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저녁에
상원석(上元夕)
김인후(金麟厚)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고저수지세 조만자천시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인언하족휼 명월본무사 『河西先生全集』 卷之五
해석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 높고 낮음은 지세를 따르고 이르고 늦음은 천시로부터니, |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 사람의 말을 근심하리오? 밝은 달은 본래 사심 없는 걸. 『河西先生全集』 卷之五 |
해설
이 시는 정월 보름달을 노래한 것인데, 제목의 주(註)에 의하면 “오세작(五歲作)”으로 어린 시절에 지은 시이다.
달이 높고 낮은 것은 그 달을 보는 사람이 있는 장소가 높은가 낮은가에 따라 높게도 보이고 낮게도 보이며, 달이 일찍 뜨건 늦게 뜨건 그것은 모두 하늘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왜 높이 뜨지 않지?”, “왜 낮게 뜨지?”, “왜 일찍 뜨지 않지?”, “왜 늦게 뜨지?”라고 자신들의 상황에 맞추어서 하는 욕심 섞인 말에 대해 근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밝은 달은 본래 사적인 것이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천리(明天理)”하여 “정인심(正人心)”할 것을 말한 것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그의 간략한 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울산이요 자는 후지(厚之)인데 스스로 하서(河西)라 호를 하였다. 중종 때에 급제하고, 뽑히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가 영전되어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인조가 승하하자,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항상 시국을 개탄하고 시와 술에 기탁하여 마음을 달래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蔚山人 字厚之 自號河西 我中廟朝登第 選入弘文館 轉至修撰 及仁廟賓天 以疾屢徵不起 常槪念時事 托於詩酒 以寓懷 有集行于世].”
「행장(行狀)」에는 그의 시(詩)에 대한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하서(河西)가 여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객이 와서, ‘네가 짤막한 시를 지을 수 있느냐?’하고, 이내 하늘을 가리키면서 지으라고 하니, 곧 쓰기를,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여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을 용납하는데, 기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 무너질까 걱정했던가.’ 하였다. 사당을 훌륭히 하고 제사의 차림을 푸짐히 하여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의 참배와 제철의 물건을 올리는 예가 시종 끊이지 아니하였다[河西六歲能詩 客至曰 汝可作小詩 因指天爲題 卽書曰 形圓至大又窮玄 浩浩空空繞地邊 覆幬中間容萬物 杞國何爲恐顚連 祠堂之美 祭享之腆 必罄其誠 朔望之參 時物之薦 終始無間].”
이 외에도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김인후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활달하고 밝으며 화평하고 순수한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그의 「등화대시(登火臺詩)」를 극찬하여 고적(高適)ㆍ잠삼(岑參)의 높은 운이라 했다고 한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는 강개한 흥취, 옛것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세. 긴 바람은 먼 들에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층층의 산 뒤에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한 일들은 아득하니 어디에서 찾아보리오.’라 한 것은 침착하고 준위(俊偉)하여 가늘고 약한 태를 일시에 씻어 버렸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金河西麟厚高曠夷粹 詩亦如之 梁松川極贊其登吹臺詩 以爲高岑高韻云 其詩曰 梁王歌舞地 此日客登臨 慷慨凌雲趣 凄涼弔古心 長風生遠野 白日隱層岑 當代繁華事 茫茫何處尋 沈着俊偉 一洗纖靡 寔可貴重也].”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은 평들을 남겼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우뚝하였고 시대의 급류에서 기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운우(元祐)의 난【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일어난 당파 싸움을 가리킨다. 당시에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하여 문언박(文彦博)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ㆍ황정견(黃庭堅) 등이 결속하여 완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다. 그 후 사마광의 구당(舊黨)과 왕안석의 신당(新黨)이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원우의 난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당파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하서가 당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의 당파 싸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장성으로 하향해 버린 일을 가리킴】에서 온전할 수 있었으니, 그 절의의 큼과 출처의 바름은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젊었을 때 인묘(仁廟)에게 인정을 받아 출중한 은혜를 받았고, 인묘께서 늘 그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가서 차분히 토론하였으며, 그가 올린 묵죽시(墨竹詩)【인조(仁祖)가 동궁으로 있을 때 늘 하서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가서 토론을 벌였고, 직접 묵죽을 그려 하사하였는데, 하서가 그것을 시로 읊었다. 『河西全集』 「行狀」】는 지금 보아도 사람을 격앙시킨다. 심지어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음양(陰陽)과 율력(律曆),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대개 그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金河西學問文章 迥出當世 見幾於急流 得爲元祐完人 其節義之大 出處之正 罕與爲比 而少時受知仁廟 恩遇出常 每親臨直廬 從容問難 其所進墨竹詩 至今見之 令人激仰 至於天文地理醫藥卜筮陰陽律曆名物度數 無不通曉 蓋天姿卓絶 自得而然也].”
“도덕과 문장과 절의를 겸비한 사람은 오직 문정공(文正公) 김하서(金河西)가 그 사람일 것이다. 뒷날 그의 유집(遺集)을 보니, 기상이 청명하고 시원스레 트여서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흥기하게 하였다. 송선정(宋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에 자세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으니, 대개 김하서가 송선정의 비문을 얻고 나서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다[道德文章節義兼備者 惟河西金文正其人乎 後見其遺集 氣象淸明灑落 可令人興起於千載之下 而宋先正所撰碑文中發揮甚詳 蓋河西得先正而名益彰也].”
“세상에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가 대부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대체로 기고봉은 김하서의 생질인데 하서의 누에 실과 소털 같은 세밀한 분석과 변론은 당시의 제현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이 평생 깨끗한 지조를 지켰는데, 한번 김하서를 만나서 가야금과 술잔을 늘어놓고 통음하면서 도를 논하다가 문득 정신이 취하고 마음이 감복됨을 느꼈다고 한다. 이 몇 가지 일에서 조예가 탁월하고 기상이 호걸스러움을 알 수 있으니, 선인들이 김하서를 조선 400년간의 제일 인물이라고 하는 말은 참으로 맞는 의논이다[世謂奇高峯四七往復書 多出於河西之手 蓋奇是河西之甥 而其蠶絲牛毛 剖析辨破 當時諸賢之所不能及 而鄭文淸以平生潔介之操 一見河西 張琴列樽 暢飮論道 便覺神醉而心服 於此數事 可以見造詣之超絶 氣象之豪邁 先輩以河西爲四百年第一人物者 誠格論矣].”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331~333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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