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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동서 문화의 교류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동서 문화의 교류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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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 문화의 교류

 

세조의 한화(漢化) 정책은 35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실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그다지 독창적인 요소는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식 관료제를 충실히 따랐지만 핵심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몽골인 또는 친몽골적 한인만 중용했기 때문에 내실 있는 관료제가 되지는 못했다.

 

1315년에 부활된 과거제(科擧制)도 합리적으로 운영된 게 아니라 철저한 신분 차별을 바탕으로 했다. 이를테면 문제 출제도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유리했을 뿐 아니라 한인들은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더욱이 민족마다 별도로 합격 정원제를 두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는 종전의 모든 한족 제국을 뛰어넘는 수준과 독창성을 보였다. 방대한 통일 제국이 건설된 덕분에 원 제국 시절에는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실시하지 못한 단일 통화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특히 이 단일 통화는 지폐를 매개로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지폐는 송 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으나 실생활에 널리 사용된 것은 원대에 들어와서였다. 처음에는 주화를 보조하는 역할로 지폐가 발행되었지만, 점차 복잡한 기존의 화폐를 통일하는 유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원대에 와서 지폐가 발달한 배경에는 송대에 발달한 인쇄술이 있었다. 지폐를 조잡하게 인쇄한다면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전국을 단일 경제권으로 만든 데는 운하도 일익을 담당했다. 원은 남송을 정복한 직후부터 새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7세기 초반에 수 양제가 건설한 강남과 강북을 잇는 운하를 북쪽으로 연장해 대도까지 잇는 사업이었다. 그 목적은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권으로 운반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외의 수확도 있었다. 이 운하로 인해 몽골 지역에 건설되었던 기존의 도로망과 운하가 연결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동서 교통의 양대로인 육로(서역에서 대도까지)와 해로(아라비아에서 중국의 강남까지)가 이어짐으로써 대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 교통망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원대에 이르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크게 활발해진 배경이 된다.

 

오리엔트 세계(서아시아)와 유럽은 원래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기원전 10세기경 그리스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도 오리엔트였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이 꽃피우게 된 무대도 오리엔트 세계였다. 또한 7~8세기에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까지 진출한 이슬람 제국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었다. 중국에 당 제국이 있던 시절부터 오리엔트는 중국과 유럽 문명을 서로 이어주는 중개자의 노릇을 했다. 몽골의 유럽 원정이 벌어지기 바로 전인 11~13세기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과 오리엔트 세계와의 접촉이 빈번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중국과의 직접 교통이 보태진다면 세계적 교류망이 형성될 것이다.

 

 

문명이 오간 길 둔황에서 사마르칸트까지 이어지는 비단길은 원래 한나라 시대에 개척되었으나 몽골 시대에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림은 둔황의 동굴 벽화에 묘사된 비단길이다. 이 길을 통해 화약, 나침반, 종이 등 중국의 선진 발명품이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동서 교류를 폭발적으로 증진시켰다. 우선 교류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무역로 주변에 터를 잡은 작은 왕국들이 무역을 방해하거나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이 지역이 모두 단일한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유럽 역사가들은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면서 국제적 정치 질서의 안정을 가져온 13~14세기를 타타르의 평화(Pax Tatarica)’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를 통일하면서 구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염두에 두고 만든 용어다. 그런데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른 것은 좀 문제다. 타타르는 오히려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일차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숙적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도 그들을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13세기 중반 로마 교황의 명으로 몽골 제국을 방문한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는 유럽에 돌아가 우리가 타타르인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역사라는 책을 써서 유럽인의 시각 교정에 일조했다(후일 원 제국이 멸망하고 몽골족이 다시 몽골 초원의 군소 부족으로 되돌아갈 무렵에는 몽골인과 타타르인의 구별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몽골은 애초부터 무역을 염두에 두고 서역 원정을 시작한 것이므로 무역을 적극 장려했다. 무역에 필요한 도로망을 정비했을 뿐 아니라 도로마다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역사를 설치해 숙박과 역마를 제공했다. 잠치라고 부르는 이 시설은 동서 무역만이 아니라 몽골 제국 내의 물자 이동,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교통 등에 크게 기여했다.

 

초원의 길과 비단길이 새삼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초원의 길은 선사시대부터 유목민들이 이동하던 길로서, 일찍이 고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와 흉노가 이 길을 통해 동서를 왕래했다. 초원의 길은 북중국에서 시작해 볼가 강에까지 이르는 길이었으므로 북방 민족들이 주로 애용했다. 그 반면 비단길은 남중국과 중원을 서역으로 이어주었으므로 한족 왕조들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비단길은 한 무제의 명으로 장건(張騫)개척했다고 되어 있으나, 원래는 그전부터 유목민들이 자주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 양대 육상로는 몽골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동서 교류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비단길은 지중해 쪽으로 연결되었으므로 더욱 중요한 무역로였다.

 

예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한 유럽과 오리엔트, 여기에 양대 육상로를 통해 오리엔트와 중국이 연결되면서 오리엔트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도 간접 교류를 시작했다. 유럽과 오리엔트 측은 천문학과 지리학, 수학, 역학, 그리스도교 등을 중국에 전했고, 중국에서는 중세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화약이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에 전달되었다중국이 중세 유럽에 전한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은 중국에서보다 유럽 세계의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했다.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해 대항해시대를 열었으며, 아라비아인은 화약으로 대포를 만들어 그 기술을 오히려 중국에 역수출했다. 그리고 인쇄술은 훗날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성서의 대량 보급에 한몫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뒷받침했다..

 

일찍이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은 서역의 색목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원 제국의 수도인 대도는 색목인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출입하는 세계적 도시로 성장했다. 로마 교황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파견한 카르피니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uk), 원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제국의 관리로 재직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등이 당시 육로를 통해 중국에 온 유럽인들이다.

 

 

몽골 복장의 마르코 폴로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의 모습이다. 그는 삼촌을 따라 육로로 중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으며 17년 동안이나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24년 만의 귀환인 데다 이렇게 몽골 복장을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처음에는 친척들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슈퍼스타의 등장

불세출의 정복 군주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중국식으로 살자

동서 문화의 교류

깨어나라, 한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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