥기(Job)나 잠언(Proverbs)이나 전도서(Ecclesiasticus)와 같은 문학작품은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주옥같은 금언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위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 전통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BC 6세기로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예수의 시대에는 만개한 유대교의 중요한 흐름인 것이다. 히브리말로는 호크마(hokmā), 희랍어로는 소피아(sophia)라고 부르는 이 지혜란 무엇인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래 지혜란 본시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행동에 관련한 다양한 사태에 정의롭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인간적 폭이나 능력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셈족 언어에서는 이 지혜는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의인화(personification)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혜를 네 신부로 삼고, 슬기를 네 애인이라 불러라”(7:4, 공동번역).

 

따라서 지혜는 문학가들의 상상력과 더불어 아름다운 레토릭의 옷을 입으며 독자적인 우주적 인격체로서 발전해간다. 그러다가 결국 또다시 신적인 속성과 결합하게 된다. 인간의 자족적인 지혜는, 욥기문학이 항변하고 있듯이, 분명 한계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자신 정통적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이러한 유대적 지혜전통 속에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큐복음서에도 예수는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의 화신이다(Q41, 12:42, 11:31).

 

도마복음서를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지혜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그러한 이해방식에 관하여 크게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너무 지나치게 지혜 문학이라는 사조의 틀을 실체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레퍼런스로 생각하면 족하다. 그러나 내가 지혜를 말하는 뜻은 우리가 도마복음서를 지혜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크하르트의 충격이 보고되자 그 뒤를 이어 간 사람이 바로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던 영국인 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였다. 183936일 그는 페트라에 도착했다. 이 그림은 다음날 그린 것인데 페트라의 왕들의 묘역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로버트의 그림들이 석판으로 출판되자 그것은 모험심에 가득 찬 유럽인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성립한, 헬라화된 다이애스포라의 유대인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집필된 지혜문학서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혜는 빛을 발하며 시들지 않는다. 지혜는 그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쉽게 식별되고, 그녀를 구하는 자들에게 발견된다. 그녀는 그녀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간다. 지혜의 사랑은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 (6:12~20).

 

 

독자들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도마복음서 사이에 공통되는 많은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도마복음서의 언급과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는 솔로몬의 지혜서의 언급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 도마복음서에 사용된 다스린다에 해당되는 희랍어 단어는 왕노릇 한다(βασιλεύω)’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늘의 나라라고 할 때의 나라,’ 즉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와 같은 어원의 말인 것이다.

 

경이를 체험한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표현은 결국 왕이 된다는 뜻이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의 꼬붕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경이를 체험하면 왕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은 권세와 폭력의 세속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지혜의 왕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왕국인 것이다. 결국 이 내 몸(Mom, Soma)이야말로 천국인 것이다. 이 천국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몸 속에 있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천국 속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호랑이나 느티나무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만들 뿐이다. ? 인간이 자기 몸의 왕노릇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나의 사단(四端)칠정(七情)을 다스리지 못할 때, 끔찍한 우주의 모든 죄악이 파생하는 것이다. ‘라는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구함과 찾음과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은 콥트어사본과 달리 이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만이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이를 체험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스릴 것이요, 다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휴식할 것이다(Whoever marvels will rule and whoever rules will rest). 6a.”

 

여기서 휴식(Rest)’이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다스림의 본 뜻과 그 의미맥락을 확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협한 기존 성서의 가치관에서만 도마복음서의 언어를 대하기 때문에, ‘휴식의 의미조차 명료하게 파악치 못하는 것이다. ‘휴식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m nirvāṇam)’적정이다. 그것은 고요함이요, 평온이요, 구극적으로는 해탈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내 몸의 왕이 될 때에만이 비로소 휴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가 도마복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첫 메시지는 추구와 발견과 번민과 경이와 제압과 해탈이다. 참으로 놀라운 도언(導言)이 아닐 수 없다.

 

 

페트라의 협곡은 시크(The Siq)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의 장관이다. 그것은 침식의 소산이 아니라, 지각변동으로 거대한 바위가 찢겨 틈을 낸 것이다. 양쪽 바위 높이 200m, 폭은 2~5m 정도, 길이 1.2km에 이르는 협곡, 그 바닥은 로마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붉게 타오르는 사암의 미로 끝에 우리는 충격적인 건축물을 만난다. 카즈네트 알 파라운(Khaznet al-Faraoun, The Treasury of Pharaoh)! 이 성전은 이집트 파라오가 이스라엘 도망자들을 추격하다가 보물을 이곳에 숨겨두었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파라오의 보물창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면에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양 옆에는 도끼는 여전사 아마 조네스, 후면 감실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 아래층 양쪽에는 제우스의 말 탄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꼭 대기 지붕 처마 끝에는 나바태안왕국의 최고신 두샤라(Dushara)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중동문명권과 이집트 문명이 혼합된 헬레니즘양식으로 아레타스왕 3세 때의 작품이다(BC 1세기), 사도 바울은 이곳에 와서 이 코린트 양식의 찬란한 위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사진은 갑자기 휘몰아치는 모래광풍 속의 신전을 잘 포착하고 있다. 태고의 정취가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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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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