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의 자기 인식과 자유
我非成閔卽狂生 | 나는 성혼이나 민순은 아니고 곧 미치광이로 |
半世風塵醉得名 | 반백년 풍진 맞으며 취하여 명성을 얻었다네. |
欲向新知道姓字 | 새로이 알게 된 이를 향해 성과 자를 말하려 하니, |
靑山獻笑白鷗輕 | 청산은 비웃고 흰 기러기 무시하네. |
『소화시평』 권상 98번에 소개된 「주중사객(舟中謝客)」라는 시는 정철의 후손이 문집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해둔 덕에 왜 이런 시가 나오게 됐는지, 그리고 왜 사죄하게 됐는지 그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그 당시에 유명하면서도 명망 있는 사람으로 착각한 데에 대해 ‘저는 그럴 만한 인물은 못 됩니다.’라고 사죄하며 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까지야 뭐 어려울 게 없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됐지만, 3구와 4구에선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과 자를 말해주고자 했지만, 막상 주위를 둘러보니 청산은 웃고 흰 기러기는 날아갈 뿐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정도로만 이해를 했다. 평소에 우리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 나의 이름을 물어보면 ‘뭐 우리가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닌데 통성명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에 “이름자 아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라고 말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도로 이해했는데 김형술 교수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줬다. 이 구절에선 송강 자신이 시를 통해 더욱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니 하니 ‘산도 기러기도 자신을 비웃고 무시한다’는 뜻이라는 것이고, 그 속뜻은 ‘저런 미치광이가 자신을 다 소개한다고 하네.’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건 소화시평에 나온 원문이 아닌 『송강집(宋江集)』을 보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면 두 개의 구절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럴 때 어떻게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소화시평 | 송강집 |
靑山獻笑白鷗輕 | 靑山送罵白鷗驚 |
청산은 나를 비웃고 흰 기러기는 나를 경시하네 | 청산은 욕을 해주고 흰 기러기는 놀라네. |
‘비웃다→욕해주다’, ‘경시한다→놀란다’로 서술어가 바뀌며 문의(文意)가 확 달라지고 있다. 교수님의 말을 듣고 여길 보면 청산과 기러기가 그런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송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행동이 바로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려 한다’는 어찌 보면 이상할 게 전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걸 연결해 생각해보면 그저 자신은 이름을 말하려 했을 뿐인데도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청산과 기러기가 놀라고 욕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엔 ‘저런 사람도 자신을 소개한다’ 정도의 비아냥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걸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면 당연히 비아냥이고 인격을 모독하는 뉘앙스가 담긴 시가 되겠지만, 여기선 자기가 자기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1구의 ‘나는 미치광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3, 4구를 봐야만 그 의미가 확 와 닿게 된다.
송강은 자기 스스로 낮춘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 어떤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그저 미치광이이며 사람들의 기대에 충족될 리 없는 사람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바로 이런 자기규정을 통해 얻게 되는 건 정신적인 자유로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그런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부의 환경에 자신을 맞추려 부단히 애쓰게 된다. 하지만 송강은 애초에 그런 것에 무관심했고 사람들의 평가에 무심했다. 그러니 자신을 ‘미치광이’라는 말로 맘껏 표현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 자신이 짓고 싶은 문학작품을 맘껏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미치광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일 수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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