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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97. 고경명의 백마강 시에 은근히 드러난 정서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97. 고경명의 백마강 시에 은근히 드러난 정서

건방진방랑자 2021. 10. 2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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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의 백마강 시에 은근히 드러난 정서

 

 

病起因人作遠遊 벗 때문에 병석에서 일어나 먼 여행을 떠났더니,
東風吹夢送歸舟 봄바람 꿈결에 불어 돌아가는 배를 전송하네.
山川鬱鬱前朝恨 산천은 짙푸르니 전 왕조의 한인 듯,
城郭蕭蕭半月愁 성곽은 쓸쓸하니 반달도 시름겨워하는 듯.
當日落花餘翠壁 그 날 당시의 낙화는 푸른 석벽에 남아 있고,
至今巢燕繞紅樓 지금도 둥지의 제비는 붉은 누각을 맴도네.
傍人莫問溫家事 벗이여 온조왕 옛 일은 묻지 마시라.
弔古傷春易白頭 옛날을 조문하고 봄을 애달파하면 쉬 백발이 될 테니.

 

소화시평권상 97에 두 번째로 나온 시는 고경명의 시. 1~2구까진 자신이 어떻게 백마강까지 오게 됐는지를 표현했다. 병으로 시달리던 때 친구의 방문으로 백마강 답사가 실현되었고 마치 꿈처럼 어느새 백마강에 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4구에선 부소산성을 오르며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서글픈 마음으로 산을 보니 산의 울창한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진 것이다. 비 오는 날만 가슴이 시린 건 아니다. 이별 해본 사람은 안다. 햇볕이 쨍하게 비추는 날엔 그 선명한 햇살이 가슴을 사정없이 흔들어 눈물 나게 하고 꽃이 만발한 봄엔 꽃향기가 가슴 저미게 한다는 것을. 이처럼 고경명에게 울창한 숲은 짙푸른 어둠의 빛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곽에 올라 반달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저 달도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5~6구에선 과거의 미묘하게 겹치는 현재를 표현함으로 느낌을 배가 시키고 있다. 낙화나 제비는 분명히 그 당시에 있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시인이 볼 때 낙화나 제비는 백제 멸망 당시부터 이곳에서 모든 것을 보았던 자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석벽에 남은 낙화는 백제의 멸망을 본 목격자이고, 붉은 누각을 나르는 제비는 그때의 실상을 전해줄 수 있는 전령사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홍루(紅樓)에 대한 것도 알 수 있었다. 홍루몽(紅樓夢)이란 작품도 있듯이 홍루란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있는 누각이라는 거다. 그 말은 곧 삼천궁녀를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고, 그곳을 맴도는 제비는 예전엔 궁녀들이 그리도 많았는지, 지금 설마 다시 왔으려나?’하는 심정으로 맴도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럴 땐 시인의 상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제비는 날고 있을 뿐인데, 거기에 마치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도 잠긴 양 의미를 부여했으니 말이다.

 

7~8구에 가면 마침내 함께 간 친구에게 더 이상은 역사적인 사실을 물으며 비분강개하려 하지 말고, 저물어가는 봄이나 즐기자고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이건 얼핏 보면 친구를 단속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론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곳까지 와서 저물어가는 봄이나 즐길 것이지, 뭔 역사적인 사실에 온 감정을 쏟고 있느냐는 핀잔을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한시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준다고 볼 수도 있다. 시로는 그런 거 더 이상 말하지 말자라고 했지만, 이미 시 전편을 통해선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며 한껏 마음을 쏟아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은 이런 경우가 말하지 말라고 표면적으로 말하지만 실제론 모두 말하는 방식이란 말을 했던 것이다.

 

이럴 때 보면 한시는 참 우리네 언어방식과 닮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도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겉으론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괜찮지 않은 경우를 무수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론 뭐 먹고 싶어요?”라는 물음에 아무 거나요.”라고 쉽게 답하지만 막상 그 말에 따라 아무 거나 골랐다간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말과 실제 사이, 그 간극은 어마무시하다. 그처럼 이 시에서도 마지막 구절은 시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고경명의 시는 최경창의 시와 확연히 다른 미감을 지니고 있다. 강인하지 않고 부드러우니 말이다. 그래서 홍만종은 맑고 신선하다[淸新]’는 평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매(高邁)하다는 건 뭘까? 이 단어는 지금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니 피상적인 의미는 알 것이다. 그건 바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정신성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교수님은 호음은 결구에서 역사에 대한 포폄의 마음을 담아 표현한 데 반해, 제봉은 포폄보단 은근히 인생무상 등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해줬다.

 

아무래도 소화시평을 읽다보니 홍만종의 시선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는 송시보단 당시를 더 좋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보다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더 좋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위의 두 시 중에서도 고경명의 시가 은근한 맛이 있기 때문에 더 좋다고 평가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 당시에 있었던 정자는 아닐 것이다. 여긴 낙화암에 있는 정자에서 백마강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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