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육상식 전복하기
학교가 기업의 부속기관 정도로 더 이상 학생을 교육시키는 일에 등한시하게 되자, ‘개풍관’처럼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물론 개풍관이 모든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단지 학생들이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곳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 망치로 하는 공부.
최초의 학교가 만들어질 때 모습 상상하기
30년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 그땐 중학교 체육관을 빌려 합기도를 했었는데, 그날따라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많이 왔다. 그래도 하기로 한 수업이니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도록 학생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많은 비가 내리니 모두 ‘설마 수업을 하겠어’라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1시간 정도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그와 동시에 ‘이게 바로 교육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무언가 가르치고 싶은 게 있어서 포스터를 붙이고 아이들을 모집한 것이기에, 이런 일로 화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중학생 한 명이 느지막이 오며 “선생님 태풍이 불어서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도 하는 거예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비로소 학교의 원점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학교의 원점은 학생이 아무도 없는 곳에 교사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엔 가게도, 소비자도 들어설 공간이 없다. 지원자가 몇 명인지, 실력의 편차가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할 뿐이다. 이게 바로 최초의 학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듣고 싶은 사람들은 모여라!”
▲ 이런 교사의 모습에선 당연히 넉넉함과 함께 느긋함이 느껴진다.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지닌 교사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현재의 학교를 보면서 학교가 으레 그랬을 거라, 교육이 원래 그런 거라 생각해선 안 된다. 그만큼 시간이 흘러오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이 변질되었으며, 학교의 모습 또한 정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알고 있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그 근본엔 어떤 것이 있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교육=교사’라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기본은 교사가 모든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 교사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언제나 팀일 수밖에 없으며, 교사단敎師團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50명의 아이들이 있을 때, 배움의 욕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내 탓이라 자책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영향 받은 학생이 1~2명만 있어도 충분하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주파수는 다르기에, 50명의 모든 아이들이 한 교사를 보고 ‘와~’라 외치며 배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교사에 따라 주파수가 맞는 학생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몇 십 명으로 이루어진 교사의 집단을 만들면 70% 이상의 배움의 욕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러한데 보통의 교사들은 동료 교사와 공동작업을 하려 하기보다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기 바쁘다. 내가 대학교수일 때, 강의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교사는 좀더 낙관적일 필요가 있다.
▲ 참통 교사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 참 부럽다. 이렇게 직접 찾아가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교육은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교육=지식획득’이라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아이들의 귀를 쫑긋 세우는 방법이 있다. “뒤에 있는 학생 내 말 들립니까?”, “더우니 에어컨을 켤까요?”라는 말은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 단편적인 부분들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위 질문은 공통적으로 신체가 민감해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10년 전 고등학생 1000명 앞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생들은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교사들이 모이라고 해서 모였기에, ‘저 아저씨 뭐야?’라며 짜증만 나지 않았을까. 그 학교는 오래된 학교여서 자연환경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안녕하세요. 이 학교 풍경이 좋네요. 이런 환경 속에 체육관이 있으니 기의 흐름도 좋구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니 아이들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의 감각을 민감하게 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잡는 게 보였고 구 후론 집중하며 내 얘기를 듣는 것이다.
▲ 나의 모교인 신흥고. 이곳에 우치다쌤이 강의를 왔다면 분명 위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테크닉이다. 자신의 감각을 집중해야 주위의 변화에 반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마음이 열린다. 학교교육의 기본이 바로 이와 같이 신체능력을 개방하도록 해주며,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운다는 건 마음을 열고 몸을 여는 것이다. 후각을 민감하게 하면 좋은 냄새가 나고 청각을 열면 좋은 소리가 들리는 원리다.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성립된다.
이런 관점으로 대학교의 건물을 층죽할 때, 건축가에게 “교실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방음이 완벽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거였다. 내 의도는 ‘이 교실에선 얼마나 목소리가 잘 울립니까?’, ‘학생이 질문을 하면 바로 교사가 들을 수 있는 구조입니까?’라는 거였는데 말이다. ‘교실은 인간의 오감을 개방시켜주는 곳’이라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었던 거다.
▲ 우치다쌤이 근무한 고베여학원대학의 건물은 교육을 위한 최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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