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과 팰컨 헤비
『소화시평』 권상 98번의 주인공은 송강 정철이다. 송강 정철은 「사미인곡(思美人曲)」ㆍ「속미인곡(續美人曲)」으로 대표되는 가사문학을 활짝 열어젖힌 인물로 한문학계에서보다 국문학계에서 더 비중이 있는 인물이자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처참하게 처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철에 대해 알게 된 건 권필과 이안눌이란 제자 때문이었다. 둘 다 정철이 죽은 이후에 그를 떠올리며 시를 지었다. 이안눌은 달이 뜬 밤, 용산에서 기녀가 「사미인곡」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오직 우리 선생을 알아주는 이는 기녀뿐이로구나.’라는 깊은 탄식을 시에 담았다. 권필은 낙엽지고 비 부슬부슬 내리는 날 스승의 무덤가를 지난다. 그때 스승이 지은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떠올리며 시를 지었다.
두 명의 제자를 통해 회상되는 스승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그가 남긴 시조 작품들과 그 의미에 비하면 그를 기억하고 그 뜻을 받들려는 사람들도 없다. 그 당시엔 더욱이 한문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이기 때문에 한글로 작품을 쓴다는 것, 그것도 시조라는 형식을 만들었다는 것은 위의 시에서 나오다시피 ‘미치광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은 쓸쓸했고 그의 사후에도 이렇게 대우도 받지 못하며 쓸쓸한 정조만이 가득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는 게 느껴진다. 그 당시엔 한문이 대우를 받던 시기라 한문으로 작품을 지어야만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출세에도 도움이 되는데 반해, 이런 식으로 가사 문학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작품을 지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쓸쓸한 말로까지 맞이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오히려 한글이 중심 언어로 떠오르게 됐고 이에 따라 과거도 그러한 시각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세종대왕처럼 아예 한글을 만든 사람이 전면에 떠오르는 건 너무도 당연했고 언해본을 만들던 집현전 학자들도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게 됐다. 거기에 덧붙여 정철처럼 한글로 작품을 지은 작가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되었다. 살아 있을 당시엔,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추억하던 당시엔 쓸쓸하면서도 처량하기만 했던 그의 존재가, 20세기부터 유명인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엔 ‘지금 이 상황에 갇히지 않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정철이 살던 시기엔 문학이라면 으레껏 한문이어야 했고, 한시여야만 했다. 그러니 그가 가사로 작품을 지을 때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칭찬해주기보다 차라리 한문으로 작품을 지어야 한다는 핀잔을 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쓸 수 있는 시가를 계속해서 지었고, 그로 인해 지금은 ‘시가 문학의 대가’라는 칭호까지 받게 됐다.
이처럼 우리도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이란 상황’에 갇히게 마련이다. ‘돈이면 다 돼’라는 천민자본주의적인 생각이나, ‘나만 성공하면 돼’라는 극단적 성공주의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니 정작 더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하며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앞의 이득이나 편의에 매몰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송강 정철의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시를 지어 일갈할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처음으로 우주선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팰컨 헤비’라는 우주선은 일반적으로 추진 로켓을 쓰레기처럼 버리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서 추진로켓들이 다시 미군기지로 복귀까지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우주선이 출발하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최고조로 흘러 마법처럼, CG처럼 추진로켓들이 무사 귀환하고 나선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사람이 ‘지금 당장도 먹고 살기 힘든데 뭔 로켓 개발이야’라고 핀잔을 주고 도 넘은 조언을 해줄 때 “이런 게 살아갈 이유가 되는 거예요? 단순히 당면한 문제들만 해결하며 살 게 아니라,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하죠. 아침에 눈을 뜰 때 펼쳐질 삶과 미래에 대해 기대해야 해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들에게서 정철의 모습이 보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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