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학산에 오르다
며칠 전 진규와 동네 뒷산을 올랐다. 친구가 등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쾌재를 불렀다. 늘 등산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차였으니 말이다.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표가 된 등산
하지만 그 다음 대화에서 나의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난 ‘등산=모악산 오르기’의 공식이 무의식중에 들어 있던 터라, 당연히 모악산에 가자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는데 친구는 어느 산이든 상관없다는 투였으니까. 더욱이 친구에게 있어서 모악산은 ‘정상에 다다라야 할 것만 같은 강박증을 주는 산’이었던 거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있어서 모악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꼭 정복지에 서있는 정복자처럼 정상 탈환이란 목표를 위해 올랐으니까. 그런 목표주의의 삶에서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 최대한 빨리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면 과정은 생략해도 그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길로 가려하기보다 지름길을 찾게 마련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등산하게 되면 올라가는 길에 대하는 모든 풍경들과 인물은 그저 초점 바깥의 흐릿한 배경에 불과하게 된다. 그 까닭에 친구는 “모악산에 가면 길이 쭉 정해져 있어서 그냥 막 올라가게 되니깐 싫더라. 그냥 이렇게 천천히 구경하며 가는 게 더 좋아”라고 했다.
▲ 뒷 산을 거닐다보니 이 곳에 이르렀다. 이렇게 멋진 곳이 집근처에 있었다니^^;; 대략 난감~
풍류란 과정 과정이 중요하다
풍류란 무얼까? 풍류를 어떤 사람들은 “배따땃한 사람들의 호사취미”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사실 조선시대에 풍류를 즐기는 계층은 양반이었으니, 그런 비판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풍류의 가치를 깎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와 어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는 자기중심으로 세상과 자기를 보지만, 어른은 너 중심으로, 거기서 더 진일보하여 제3자인 그의 입장에서 세상과 나를 본다는 거다. 이런 내적 성장은 단순히 나이만 먹었다고 해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어떤 기술을 익히듯 노력하고 연마해야 비로소 얻어지는 거다. 바로 그런 연마하는 자세를 풍류에 비할 수 있다. 풍류란 자연 속의 나를 느끼는 것이며 어떤 목표를 위해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시선을 두고 그걸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앙상한 나뭇가지, 멧돼지의 발자국, 얼어붙은 개울을 보며 그것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어른이 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행복이라 할 만하다.
현대엔 몸만 컸을 뿐,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돈의 하수인이 되어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증식시켜 나가기에만 열중하며,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쓰느라 자신의 삶을 소외시킨다. 또한 자기의 허한 마음을 어떻게든 내비치지 않기 위해 권위, 학력으로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한다. 그들에게 삶은 기쁨이기보다 슬픔이며 여유로움이기보다 조급함이다.(‘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처럼 그들의 삶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말도 없다.)
이젠 그런 부족한 모습을 객관화하여 인정하고 나의 삶을 내 스스로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나의 삶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젠 현실 그대로를 느끼고 즐기며 달을 희롱하고 바람을 읊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가는 것이 아니라, 즐기며 한 걸음씩 오르다보니 정상에 다다르는 것, 그것이 바로 풍류다.
▲ 남고산성 정상에서 본 전주~ 시원한 산바람이 느껴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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