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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 - 유몽인론 & 어우야담 해제 본문

문집/어우야담

어우야담 - 유몽인론 & 어우야담 해제

건방진방랑자 2025. 9. 1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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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론

분방한 기질의 탈속적 문인

 

신익철

 

 

네모난 마음을 지닌 이

 

 

말이란 성정에서 나와 사악함과 올바름이 분별되는 것이다. 어찌 차마 네모난 마음을 지니고서 말을 둥글게 하여 스스로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문장을 지을 때면 붓을 마음껏 휘둘러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

 

 

금강산에 은거해 있던 유몽인이 자신의 사고를 부탁하면서 유점사(楡岾寺)의 영운(靈運)이란 스님에게 준 글의 한 대목이다. 이 말대로 유몽인은 차마 네모난 마음을 지니고서 말을 둥글게 하지못하여 산을 나와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글을 지을 때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직서(直敍)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세상과 불화하는 일이 많았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뛰어난 문장력 때문이었지만, 그가 은거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 또한 문장이 빌미가 되었다.

 

유몽인은 방달(放達)한 기질을 지닌 자유주의적 성향의 문인이었다. 이에 세상의 규범이나 격식과 충돌할 소지가 많았지만 그의 생애에서 실제 행동으로 표출된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한편으로 엄격한 원칙과 절조를 지닌 인물로 자기억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몽인은 사대부 사회에서 용납받기 힘든 분방한 기질을 민중의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슬기로운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의 문학적 성과 중 최고봉이라 할 어우야담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이다. 곧 민간의 구비문학(口碑文學)이 지닌 진실성과 발랄한 미의식을 깊이 있게 수용하여 당대의 시대상을 폭넓게 구현하였는바, 그 저변에는 민중 의식과의 깊은 교감이 관류(貫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서 유몽인의 생애와 문학 중 특징적인 면모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분방한 문인적 기질과 장자의 영향

 

유몽인(1559~1623)은 한양 명례방(明禮坊)지금의 명동·충무로 일대에서 4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으로 고려조에 시중을 지낸 유비(柳庇)가 시조다. 조선조에 들어와 그의 선대에는 그다지 현달한 인물이 없다가 조부 유충관(柳忠寬)이 대과에 급제, 사간을 지내며 장래가 촉망됐으나 4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부친은 주부(主簿) 벼슬을 지낸 유당(柳樘)으로 유몽인의 나이 6세 때 일찍 돌아가셨으며, 모친은 여흥 민씨로 참봉 민위(閔褘)의 따님이다. 이렇게 볼 때 유몽인의 가세는 크게 내세울 만한 처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은 자가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ㆍ간암(艮庵묵호자(默好子) 등을 썼다. 그의 호는 도가적 취향을 느끼게 하는데, 이 중 가장 즐겨 사용한 어우라는 호는 의미 없는 허사로 이루어져 독특한 느낌을 준다. 홍만종(1643~1715)순오지(旬五志)에서 역대 인물의 호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시습의 청한자(淸寒子)와 유몽인의 어우자(於于子)는 각기 그 숭상하는 바에 따라 이름한 것이다[金時習之淸寒子, 柳夢寅之於于子, 以其所尙而號之也].’라고 한 바 있다. ‘어우란 말은 장자』 「천지편에서 세속을 떠난 은자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을 힐난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는 의태어로서 대략 자랑하여 떠벌리며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을 뜻한다. 유몽인이 언제부터 이를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부정적 의미의 허사를 자신의 호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독특한 기질을 엿볼 수 있겠다.

 

유몽인은 대부분 독학으로 학업을 성취하였다. 성균관에서 잠시 공부한 기간을 빼고는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청년 시절에 대개 서울 주변의 산사를 두루 다니며 독서한 것이다. 15세에 고령 신씨 판관(判官) 신식(申栻)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신식의 자부가 곧 유명한 성리학자 우계 성혼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성혼으로부터 한때 성리학을 배웠으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일정한 스승 밑에서 수학하지 않고 산사를 전전하며 독학한 것은 그의 산수벽과 함께 분방한 기질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독학을 하면서 유몽인은 유가 외에 도가와 불가 등의 다양한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형성하였으며, 이는 시속의 문풍과는 다른 것이었다. 1589년 그는 31세의 나이로 과거 시험에서 삼장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며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등극한다. 이때 그의 글을 두고 백년 이래 처음 보는 기이한 문장’(노수신, 유성룡)이라는 극찬과 법식을 벗어난 문장’(심수경, 정문부)이라는 혹평이 함께 했다.

 

 

어느 한 편에 들어간 사람은 각기 하나의 세력이 되어 나머지 네댓 편과 대적하게 되니, 한 개인이 외롭지 않으랴? 한 편의 세력이 강성하면 한 편의 세력은 쇠약하기 마련이다. 어느 한 편만을 따라 진퇴를 삼으면서 스스로 절의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절의가 한 개인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누런 것은 스스로 누렇다하고, 푸른 것은 스스로 푸르다 하는데, 그 누렇고 푸른 것이 과연 그 본성이겠는가? 갑에게 물으면 감이 옳고 을은 그르다고 하고, 을에게 물으면 을이 옳고 갑은 그르다고 한다. 그 둘 다 옳은 것인가? 아니면 둘 다 그른 것인가? 갑과 을이 둘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인가?

入於一者, 各自爲一, 與四五敵, 爲一人者, 其不孤乎? 一之勢盛, 卽一之勢衰, 守於一而爲進退, 自以爲節義, 其節義可移於一人乎?

黃者自黃, 靑者自靑, 其靑黃果其性乎? 問于甲, 卽是甲而非乙; 問于乙, 卽是乙而非甲, 其俱是乎? 其俱非乎? 其甲乙不能相是乎? 贈李聖徵令公赴京序

 

 

오늘날에도 백가(百家)를 뇌롱(牢籠, 모두 포용함)했다’(김태준, 조선 한문학사)는 평을 받는 그의 글에는 무엇보다 장자의 영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위의 글을 장자』 「제물론의 다음 대목과 비교해 보라.

 

 

나와 그대가 논쟁을 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대가 나를 이기고 나는 그대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과연 그대가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는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면, 과연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른 것일까? 그 어느 쪽은 옳고 그 어느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 모두가 옳거나 우리 모두가 그른 것일까?

旣使我與若辯矣, 若勝我, 我不若勝, 若果是也? 我果非也耶? 我勝若, 若不吾勝, 我果是也? 而果非也耶? 其或是也? 其或非也耶? 其俱是也? 其俱非也耶?

 

 

 

 

 

전란의 체험과 시화(詩禍)로 인한 파직

 

유몽인이 벼슬길에 들어선 지 3년만인 1592, 동아시아의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유몽인은 연경에 사행을 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처지였다. 난중에 가족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중 왜구를 만나 셋째 형님은 왜구의 창칼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순절하고, 둘째 형님 또한 온 몸에 부상을 입고 겨우 살아나는 참변을 겪는다. 유몽인은 귀국하여 세자(광해군)를 모시고 전라·경상·충청의 삼도를 순무하고, 정유재란 때에는 함경도 순무어사·평안도 순무어사를 역임한다. 그의 나이 30대의 중후반을 전란의 현장 속에서 보낸 것이다. 이때 그는 국토의 대부분을 두루 다니며 백성의 참혹한 실정과 동요하는 민심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어우야담에 있는 임진왜란에 관한 생생한 기록은 이러한 체험의 산물이니, 그 중 홍도강남덕의 어머니같은 작품에서는 미증유의 대전란에 처한 민중의 고난과 이를 극복하는 역정이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불교에 몸을 바친 이예순」 「재상가 서녀 진복의 일생같은 이야기에서는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소외된 여성의 일생이 진지하게 기록되어 있는바, 봉건지배질서가 동요하는 격변기 시대상의 일면이 여실히 포착되어 있다.

 

임란이 끝나자 유몽인은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후 선조 말년에 순탄한 벼슬길을 지낸다. 광해군 초반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낸 유몽인은 점차 벼슬살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당파의 속박에 얽매이게 되었고, 당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그는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어 둘러 묶은 끈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흡사 무언가 꽉 잡아맨 듯, 몸을 감고 조여오는데 스스로 풀 수가 없음은 유독 무엇 때문인가? 설사 누군가가 풀어주더라도 또 다른 이가 그것을 묶어 버린다. 푸는 사람과 묶는 사람이 서로 비슷한 적수라도 푸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맹분과 같은 장사가 묶어 놓은 것을 어린아이로 하여금 풀도록 하니, 푸는 이는 약하고 묶은 자는 강하다. 그렇다면 묶인 바를 푸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今有人於此, 非有徽纏之索, 而似有物縶縛之, 局局束束, 而不自解, 獨何耶? 設使張三解之, 而李四結之. 解與結相敵, 解之也不易, 又合賁育結之, 而嬰兒解之, 解者弱而結者强也, 解之也又難. 解辨

 

 

그의 정신적 압박에는 아랑곳없이 정국은 급속히 경색되어 갔다. 대북파는 정권을 전횡하기 위하여 광해군 911월 인목대비 폐위론을 주창한다.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표명하라고 하자 유몽인은 이에 반대하고, 누차 사직 상소를 올린다. 이 무렵 그에게 첫 번째 시화(詩禍)가 발생하니,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광해군 104월 어느날 유몽인은 친한 벗 이승형(李升亨)과 함께 남산에 올라 꽃구경을 하며 술을 마셨다. 봄날 꽃이 만발하였으며, 이승형의 기녀는 시경』 「백주편을 노래하며 흥을 돋구어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취홍에 젖어 있을 때 추국청에 참여하여 옥사를 체결하라는 전갈이 이르고, 취흥을 망친 유몽인은 추국청에 도착해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滿城花柳擁春遊 도성에 가득찬 꽃과 버들 봄놀이 자리를 둘렀는데
玉手停盃唱柏舟 옥같이 고운 손 술잔을 놓고 백주편(栢舟篇)을 읊네.
壯士忽持長劍走 장사가 문득 장검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醉中當斫老奸頭 취한 김에 마땅히 간사한 놈의 머리를 찍으리.

 

옥사를 국문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해 시를 지은 사실만으로도 문제가 될 것인데, 시의 내용 또한 단순치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위론에 반대하는 그를 축출하려 한 대북파에게는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백주시경에는 백주편이 패풍(邶風)용풍(鄘風)에 각각 실려 있는데, 두 편 모두 현실에 대한 불만을 노래한 것이다노간두(老奸頭)’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시 밝혀 죄를 주어야 할 것이라는 상소가 연이어졌다. 이에 유몽인은 백주는 자신이 읊은 것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이승형의 기녀가 노래한 것이고, ‘노간두란 옥사를 고변한 안처인(安處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명하였다(광해군일기참조).

 

그렇지만 이는 광해군의 엄한 견책에 따른 변명에 불과하지, 실상 이 시는 폐위론을 전개하며 정권을 독점하고자 한 대북파의 행태를 비판한 시로 보인다. 당시 당파간의 치열한 대립 속에 상대방을 허위 고발하는 옥사가 연이어졌던바, 유몽인은 이러한 행태에 대해 밥숟가락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커 보이면 반드시 고변을 한다’(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21)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안처인의 고변은 후에 허위에 의한 무고임이 밝혀지나, 유몽인은 결국 이 때문에 파직된다.

 

훗날 정조는 유몽인의 신원을 결정하면서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시경』 「백주편을 상스럽고 비속한 말이라고 하지 말라. 그의 남록시(南麓詩)는 참으로 천고의 절조다. 그 음조는 원망을 하는 듯도 하고 애원을 하는 듯도 하며, 그 뜻은 흥()인 듯도 하고 비()인 듯도 하여 읽던 자가 책을 덮어 버리고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게 하니, 이 또한 유몽인의 생사간의 단말마적 절규다. 정조실록

 

 

이후 그는 서호(西湖, 지금의 마포·서강 일대)에 은거하며 관직에 대한 미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월사 이정구가 대제학으로 자신을 추천하자 코풀덩어리에 불과한 떡을 두고 아이들과 다투지 않겠다[如與群兒爭鼻液之餠, 非所願也. 奉月沙書].’는 격렬한 언사로 이를 거절한 일도 있다. 유몽인의 문집어우야담은 대략 이 시기에 정리된 것으로 여겨지며, 두보의 시를 평해한 어우두평(於于杜評), 고인의 서법을 정리한 필원법첩(筆苑法帖)등도 저술하였다 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금강산 은거와 최후의 입절

 

1622년 유몽인은 64세 고령의 몸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남쪽 고흥땅에도 시골집이 있었는데, 굳이 금강산으로 향한 것을 보면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초탈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과 작별하면서 남긴 다음의 시에는 이러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神仙富貴兩難諧 신선과 부귀, 둘 다 지니기는 어렵나니
流水人間計較乖 흐르는 세월,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긋났지.
金氣無端催歲暮 쌀쌀한 가을 기운 끊임없이 세모를 재촉하는데
白頭何事又天涯 흰머리로 무엇 하러 또 하늘가에 있는가?

 

금강산 유점사에 거처를 정한 그는 심한 병을 앓으며 그 해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 얼마간 기력을 회복하여 물외(物外)의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일가의 모두가 정권에서 축출되어 은거하고 있던 처지에서 경천동지의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현실을 완전히 초탈하여 생을 마칠 결심이었지만 가족들의 처지가 염려되었다. 그는 산을 나와 서울로 향하다가 철원의 보개사에 들렀다. 친분 있는 스님이 반정이 일어나 어수선한 시기에 왜 산에서 배회하느냐고 묻자, 유몽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늙고 노망든 사람이다. 지난번에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요, 지금 산을 떠난 것은 관직을 위함이 아니라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산에 머물게 된 것은 산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식량이 흔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오래되면 신()이 들리고, 사람이 늙으면 기운이 빠지는 법이다. 6년 전에 미리 화를 피한 것은 신이 들려서이고, 이익을 보고도 달려가지 않는 것은 기력이 쇠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선산(仙山)에 머물렀던 것은 고상한 이유에서였지만, 지금 야산(野山)에 든 것은 속된 이유에서다. 진흙탕에 뒹굴어도 더럽혀지지 않음은 결백함이요, 먹을 것이 있다고 이를 좋음은 비루함이다. 내가 어디에 처하리오? 아마도 재()와 부재(不才), ()과 불현(不賢), ()와 우(), ()와 천()의 사이인가보다.

余老妄人也. 向之入山, 非輕世也, 樂山也; 今之去山, 非爲官也, 乏食也. 留此山者, 非愛山也, 穀賤也. 物久則神, 人老則耗. 避禍先六載, 神也; 見利不疾趨, 耗也. 前年處仙山, 高也; 今年投野山, 俗也. 泥而不滓, 潔也; 有食從之, 陋也. 吾何處之哉! 其惟才不才賢不賢智與愚貴與賤之間乎. 遊寶盖山贈靈隱寺彦機雲桂兩僧序

 

 

자신은 노망든 늙은이니 세속의 가치 규준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서인 주도의 무력정변에 처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뇌하는 유몽인의 모습이 감지된다. 유몽인은 이날 밤 보개산에 머물며 상부사(孀婦詞)를 짓는바, 그 뜻은 늙은 과부가 개가 할 수 없는 이치에 빗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새 임금을 섬기며 벼슬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서울에 가 가족을 만나고 난 후 유몽인은 선산이 있는 양주 서산에 은거한다. 금강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혹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날까 하여 가족들을 배려한 처사로 보인다. 이러한 유몽인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끝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가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광해군 복위운동을 꾀한다는 무고가 발생한 것이다.

 

추국청에서 문초하는 대신들에게 유몽인은 다음의 시를 읊어 보이고는 이를 가지고 죄를 준다면 받겠다고 한다. 보개사에서 자신의 뜻을 정리하며 지은 상부사(孀婦詞).

 

七十老孀婦 端居守空壺 칠십 먹은 노과부 단정히 거처하며 빈방을 지키고 있나니,
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여사(女史)의 시를 익히 외웠고 임사(妊姒)의 가르침도 자못 알고 있다네.
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이웃 사람은 개가하길 권하며 잘생긴 얼굴 무궁화꽃 같다 하나,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하얗게 센머리에 화장을 한다면 어찌 연지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으리오?

 

당시 그의 지조를 동정한 대신들 중 살려주자는 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민심의 이반을 염려한 반정 주역들의 결정에 따라 처형 당하고 만다. 두 번째 시화다. 그의 아들 약()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서자 사는 종적을 감추고 다섯 조카들은 모두 유배를 당한다.

 

1794년 방송 유화의 진정이 받아들여져 유몽인은 신원된다. 신원을 결정하고 하교하는 글에서 정조는 그를 김시습에 견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몽인은 갈라져서 싸우는 사악한 의론(인목대비 폐위론을 말함-인용자)을 돌아보고는 명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기꺼이 강호 사이에 자신을 내맡겼다. 시에 능하고 도를 깨달은 승려와 어울려 승려처럼 지냈으니, 이는 김시습이 속세를 하찮게 여기고 속세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는 청광(淸狂)한 본색을 보인 것과 같다. 김시습과 유몽인 이 두 사람이 흠모한 것은 백이와 숙제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자취와 때에 따른 것일 뿐이다. 정조실록

 

 

유몽인은 김시습을 매우 흠모하여, ‘자신의 거취와 저술로 김시습의 뒤를 잇고자 한다 留別天德菴法師法堅序고 드러내 말한 적이 있다. 역적의 오명을 쓰고 비명에 죽은 지 170여 년, 유몽인은 그제서야 참다운 지기를 만났다고 할 것이다.

 

지난 여름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유몽인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 입구에는 안내판 하나 없고 번듯한 길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 혼자서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전가평문화원장 신영범(愼英範) 선생의 안내로 묘소를 찾아 참배할 수 있었다. 묘소에 있는 문인석 한 구는 비바람에 쓰러져 있으며, 비석조차 놓여 있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팔십 노구에 지팡이를 짚고서 험한 비탈길을 오르며 필자를 안내하던 선생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이 자그마한 산문집이 유몽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어우야담(於于野譚) 해제(解題)

 

신익철

 

 

1. 어우야담의 성격과 정본 연구의 필요성

 

어우야담은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시원(始原)을 연 저작으로, 국문학 연구 초창기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온 한국학의 주요 고전이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1559~1623)은 방달(放達)마음이 너그러워 말이나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한 기질의 문인으로, 사대부 사회에서 용납받기 힘든 분방한 기질이나 세상과의 불화를 민중의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해소하였다. 그의 문학적 성과 최고봉이라 할 어우야담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이다. 곧 민간의 구비문학이 지닌 진실성과 발랄한 미의식을 깊이 있게 수용하여 당대의 시대상을 폭넓게 구현하였는바, 그 저변에는 민중 의식과의 깊은 교감이 관류(貫流)하고 있다. 현전하는 어우야담의 이본은 30여 종 가까이 되는데, 이는 야담집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많은 종류이다. 그만큼 광범위한 독자층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우야담에는 탄탄한 서사적 구조 속에 빼어난 문학성을 지닌 야담적(野談的) 이야기와 함께 여러 필기적(筆記的) 기록들이 담겨 있다. 시화와 고증ㆍ잡록류의 기록들, 인물의 일화 및 사건담, 귀신담 등 다양한 성격의 서사 기복이 혼효(混淆)되어 있는 것이다. 이야기 제재의 다채로움과 서사 방식의 다양성은 이타 야담집과 구별되는 어우야담의 주요 특징인바, 이는 야담(野談)’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초기 야담집으로서의 특성과 관련된다. 이야기 제재와 서사 방식의 다양성은 어우야담이 전대의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를 계승하면서 야담 장르를 개척한 과도기적 저작임을 말해주는 독특한 징표로 여겨진다.

 

그런데 어우야담은 저자 자신에 의해 정리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산전(散傳)되어 왔다. 이는 유몽인이 인조반정 당시 무고로 인해 처형당하면서 초고가 분산 전송된 데 따른 것이다. 어우야담을 비롯한 유몽인의 문장은 대개 그가 말년에 은거한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와 고흥(古興)의 시골집에 보관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794(정조 18) 유명인이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怨恨)을 풀어 버림된 뒤, 그의 문집은 1832(순조 11)에 후손 유금(柳琹), 유영무(柳榮茂) 등에 의해 수집, 정리되어 간행된다. 그런데 이때도 어우야담은 경비가 모자라 함께 간행되지 못한다. 이후 어우야담은 줄곧 산전되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집 정리되어 간행된다. 1964년 후손 유제한(柳濟漢) 선생에 의해 5권의 인쇄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전남 고흥(古興) 만종재(萬宗齋)에 세전(世傳)되던 필사본과 경향(京鄕) 각처에서 수집한 어우야담의 여러 이본을 참조하여 간행한 것이다. 무려 340여 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산전되면서 어우야담은 많은 이본을 파생시켰으며, 여러 이본은 체제와 권수부터 심한 차이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유제한 선생은 만종재본을 간행하면서 여러 필사본에서 뽑은 이야기를 주제별로 나누어 재편집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활자본 만종재본의 간행으로 여러 필사본에 분산 전송되던 어우야담은 처음으로 정리되는 기회를 찾게 된 것이다. 이후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만종재본을 기본 텍스트로 활용하게 된다.

 

그런데 만종재본은 몇 가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첫째, 여타 필사본과 대비해 본 결과 만종재본은 필기류적 기록이 누락된 후대의 이본을 주로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어우야담은 필기와 야담이 혼효되어 있는 초기의 야담집인데, 이것이 저자 자신의 손에 의해 정리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흥미성이 약한 필기적 기록을 누락시킨 이본이 상당수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만종재본은 여러 필사본을 참조해 편찬되었는데, 편찬 당시 이러한 필기적 기록의 유무 여부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필사본과 대비해 보면 동일한 이야기에서도 내용이나 표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단순히 오자에 의한 글자 간의 출입을 넘어서 몇 어구를 누락하거나 몇몇 분단을 생략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보이는 것이다.

셋째, 만종재본에 수록되지 않고 여러 필사본에만 전하는 어우야담의 이야기 39화가 새로 발굴된 점이다.

 

대략 이러한 세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어우야담의 정본을 확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어우야담의 본모습을 실상에 즉해서 이해하고, 그것이 지닌 필기와 야담적 성격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이 절실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어우야담의 성격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그 의의가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우야담이 야담 문학의 효시가 되는 저작이리는 점에서 그 정본을 확정하는 작업은 후대 야담 문학의 전개 과정을 탐색하는 데도 중요한 기초가 되리라 생각한다.

 

 

2. 제 이본의 특징

 

지금까지 필자가 수집한 어우야담의 제 이본은 다음과 같다.

 

1. 만종재본(萬宗齋本), 51, 인쇄본, 유제한 편, 만종재 간행

2. 청구패설본(靑丘稗說本), 51, 필사본, 태동고전연구소 소장

3. 일사본(一蓑本), 천지인(天地人) 3, 필사본, 서울대 소장

4. 동야패설본(東野稗說本), 1, 필사본, 대구시립도서관 소장

5. 야승본(野乘本), 2, 필사본, 장서각 소장

6. 도남본(陶南本), 2, 필사본, 영남대 소장

7. 동빈본(東濱本), 1, 필사본, 영남대 소장

8. 신암본(薪菴本), 1, 필사본, 고려대 소장

9. 국립중앙도서관본(國立中央圖書館本), 1,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0. 만종재필사본(萬宗齋筆寫本), 1, 필사본, 고흥 만종재 소장

11. 이수봉본(李樹鳳本), 2, 필사본, 이수봉 선생 소장

12. 고려대본(高麗大本), 3, 필사본, 고려대 소장

13. 연세대본(延世大本), 4, 필사본, 연세대 소장

14. 규장각본(奎章閣本), 1, 필사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

15. 천리대본(天理大本), 31, 필사본, 일본 천리대 소장

16. 위창본(葦滄本), 1,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 동양문고본(東洋文庫本), 2, 필사본, 일본 동양문고 소장

18. 강전섭본(姜銓燮本), 1, 필사본, 강전섭 선생 소장

19. 서울대 古圖書本(B), 1, 필사본, 서울대 소장

20. 서울대 古圖書本(A), 1, 필사본, 서울대 소장

21. 천리대본 보(天理大本 補), 1, 필사본, 일본 천리대 소장

22. 만송본(晩松本), 1, 필사본, 고려대 소장

23. 가람본, 1, 필사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

24. 시화총림본(詩話叢林本), 필사본, 홍만종 , 태학사 영인본

25. 해동시화본(海東詩話本), 1,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6. 낙선재본(樂善齋本), 21, 예인본, 통문관 간행본

27. 이능우본(李能雨本), 1, 필사본, 강경훈 선생 소장

 

아래에 제() 이본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해 둔다이하 각 이본의 명칭은 표지에 적힌 그대로 표기한 것임을 밝혀둔다.

 

1. 만종재본(萬宗齋本) 어우야담(於于野譚)

1964, 유몽인의 후손 유제한 선생이 전남 고흥(古興) 만종재(萬宗齋)에 세전되던 필사본과 경향 각처에서 수집한 어우야담의 여러 이본을 참조하여 인쇄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521화의 이야기를 인륜편(人倫篇) 11부문ㆍ종교편(宗敎篇) 10부문ㆍ학예편(學藝編) 12부문ㆍ사회편(社會篇) 20부문ㆍ만물편(萬物篇) 6부문의 559부문의 주제별로 재편집해 수록하였다. 어우야담의 제 이본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기에 가장 방대한 양을 수록했으며,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기본 텍스트로 활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

 

2. 청구패설본(靑丘稗說本) 어우야담(於于野譚)

태동고전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청구패설(靑丘稗說)2책과 3책 일부에 나누어 실려 있으며, 권말에 성여학(成汝學)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청구패설(靑丘稗說)45책에 달하는 거질(巨帙)의 야사(野史) 총서(叢書)로 이규상(李奎象)이 아들 이장재(李長載)와 함께 1790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427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필사본 중에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권수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성격이 다른 이야기를 수록할 때에는 면을 달리하여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 적고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권수를 구분해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5권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체가 졸렬하며, 중간에 지워진 부분이 있고, 화수 구분도 줄을 바꾸지 않은 채 권점만으로 표시하여 전반적으로 체재가 엉성한 편이다. 아마도 선자(選者)의 비고용(備考用)으로 편찬된 청구패설(靑丘稗說)의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3. 일사본(一蓑本) 어우야담(於于野譚)

일사본은 천지인(天地人) 3책으로 나누어 수록했을 뿐, 그 내용은 청구패설본과 동일하다. ()의 서두가 낙장이 되었고, ()의 후반은 판독하기 힘들어 정확한 화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대략 410화 가량이 수록되어 있다. 청구패설본과 동일한 저본(底本)을 전사(傳寫)했으나, 청구패설본에 비해서는 필체가 좋으며 오자도 적은 편이다.

 

4. 동야패설본(東野稗說本) 어우야담(於于野譚)

대구시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책 필사본으로, 78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표지에 동야패설(東野稗說)’이라 적혀 있을 뿐 어우야담이란 제목은 표지와 내용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속에 수록된 78화의 이야기는 청구패설본 권2에 수록된 것과 내용은 물론 표현까지 정확히 일치한다. ‘동야패설이리는 명칭의 야담 총서 속에 수록된 것이 산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5. 야승본(野乘本) 어우야담(於于野談)

야승(野乘)은 구한말 광무(光武, 1897~1906), 융희(隆熙, 1907~1910)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야사 총서로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다. 어우야담9책과 10책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며, 총 화수는 342화다. 수록 순서 및 표현 내용에서 청구패설본과 유사한 점이 많다.

 

6. 도남본(陶南本) 어우총담(於于叢談)

영남대에 소장되어 있는 22책 필사본으로 총 263화가 수록되어 있다. 표지에 어우총담(於于叢談)’라 적혀 있고, 첫 장에 찍혀 있어 도남 기증본임을 알 수 있다. 성여학의 발문을 첫머리에 싣고 있으며, 유몽인의 자호(字號), 본관 및 약력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조가 신원(伸冤)해 준 사실을 밝히고 있는바, 정조 28(1794) 유몽인이 신원된 이후에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남본은 그 내용이 여타 필사본에 비해 만종재본과 일치하는 것이 가장 많아, 만종재본을 편찬할 때 주요 이본으로 활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7. 동빈본(東濱本) 어우야담(於于野譚)

 

영남대학교 동빈문고(東濱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첫 장에 어우야담초(於于野譚抄)’라 기록되어 있어 선집(選集)임을 알 수 있다. 126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략 전반부는 도남본의 하권, 후반부는 도남본의 상권과 수록 순서가 일치한다. 수록 순서 외에 내용도 대부분 도남본과 일치하는 것이 많아, 도남본과 동일한 저본을 필사한 같은 계열의 이본으로 여겨진다.

 

8. 신암본(薪菴本) 야담(埜譚)

 

1책 필사본으로 고려대학교 신암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간혹 두주(頭註)를 달아 수록된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을 풍자하는 것인지 밝힌 부분이 있는데, 필체로 보아 필사자 자신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표지에는 야담(埜譚)’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는데, 권두에 어우야담(於于野譚) 권지이(卷之二)’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몇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권2 부분만 남은 것으로 짐작된다. 122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 순서 및 표현이 도남본 하권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

 

9. 국립중앙도서관본(國立中央圖書館本) 어우야담(於于野譚)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지질이 매우 낡아 내용을 식별하기 어려운 것이 여러 장 있는 고본(古本)이다. 100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끝에 성여학의 발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내용은 청구패설본과 일치하고, 도남본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 많다. 필기류적 기록이 축약되지 않고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고, 여러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원본에 가장 가까운 이본으로 판단된다자세한 것은 신익철, 「『어우야담이본고, 새국어교육54, 1997 참조.

 

10. 만종재필사본(萬宗齋筆寫本) 어우야담(於于野譚)

1책 필사본으로 전남 고흥(高興) 만중재에 소장되어 있다. 93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 순서 및 표현이 국립중앙도서관본과 거의 일치한다.

 

11. 이수봉본(李樹鳳本) 어우야담(於于埜譚)

이수봉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2책 필사본으로 총 265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책명을 ()ㆍ지()’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지인(天地人) 3책으로 편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수봉본의 특징으로는 기록의 신빙성이 주목된다. 이야기의 내용이 명백한 오류일 경우에도 원화를 그대로 기록하고, 끝에 세주(細註)를 달아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필기류의 기록들도 축약이 없고 대부분 국립중앙도서관본과 일치하고 있어 원본에 가까운 이본으로 판단된다.

 

12. 고려대본(高麗大本) 어우야담(於于野譚)

3(壹貳參)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으로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1책에 373, 2책에 60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3책은 펜으로 쓴 목차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고대본은 원래는 단책(單冊)으로 이루어졌던 것인데, 후에 빠진 것을 보충한 보본(補本)이 만들어지고 목차까지 별책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23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러 필사본 중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청구패설본에 버금가는 편수이다. 1책 권두에 필사 과정을 알려 주는 필사기가 수록되어 있고, 그 끝에는 필사자와 그 연대를 밝혀 놓은 손진태(孫晉泰)의 글이 첨기(添記)되어 있다.

 

13. 연세대본(延世大本) 어우야담(於于野譚)

44(春夏秋冬)의 필사본으로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1장에 10, 1행에 20자씩 정서되어 있다. 285(40, 65, 92, 88)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순서 및 화수 구분, 어구 표현 등이 고대본과 매우 흡사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연대본에 있는 285화의 이야기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고대본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4. 규장각본(奎章閣本) 야담(埜譚)

1책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66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계선(界線)이 없고 필체도 매우 졸렬한 편이다. 표지에는 야담(埜譚)’이라고만 되어 있고, 권두에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 적고 시작하고 있다. 한편 권말에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 큰 글씨로 적혀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정봉교(丁鳳喬)’라 기록되어 있는데 필사자의 성명으로 여겨진다. 이어서 소양대황락월응지필완(昭陽大荒落月鷹摯畢腕)’이라 표기되어 있는바, ‘소양대황락(昭陽大荒落)’은 고갑자(古甲子)로 계사(癸巳) 년에 해당된다. 응지(鷹摯)는 응격모지(鷹擊毛摯)와 같은 말로 매우 엄혹한 현실을 비유하는 말이고, 필완(畢腕)은 필사를 마쳤음을 뜻하는 말인 듯하다. 지질이 낡지 않은 점으로 보아 19세기의 계사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본은 수록 순서가 대략 고대본과 일치하며, 화수 구분 및 어구의 표현에 있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15. 천리대본(天理大本) 어우야담(於于野譚)

31책 필사본으로 일본 천리대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마다 장서인이 2개씩 찍혀 있는데, ‘금서춘추도서(今西春秋圖書)’라는 장서인과 함께 권12에는 남양세가(南陽世家)’, 3에는 홍명원인(洪命元印)’이라는 인장이 각각 찍혀 있다. 원래 본관이 남양인 홍명원이 소유하고 있던 책을 일인(日人)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이 입수하였다가 천리대에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권말에 을미류두서(乙未流頭書)’라 기록되어 있으나, 홍명원이 어느 시기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아 필사 연대 또한 짐작이 되지 않는다. 다만 지질 상태로 보아 고본(古本)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2에는 어우야담의 내용이 실려 있지 않고, 홍만중의 순오지에 있는 글과 함께 유명인이 말년에 금강산에 은거할 때 절의 중들에게 준 글 3편이 수록되어 있다. 3편의 글 다음에는 우삼편재문집중(右三篇在文集中)’이라는 주를 달아 문집에 실려 있는 글임을 밝히고 있다.

 

16. 위창본(葦滄本) 야담(野談)

1책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표지에 야담(野談)’이라 되어 있고, 권두에도 야담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으며 계선(界線)이 있다. 113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순서는 고대본ㆍ연대본과 대개 일치하나, 누락되거나 축약된 표현이 많다.

 

17. 동양문고본(東洋文庫本) 어우야담(於于野談)

상하(上下) 2책 필사본으로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에 나손문고(羅孫文庫)’시데하라 타이라 인(弊原坦印)’이라는 장서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나손 김동욱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 일인(日人) 시데하라 타이라(弊原坦)에게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139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 순서는 대략 서울대고도서본(B)ㆍ강전섭본 등과 일치한다.

 

18. 강전섭본(姜銓燮本) 유씨야담(柳氏野談)

강전섭 선생 소장의 1책 필사본 조야기략(朝野記略)에 수록되어 있으며, 권두 제목을 유씨야담(柳氏野談)’이라 표기하였다. 어우야담외에 패관잡기(稗官雜記)송계만록(松溪謾錄)견한잡록(遣閑雜錄)청강쇄쇄어(淸江瑣瑣語)등이 앞에 수록되어 있으나, 이들은 대개 3, 4편 정도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어우야담은 총 139화를 수록하고 있는바, 다른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다. 첫머리에 경습(景習)’완산후인(完山后人)’이학승인(李學承印)’이란 인장 세 개가 나란히 찍혀 있어, 원소유자가 원산 이씨 이학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 순서는 대개 동양문고본ㆍ서울대고도서본(B)와 일치한다.

 

19. 서울대 古圖書本(B) 어우야담(於于野譚)(도서번호 3472-3A)

1책 필사본으로 서울대에 소장되어 있다. 뒷부분에는 부연암문초(附燕巖文鈔)’라고 하여 연암 박지원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84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화나 문장에 관한 이야기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동양문고본과 수록 순서에서 많은 일치를 보이고 있다.

 

20. 서울대 古圖書本(A) 어우야담(於于野譚)(도서번호 3472-3B)

1책 필사본으로 서울대에 소장되어 있다. 각 편의 이야기마다 제목을 붙여 목록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사대부 일화 및 야담적 성격이 강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시화 및 고증류의 기록은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다.

 

21. 천리대본 보(天理大本 補) 어우야담(於于野譚)

1책 필사본으로 일본 천리대에 소장되어 있다. 표지에 어우야담보(於于野譚補)’라 적혀 있고, 권두에 금서춘추도서(今西春秋圖書)’라는 인()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의 장서인이 하나 더 찍혀 있는데 희미해 판독이 되지 않는다. 계선(界線)이 있고, 1장에 10, 1행에 21~23자 가량씩 정서되어 있다. 177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순서는 여타의 이본 중 유사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22. 만송본(晩松本) 어우야담(於于野談)

1책 필사본으로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에 목록이 있는데 대개 인물의 성명으로 제목을 삼은 것이 많으며, 인물의 일화가 아닌 경우에도 학시선명(學詩善鳴)’후월(候月)’ 등과 같이 4자 이내로 짧은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매제목 하단에 해당 이야기가 실린 면수(面數)를 표시하여 찾아보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1장에 12, 1행에 26자씩 해서로 단정하게 정서하였다. 이처럼 정연한 체제를 갖추어 정사(精寫)한 것을 보던 전문적인 필사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3. 가람본 어우야담(於于野譚)

1책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표제에 어우야담단(於于野譚單)’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35화가 수록되어 있고, 후반에는 기도시화(箕都詩話)가 수록되어 있다. 기도시화(箕都詩話)는 개성(開城) 지방의 인사나 풍물에 관계된 시화를 모아 놓은 것이다. 내용을 보면 누락되거나 축약된 것이 많아 선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4. 시화총림본(詩話叢林本) 어우야담(於于野談)

홍만종시화총림(詩話叢林)에 수록된 어우야담으로, 수록 화수는 총 42화이다.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시화 중에서 홍만종이 선별하여 수록한 것이며 원화 가운데 시화와 관계없는 부분은 축약한 것도 상당수 있다. 따라서 이본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다. 그렇지만 홍만종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저술한 1712년의 기록이기에, 여타 이본의 성격을 가늠하는 표준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25. 해동시화본(海東詩話本) 어우야담(於于埜譚)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1책 필사본으로 해동시화라는 시화집 속에 수록되어 있다. 해동시화호곡시화(壺谷詩話)성수시화(惺叟詩話)의 순으로 3종의 시화를 모아 놓은 책이다. 어우야담중 시화에 관한 것을 초록한 것으로, 시화총림(詩話叢林)에 수록된 것과 순서 및 표현이 대개 일치한다.

 

26. 낙선재본(樂善齋本) 어우야담(於于野譚)

현존하는 필사본 중 유일한 한글 빈역본으로 상하(上下) 2책이다. 143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순서는 청구패설본이나 국립중앙도서관본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의 흥미나 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불필요한 것을 축약하거나 다른 이야기와 합친 경우가 상당수 보이는데, 아마도 한글 번역본의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어우야담이 궁중의 여인들에게까지 읽혔음을 실증하는 책이라 하겠다.

 

27. 이능우본(李能雨本) 어우야담(於于野譚)

강경훈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1책 필시본으로 총 210화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표지에 어우야담 전(於于野譚 全)’이라 적혀 있고, 앞뒤로 좀이 먹어 첫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가 각각 일부분만 수록되어 있어 고본(古本)으로 여겨진다. 해서체의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는데, 수록 순서가 여타 이본과 일치하지 않아 별도의 계열로 전승된 것이 아닌가 한다.

 

 

3. 어우야담제 이본의 전승 갈래

 

만종재본을 제외한 어우야담26종 필사본의 전승 갈래는 이야기의 수록 순서ㆍ화수의 구분 방식내용 표현의 일치 여부 등 세 가지 준거를 기준으로 살펴볼 때, 대략 청구패설본ㆍ도남본ㆍ국립중앙도서관본ㆍ고대본ㆍ동양문고본의 다섯 계열로 나누어진다자세한 내용은 신익철ㆍ이형대, 「『어우야담의 비판적 정본(定本) 연구, 한국한문학연구, 29, 2002 참조. 이상의 다섯 가지 계열 어디에도 친연성을 보이지 않는 계열은 부득이 기타 계열로 설정하였는데, 각 계열에 속하는 것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청구패설본 계열: 청구패설본ㆍ일사본ㆍ동야패설본 야승본

2. 도남본 계열: 도남본ㆍ동빈문고본ㆍ신암본

3. 국립중앙도서관본 계열: 국립중앙도서관본ㆍ이수봉본ㆍ만중재필사본

4. 고대본 계열: 고려대본 .연세대본 .규장각본.천리대본.위창본

5. 동양문고본 계열: 동앙문고본ㆍ강전섭본ㆍ서울대고도서본(B)

6. 기타 계열: 서울대고도서본(A)ㆍ천리대보충본ㆍ만송본ㆍ가람본ㆍ시화총림본ㆍ해동시화본ㆍ낙선재본ㆍ이능우보

 

부록으로 첨부한 이본대비표에서는 여기에서 저본으로 삼은 만종재본을 첫머리에 수록하고, 이어서 각 계열의 순서대로 이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계열이 구분되는 경우에는 진한 선을 그어 서로 다른 계열임을 표시하였다.

 

어우야담의 정본을 추정하는 데는 필기적 서술의 과다 유무, 하나의 이야기가 지닌 서사적 짜임새 이야기의 분술(分述) 또는 합술(合述) 양상-, 오탈자 및 기록의 축약 여부 등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기준에 의거해 살펴보면 현존하는 어떤 이본도 정본에 가까운 것이라 단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여러 이본을 대비해보는 과정 속에서 정본(定本)이란 개념이 반드시 원 텍스트와의 친연성, 즉 저자 유몽인 자신이 저술한 원본에 가까운 작품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우야담처럼 오랜 세월 널리 전승된 경우, 그것이 여러 경로로 향유되면서 야담 텍스트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간 점에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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