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에필로그 -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에필로그 -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3:31
728x90
반응형

 에필로그: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1.

 

 

이것으로 중국ㆍ인도ㆍ일본의 동양 3국을 다룬 동양사의 여정은 끝났다. 모두 194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질서가 수립된 시점 언저리에서 끝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시대, 현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현대는 진행 중의 역사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時事)’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책보다는 신문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게다가 현대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동양사를 세계사에서 떼어내 별도로 이해하는 방식이 유용했으나 이제부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역사권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현대의 역사는 더 시간이 지나야만 지금과 같은 의미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양사의 세 축을 이루는 중국ㆍ인도 일본의 역사를 태어남(역사의 시작), 자람(독자적 역사의 전개), 섞임(세계사로의 편입)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사실 이 구성은 시간적으로 연속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을 인위적이고 도식적으로 끊은 것에 불과하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어느 시점에서 역사를 시작한다고 선언하면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 세계사의 흐름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세계사에 합류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로 묶인 20세기에만 지구촌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지역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세계사의 일부였다. 고대사에서 보았듯이 아득한 옛날에도 민족이동은 끊이지 않았으며, 민족과 지역 간의 교류와 교섭, 전쟁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만 오늘날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고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동양사와 서양사의 구분은 순전히 편의적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프롤로그에서는 동양사를 구분하는 문제를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그렇게 구분된 동양사와 서양사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책을 끝맺기로 하자.

 

이 책에서는 동양의 세 축을 이루는 나라들을 다루었지만, 엄밀히 말해 인도의 역사는 다른 두 나라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의 탄생과 시작에서, 또 독자적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서로 교호하고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인도는 동북아시아의 두 나라와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인도는 사실 지리적으로만 동양에 포함될 뿐 문명적으로는 서양에 가깝다(인도 역사의 뿌리를 만든 아리아인은 언어학적으로 인도ㆍ유럽어족에 속한다).

 

흔히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말하지만 실상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네 곳이 아니라 두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은 하나의 문명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세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경까지 각기 별개로 발생했으나 이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고, 얼마 뒤에는 서로 어울렸다.

 

이 세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을뿐더러 지역 간에 높은 산맥이나 넓은 바다가 없어 비교적 교통이 어렵지 않다. 인더스 문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대에 전승되지 않고 맥이 끊겼으나(아리아인의 침략일 수도 있고 지리적 변화일 수도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역사가 전개되면서 오리엔트 문명으로 통합되었다. 인도의 역사는 넓게 보아 이 오리엔트 문명권에 속하는 역사다.

 

그 반면 중국에서는 황하 중류의 중원을 무대로, 다른 문명의 발상지들과 별도로 문명이 발생했다. 황허 문명은 발생한 이후 그 자리에서 중국 역사의 시작과 맞물려 하ㆍ은ㆍ주의 고대국가(삼대)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그리고 2000여 년간의 제국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류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과 황하 문명이다. 오리엔트 문명은 훗날 유럽 문명의 뿌리가 되었고, 황하 문명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세계를 이루었다. 결국 이 두 문명이 각각 서양사와 동양사의 두 축이 되는 셈이다.

 

 

2

 

그렇다면 서양사와 동양사는 뿌리부터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발생만이 아니라 서양사와 동양사는 전개 과정도 사뭇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문명의 중심에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서양사는 중심이 이동한 역사이고, 동양사는 중심이 고정된 역사다. 두 역사가 형성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서양사는 오리엔트에서 발생하고 성장하다가 소아시아로 이동했다(오리엔트에서 문명이 소멸하고 다른 데로 옮겨갔다는 뜻이 아니라 중심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소아시아의 서쪽은 에게 해와 그리스다. 소아시아의 문명은 먼저 크레타 섬으로 전해져 미노스 문명을 이룬다. 한편 그리스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리아인이 발칸을 거쳐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해 토착 원주민들과 섞였다. 이들은 크레타의 미노스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미케네 문명을 발달 시켰다.

 

이후 그리스는 도리스인의 침략으로 수백 년간 암흑기를 겪은 뒤 폴리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데, 이것이 서양사의 공식적인 시작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문명이 만개할 만한 공간은 되지 못했다. 이후 서양 문명은 다시 서쪽의 이탈리아로 옮겨가 로마를 중심으로 지중해 시대의 문을 열었다.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양사의 중심은 게르만족이 있던 중부 유럽으로 북상한다. 최종 계승자는 중세 이후 서양 문명의 적통을 이루는 서유럽이다.

 

이렇게 민족이동과 중심 이동이 활발했던 서양사에 비해 동양사는 내내 지역적 중심이 고정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의 중심은 처음부터 황허 문명이 발생한 중원 지역이었으며, 20세기 초 제국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중심이 변하지 않았다(지금까지도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이다).

 

민족의 변천과 이동 역시 마찬가지다. 하ㆍ은ㆍ주의 삼대는 모두 중원 중심의 소국이었다. 주나라는 제법 세력을 떨쳤으나 영토를 확장해 큰 나라로 성장하는 대신 주변에 제후국들이 들어서는 체제를 이루었다. 이 제후국들이 발전하면서 500여 년의 분열기(춘추전국시대)를 거치게 되지만, 그 시기에도 중심은 변하지 않았고, 기원전 221진시황(秦始皇)이 최초의 대륙 통일을 이루었을 때 다시 중원 중심의 제국이 들어섰다.

 

진시황이 세운 최초의 제국은 영토도 방대했지만, 그보다 더 큰 역사적 의미는 한족이라는 민족과 중화라는 문명의 경계선이 확정된 것이다. 이후 중화에서 제외된 사방의 이민족들은 전부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이때부터 중원 북쪽의 몽골 초원과 만주를 터전으로 삼은 흉노, 돌궐, 몽골, 여진 등 북방의 이민족들은 늘 중원 정복을 꿈꾸었다. 그것이 실패하면 서쪽으로 쫓겨났고(흉노와 돌궐), 성공하면 중원을 지배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서양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서로마와 동로마 모두 중국에서 시작한 민족이동 때문에 멸망했다), 후자의 경우에는 한족 제국을 대체했다.

 

 

3

 

이렇게 중심과 변방을 나누는 동양사의 틀은 일본사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사에서도 중심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대에는 천황이 있는 교토, 중세에는 바쿠후가 있는 도쿄 일대가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정신적이자 상징적인 중심은 늘 천황이었다. 고대의 귀족들부터 중세의 바쿠후와 다이묘 들에 이르기까지 세력가들은 중심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중국에서 천하를 쟁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과 규모만 작을 뿐 마찬가지다.

 

이 천하 쟁탈전이 벌어지는 동안 중국에서 중화 문명권이 넓어지고 강해졌듯이 일본에서도 그 과정에서 열도 전체가 단일한 체제로 편입되고 통합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중화의 경계를 정해야 할 만큼 지리적으로 트여 있었지만(또 그래서 경계가 생겨난 이후에는 중화와 비중화의 갈등이 빚어졌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기에 일본 전체가 통일된 뒤에는 즉각 대외 침략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16세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9세기의 한반도 침략, 20세기의 중국 침략이다.

 

중심이 이동한 서양사와 중심이 고정된 동양사, 이 근원적인 차이는 문명의 발생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두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중심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제국 시대가 수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여러 제국이 흥망을 거듭했고, 중심이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하나의 통일 제국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지역 분권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또한 정신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역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동양에서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성립하고 여기서 발달한 유학이라는 정치 이념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다중심 세계였던 유럽은 정신적 통일을 이루어야만 동질적인 문명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이다.

 

현대에 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오랜 기간 정치적 분권과 종교적 통합이 어우러진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세 1000년간 종교적 통합의 역사는 지금 유럽 국가들이 한 데 뭉칠 수 있는 문명적 동질성을 부여했으며, 같은 시기에 정치적으로 분권화되었던 역사는 유럽 국가들 간에 수평적 국제 질서를 생성시켰다.

 

그에 비해 한자와 유학, 불교 등 동북아시아의 동질적 요소는 유럽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통합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유럽연합에 맞먹는 동북아연합같은 기구가 앞으로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동질성의 측면에서는 (지금도 한자를 함께 사용할 만큼) 유럽보다 강력하지만, 늘 중심이 존재했고 그 중심을 쟁탈하려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화사상과 현대 일본의 대동아공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 점을 드러낸다.

 

17~18세기부터 서양 세력이 동양에 진출하면서 서양사와 동양사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섞임의 과정이 몇 세기 동안 진행된 결과 지금은 지구 전체가 거의 단일한 문명권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두 역사가 수천 년 동안 다른 원칙으로 전개되어왔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어떤 지구촌 역사가 진행된다 해도 그 문명의 차이는 계속 흔적을 남길 것이다. 문명과 역사는 늘 글로벌화되어왔지만, 그와 동시에 로컬화되기도 했다. 미래의 역사는 동양과 서양의 두 문명이 점점 내밀한 통합을 이루면서도 어떤 측면에서는 차이를 보존하고 확대하는 양상을 보여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