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전성시대
영락제는 대외적으로 한 무제와 당 태종에 맞먹는 탁월한 군주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장차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곧 환관이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사대부 국가인 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환관의 발호로 인해 정치 불안과 부패가 빚어졌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환관에게는 문자조차 습득시키지 말라는 유시를 남기고 이 내용을 적은 철패(鐵牌)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환관 문제에서도 어긋났다. 영락제는 조카의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환관의 협조를 받은 일이 있었던 탓에 환관에 대한 경계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깊이 신뢰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다는 불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당한 권력이었다면 당연히 사대부 세력에게 의존했을 테니까.
남해 원정의 사령관인 정화가 환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락제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1420년에는 동창(東廠)이라는 일종의 특수 경찰 조직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로 환관을 임명했다. 동창은 황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감시할 권리를 지닌 막강한 권력체였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기관이 흔히 그렇듯이 동창은 황제의 인물됨이나 권위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창은 강력한 군주 영락제의 시절에는 황제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환관의 유력한 무기로 전락해 환관의 적수인 사대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영락제 자신이야 절대군주였고 당시 환관은 충심으로 그를 받들었으니 무슨 염려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태조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없었다. 영락제 이후 환관을 중용하는 악습은 아예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1435년 일곱 살의 어린 황제 영종(英宗, 1427~1464)이 즉위하자 즉각 문제가 터져 나왔다. 태자 시절부터 영종의 시중을 들던 환관 왕진(王振)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고 태조가 세운 환관을 경계하라는 철패(鐵牌)마저 부수어 버렸다. 한동안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기고만장하게 앞으로만 내달리던 그는 1449년에 마침내 전복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북방의 오이라트가 다시 흥기하자 왕진은 무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만용의 대가는 컸다. 토목보(土木堡)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왕진은 전사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국가적 망신을 빚었다.
그러나 왕진의 몰락으로 환관 정치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활개를 쳤다. 환관 정치는 이미 그전에 ‘음지’에서만 작용한 게 아니라 제도권 정치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계기까지 만들어놓았다. 영락제의 뒤를 이은 선종(宣宗, 그사이에 인종이 8개월간 재위하다 죽었다)이 만든 내각(內閣) 제도가 바로 그 계기를 제공했다.
사실 태조의 치세에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승상을 없애고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6부까지 황제의 직속으로 한 것은 무리수였다. 어차피 황제 혼자의 힘으로 국정을 다 처리할 수는 없으므로 태조는 황실 비서 겸 고문으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라는 직책을 두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해진 품계가 워낙 낮아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종은 6부의 책임자(상서) 중 한 사람에게 내각대학사를 겸임하게 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장관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국무총리를 겸임시킨 셈이다. 자연히 그 상서는 권한이 강화되어 예전의 승상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무는 승상의 업무이되 공식적으로는 승상이 아닌 상서의 지위였으므로 아무래도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식과 비공식의 틈을 환관이 파고들었다. 내각에서 올라오는 문서를 황제에게 전달하는 일은 환관들이 하는 게 역대 전통이었다. 명대에는 사례감(司禮監)이라는 환관들의 기구가 그 일을 맡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인 사례태감은 보직상으로는 단지 문서를 황제에게 전하고 황제의 칙서를 다시 내각에 전하는 통로의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권력이 부패하면 대통령보다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이 판치는 법이다. 점차 권한이 커진 사례태감은 국가의 기밀 내용까지 두루 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각에서 오는 문서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결재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옛날의 승상 같은 고위직이라면 몰라도 내각대학사를 겸하는 상서 정도의 신분으로는 사례태감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점차 환관들의 권력은 내각을 능가하게 되었고 내각과 황제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내각의 의견까지 재단하고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환관의 권력에 도전한 내각의 사대부들은 걸핏하면 동창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 꼭두각시의 대명사 일곱 살에 제위에 올라 어릴 때는 왕진에게 휘둘렸고 만년에는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한 영종의 초상이다. 심지어 그는 오이라트조차도 포로로서의 가치가 없어 1년 만에 풀어줄 정도로 철저한 꼭두각시였다.
건국 초기 건강했던 시절이 지나고 명대 중기에 이르러 어리고 무능한 황제들이 출현하자 그러한 환관 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명 제국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환관들이 날뛰던 시대였다. 명 중대에 환관들은 숫자만 해도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왕진, 유근(劉瑾), 위충현(魏忠賢) 등 역대 ‘환관 스타들’의 상당수가 명대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명은 그렇게 많은 환관도 부족해 조선에까지 환관을 보내라고 명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환관을 많이 쓰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처음에는 상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조선에서도 이내 보낼 환관이 부족해졌다. 더구나 중국에 갔던 환관들이 방문이라도 할 때면 세도를 부리는 통에 각종 폐단이 많아졌다. 세종이 명에 청원한 끝에 환관을 중국에 보내는 일을 겨우 중단할 수 있었다】.
환관을 멀리하고 모든 기관을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황제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국가 운영 방침은 환관을 중용한 영락제와 내각을 만든 선종에 의해 이미 제국 초창기인 15세기 초반부터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주원장(朱元璋)의 꿈은 너무 이상에 치우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렇게 해서 명은 너무도 일찍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도 역대 최고 기록일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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