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연함이란 없다
호국사 평상에서 점심을 먹고 모처럼 느긋하게 오후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아이들도 저마다 평상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한다.
규빈이는 요즘 들어 ‘아인’이란 애니메이션에 꽂혀 있는지, 그걸 모두에게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소마츠상おそ松さん’이란 애니만 보며 시리즈를 모두 정복해야 한다는 목표로 열나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인’이란 애니까지 섭렵하여 추천해준 것이다. 이러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모두 통달할 기세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민이는 웹툰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민석이는 오버워치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며 읽고 있었으며, 현세는 규빈이가 추천해준 애니메이션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고 있었다.
▲ 점심 먹은 후의 여유를 만끽하는 아이들.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든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제안에 아이들의 반응은?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이야 나쁘다곤 할 수 없지만,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 시각과 청각이 갇혀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하는 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야외에 나왔지만, 집안에서 핸드폰만 하는 것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오전 중에 정상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을 텐데, 그런 계획은 한 학생의 특별한 사정으로 사정없이 깨져버렸다. 아마 이런 식으로 계속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오전의 반응들만 보더라도 ‘오후엔 전혀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건 각오해 두세요’라는 뉘앙스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이들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있었다.
그런데 그때 승태쌤이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올라오시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움직여 보는 건 어때? 여기까지 올라온 만큼만 올라가면 정상이 나온대. 그러니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올라가도록 하자”라고 말하셨다. 그 말 자체가 어디까지나 오전에 투덜대던 아이를 최대한 배려한 것이며, 나머지 아이들에겐 좀 더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거였다.
이날은 낮 기온이 30도까지 치솟던 날이니, 아이들도 힘들게 등산을 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 오를 수도 있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면, 당연히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할 거라 짐작했다. 더욱이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싫어하고 힘들어 하기만 하니, 더욱 그런 짐작은 확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감(?)으로 아이들이 승태쌤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 호국사로 올라가던 길. 이 길을 따라 승태쌤이 오시며 제안을 했다. 과연 아이들의 반응은?
‘당연히 그럴 것이다’의 함정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1. 스마트폰만 응시하며 ‘무슨 X 풀 뜯어 먹는 소리야’라는 느낌으로 차갑게 무시한다.
2. “날도 더운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세요. 그냥 여기서 쉬었다가 가요”라고 외친다.
3.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온 거니까,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라고 하산을 제안한다.
1번은 무시전략, 2번은 대들기 전략, 3번은 유리한 방안 제시하기 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이 세 가지 전략을 탄력적으로 구사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어떤 전략을 펴는지 재미난 영화를 구경하듯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무엇을 상상했든 상상 그 이상’이란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아이들의 반응은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그렇다면 제4의 전략이란 무엇이었을까?
▲ 오전의 연속선상으로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위 사진의 인물들과 지금의 상황은 일치하지 않음)
한 학생이 “그렇다면 그냥 올라가 볼까~”라고 말한 것을 필두로, 다른 학생들도 탄력을 받았는지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에만 가만히 있는 건 좀 그러지”라고 받으며, 일어설 채비를 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몇 명의 학생들이 덩달아 일어나며 등산을 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 자체는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등산을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승태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기보다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예상 밖이었고, 예전 같으면 아니 오전만 같았으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경험한 것을 토대로 ‘당연히 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때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당연’이란 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자신의 감정도 들쭉날쭉하고, 행동도 왔다 갔다 하듯 아이들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하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니 변호무쌍하기만 하다.
▲ 아이들은 승태쌤 말에 다람쥐처럼 튀어올랐다. 활발발한 생명체의 향연.
인용
1. 건빵, 산에 살어리랏다
2. 산에 오르는 이유
4. 학생들과 등산하기 위해선 교사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5. 당연함이란 없다
7. 하류가 되려 하다
9. 검단산이 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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