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무턱대고 복고파만을 추종하는 세태를 비판하다
송시를 배척하던 풍조가 변하다
明人卑斥宋詩, 漫不事蒐錄, 近來稍厭明人浮慕漢ㆍ唐之習, 乃表章宋詩, 此固盛衰乘除之理也.
복고파의 풍조가 사라지자 문장이 유약해졌다
於文亦然, 爲文, 專尙平易, 王ㆍ李波流頓無存者, 矯枉過直之甚, 詩文俱綿靡少骨, 殊無鼓發人意處矣.
송나라 시집 전집과 부록을 모두 얻어 책을 낸 오지진
康煕辛亥年間, 有吳之振者就宋人詩集, 廣取之, 幾錄其全集, 卷帙甚多. 其中詩不多傳, 只有五六首者, 以未成集, 另作一編, 附全集後云, 而此則未得見矣.
송시를 진부하다 여기며 다 폐기하여 송시를 보질 못하다
旣成, 又自序之, 其序曰: “自嘉隆以還, 言詩家尊唐而黜宋, 宋人集覆瓿糊壁, 棄之若不克盡. 宋人之詩, 變化於唐, 而出其所自得, 皮毛落盡, 精神獨存, 不知者或以爲腐. 後人無識, 倦於講求, 喜其說之省事而地位高也. 羣奉腐之一字, 以廢全宋之詩. 故今之黜宋者, 皆未見宋詩者也, 雖見之而不能辨其源流, 此病不在黜宋而在尊唐. 盖所尊者, 嘉隆後之所謂唐, 而非唐ㆍ宋人之唐也. 唐非其唐, 則宋非其宋, 以爲腐也固宜.
송시를 업신여겼지만 당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다
宋之去唐也近, 而宋人之用力於唐, 尤精以專, 今欲以鹵莽剽竊之說, 凌古人而上之, 是猶逐父而禰祖, 固不直宋人之軒渠, 亦唐之所吐而不饗非類者也.
진부하게 가륭에 모아진 당시만을 읽고서 송시를 무작정 비난하고 있다
今之尊唐者, 目未及唐詩之全, 守嘉隆間固陋之本, 皆宋人已陳之芻狗, 踐其首脊, 蘇而爨之久矣. 顧復取而篋衍文繡之陳陳相因, 千喙一唱, 乃所謂腐也.” 腐者以不腐爲腐, 此何異狂國之狂其不狂者歟?
시란 시대에 구속되어서도 타인을 모방해서도 안 된다
又楊大鶴者, 亦康煕時人, 序陸放翁詩抄而曰: “詩者性情之物, 源源本本, 神明變化, 不可以時代求, 不可從他人貸者也. 必拘拘焉規摹體格, 較量分寸. 以是爲推高一代, 擅名一家之具, 何其隘而自小也. 自李滄溟不讀唐以下, 王弇州韙其說後, 遂無敢談宋詩者, 南渡以後, 又勿論”云云.
오지진과 양대학의 서문은 매우 식견이 있는 글이다
吳序顯斥王ㆍ李之論, 不遺餘力; 楊序語雖婉, 亦斥王ㆍ李者也, 其所論儘有見矣.
해석
송시를 배척하던 풍조가 변하다
明人卑斥宋詩, 漫不事蒐錄, 近來稍厭明人浮慕漢ㆍ唐之習, 乃表章宋詩, 此固盛衰乘除之理也.
명나라 사람이 송시를 비하하고 배척하여 멋대로 수록조차 하지 않았지만 근래엔 조금씩 명나라 사람들이 한나라와 당나라의 습속을 부질없이 사모하는 걸 싫어해서 이에 송시를 세상에 알리니 이것이 진실로 성행하고 쇠하며 곱하고 나누어지는 이치인 것이다.
복고파의 풍조가 사라지자 문장이 유약해졌다
於文亦然, 爲文, 專尙平易, 王ㆍ李波流頓無存者, 矯枉過直之甚, 詩文俱綿靡少骨, 殊無鼓發人意處矣.
문장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 문장을 지을 적에 오로지 평이함만을 숭상해 왕세정과 이반룡 유파의 흐름이 무너지고 없어지니 굽은 것을 교정하려다 지나치게 곧게 하는 것【矯枉過直: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함. 곧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치어 오히려 나쁘게 함.】이 심해져 시와 문장이 모두 가늘고 약하며 뼈대가 적어져 거의 사람의 뜻을 고무하고 격발시키는 곳이 없게 되었다.
송나라 시집 전집과 부록을 모두 얻어 책을 낸 오지진
康煕辛亥年間, 有吳之振者就宋人詩集, 廣取之, 幾錄其全集, 卷帙甚多.
강희 신해(1671) 연간에 오지진(吳之振)【吳之振1640-1688): 『宋詩鈔』를 내면서 송시는 다시 수집되고 읽혀지기 시작함.】이란 사람이 송나라 사람의 시집에 대해 널리 취해 거의 그 전집을 수록했으니 권수가 매우 많았다.
其中詩不多傳, 只有五六首者, 以未成集, 另作一編, 附全集後云, 而此則未得見矣.
그 중에 시가 많이 전해지지 않아 다만 5~6수만 있어 전집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따로 한 편을 만들어서 전집의 뒤에 붙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얻어 보질 못했다.
송시를 진부하다 여기며 다 폐기하여 송시를 보질 못하다
旣成, 又自序之, 其序曰:
이미 완성하고 또한 스스로 서문을 썼고 서문에서 말했다.
“自嘉隆以還, 言詩家尊唐而黜宋, 宋人集覆瓿糊壁, 棄之若不克盡.
“가륭(嘉隆)【嘉隆: 明나라 世宗의 연호인 嘉靖과 穆宗의 연호인 隆慶으로, 이때에 嘉隆七才子라 하여 李攀龍ㆍ王世貞ㆍ徐中行ㆍ宗臣ㆍ謝榛ㆍ吳國倫ㆍ梁有譽 등 일곱 시인이 있었다.】으로부터 이후로 시를 말할 때 당시를 높이고 송시를 내쳐 송나라 사람의 문집은 장독대를 덮거나 벽에 바르니 버리기를 다할 수 없는 듯이 했었다.
宋人之詩, 變化於唐, 而出其所自得, 皮毛落盡, 精神獨存, 不知者或以爲腐.
송나라 사람의 시는 당시에서 변화하여 자득한 데서 나온 것으로 피부와 털이 쇠락함은 다했으나 정신은 홀로 보존되었음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혹 진부하다고 여겼다.
後人無識, 倦於講求, 喜其說之省事而地位高也. 羣奉腐之一字, 以廢全宋之詩.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 연구하길 게을리 하고 그 전후칠자의 말이 사리를 알고【省事: ① 수고를 덜다 ② 편리하다 ③ 철들다 ④ 간단하다 ⑤ 일을 아는 것. 사리에 명백한 것.懂事;明白事理】 지위가 높은 것만을 기뻐했다. 무리가 ‘부(腐)’라는 한 글자를 받들고서 모든 송나라 시를 없앴다.
故今之黜宋者, 皆未見宋詩者也, 雖見之而不能辨其源流, 此病不在黜宋而在尊唐.
그러므로 지금 송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모두 송시를 보질 못했고 비록 송시를 봤더라도 원류를 분별할 수 없으니 이 병폐는 송시를 내친 데 있지 않고 당시를 높인 데에 있는 것이다.
盖所尊者, 嘉隆後之所謂唐, 而非唐ㆍ宋人之唐也.
대체로 높인 것은 가륭(嘉隆) 이후의 당시라 말해지는 것들로 당송 시기의 당나라가 아니다.
唐非其唐, 則宋非其宋, 以爲腐也固宜.
당나라가 당나라가 아니라면 송나라도 송나라가 아닌 것이니, 진부하다고 여기는 게 진실로 마땅하다.
송시를 업신여겼지만 당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다
宋之去唐也近, 而宋人之用力於唐, 尤精以專, 今欲以鹵莽剽竊之說, 凌古人而上之, 是猶逐父而禰祖, 固不直宋人之軒渠, 亦唐之所吐而不饗非類者也.
송나라와 당나라의 거리가 가까우니 송나라 사람이 당시에 힘을 씀이 더욱 정밀하면서도 온전하였지만 이제 거칠고 표절한 말로 고인을 능멸하고 고인에 올라타니, 이것은 아버지는 내쫓고서 조상을 아비 사당에 모시는 것과 같아 진실로 송나라 사람의 한바탕 웃음거리【軒渠: 웃는 모양】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당나라 사람이 뱉어낸 것인데도 흠향하지 못해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진부하게 가륭에 모아진 당시만을 읽고서 송시를 무작정 비난하고 있다
今之尊唐者, 目未及唐詩之全, 守嘉隆間固陋之本, 皆宋人已陳之芻狗, 踐其首脊, 蘇而爨之久矣.
지금 당시를 높이는 사람들은 당시의 전체를 보지 못했으면서 가륭 연간의 고루한 책만을 지켰으니 모두 송나라 사람이 이미 진열했던 쓸모없는 것【芻狗: 풀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인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있을 때만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천한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 ① 추구 ②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그 일이 끝나면 내버리는 물건 ③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린 물건 ④ 폐물 / 추구가 아직 제사에 진설되기 전에는 훌륭한 대나무 상자에 담고 좋은 비단으로 감싸 두고 시축이 재계를 하고서 받든다. 그런데 진열하여 제사를 마치고 나면 길 가는 사람이 머리와 등을 발로 밟고 지나가기도 하고 풀 베는 사람이 가져다가 불을 지펴 밥을 짓기도 한다.(夫芻狗之未陳也, 盛以篋衍, 巾以文繡, 尸祝齊戒以將之. 及其已陳也, 行者踐其首脊, 蘇者取而爨之已. -『장자』 「天運」)】으로 머리와 등이 밟히기도 했고 나무꾼이 불 지펴 밥을 하기도 한 지 오래다.
顧復取而篋衍文繡之陳陳相因, 千喙一唱, 乃所謂腐也.”
도리어 다시 취해 바구니【箧衍: 대나무·갈대로 짠 바구니】로 담고 비단으로 감싸 옛것을 답습하여【陳陳相因: ① 오래된 곡식이 곳집에서 묵어 쌓임 ②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다】 천 개의 주둥이로 한결 같이 읊조리니, 이것이 말했던 대로 진부하다는 것이다.”
腐者以不腐爲腐, 此何異狂國之狂其不狂者歟?
진부한 사람이 진부하지 않은 걸 진부하다 여기니 이것이 어찌 미친 나라 사람이 미치지 않은 사람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시란 시대에 구속되어서도 타인을 모방해서도 안 된다
又楊大鶴者, 亦康煕時人, 序陸放翁詩抄而曰:
또 양대학(楊大鶴)【楊大鶴: 字 九皐‚ 號 芝田‚ 淸 康熙 進士.】이란 사람은 또한 강희 때 사람으로 육방옹(陸放翁)【陸放翁: 방옹은 陸游의 호이다. 그는 山陰 사람으로 자가 務觀이다. 만 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詩史에 최다작 시인으로 꼽히며, 唐詩風의 서정을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의 시초에 서문을 쓰며 말했다.
“詩者性情之物, 源源本本, 神明變化, 不可以時代求, 不可從他人貸者也.
“시란 성정의 물건으로 시원(始原)부터【原原本本: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대로.】 신명이 변화해온 것이니, 시대로 대신 구할 수 없고 타인을 좇아 빌릴 수 없다.
必拘拘焉規摹體格, 較量分寸. 以是爲推高一代, 擅名一家之具, 何其隘而自小也.
반드시 체모와 체격에 구애되어 작은 것【分寸: ① (일이나 말의) 적당한 정도나 범위 ② 분별 ③ 한계 ④ 한도】까지 비교하면서 이것으로 일대에 최고로 추대되고 일가에 이름을 떨치는 도구로 삼으니, 어째서 잗다랗게 스스로 협소해지려는가.
自李滄溟不讀唐以下, 王弇州韙其說後, 遂無敢談宋詩者, 南渡以後, 又勿論”云云.
이창명은 당나라 이후의 시를 읽지 않았고 왕엄주(王弇州)【李滄溟ㆍ王弇州 : 복고파 李攀龍과 王世貞의 호】가 창명의 말을 옳다고 여긴 후로부터 마침내 감히 송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없어졌으니 남송 이후의 시에 대해선 또한 더 말할 것도 없다.”
오지진과 양대학의 서문은 매우 식견이 있는 글이다
吳序顯斥王ㆍ李之論, 不遺餘力; 楊序語雖婉, 亦斥王ㆍ李者也, 其所論儘有見矣.
오지진의 서문은 왕세정과 이반룡의 이론을 드러내 배척하는데 여력조차 남기지 않았고 양대학이 쓴 서문의 말이 비록 부드럽지만 또한 왕세정과 이반룡을 배척한 것이니, 그 이야기한 것이 매우 식견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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