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매(梅)
이광려(李匡呂)
滿戶影交修竹枝 夜分南閣月生時
此身定與香全化 與逼梅花寂不知
煖閣重屛勤護惜 寸根培植占天寒
靑枝蓓蕾無南北 春著藏梅摠一團 『李參奉集』 卷一
해석
滿戶影交修竹枝 만호영교수죽지 |
문에 가득 찬 그림자가 대나무 가지에 아롱지고, |
夜分南閣月生時 야분남각월생시 |
한밤 중 남쪽 누각에 달이 솟을 때에, |
此身定與香全化 차신정여향전화 |
이 몸은 정히 향기와 혼연일체 되어 |
與逼梅花寂不知 여핍매화적부지 |
매화에 다가가도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하네. |
煖閣重屛勤護惜 난각중병근호석 |
따뜻한 난간과 겹겹이 병풍으로 근면히 아쉬움을 보호하고, |
寸根培植占天寒 촌근배식점천한 |
마디 뿌리를 북돋워 심어 한기를 점령한다네. |
靑枝蓓蕾無南北 청지배뢰무남북 |
푸른 가지 꽃망울은 남북이 따로 없으니, |
春著藏梅摠一團 춘저장매총일단 |
봄이 감춘 한 덩이의 감춘 매화를 드러냈구나. 『李參奉集』 卷一 |
해설
매ㆍ죽ㆍ월(梅竹月)의 청아한 영상미(映像美)와, 매향(梅香)에 동화된 흐뭇한 자긍(自矜)이다.
‘매화’하면 으레 눈과 달이 짝되게 마련이지마는, 같은 사군자(四君子)의 하나인 ‘대’와의 어울림도 고래로 일컬어 왔으니, 둘 다 정심불개(貞心不改)의 군자(君子節)이라, 서로의 만남은 지취(志趣)의 당연함이라 할 만하다.
세상이 다 잠들어 있는 아닌 밤중에, 창 한 틀을 가득 은막(銀幕) 삼아, 바야흐로 돋아오르는 밝은 달빛으로 어른어른 영사(映寫)하고 있는, 매죽의 생동하는 수묵화의 영상은, 참으로 깨기를 잘했다고 재탄(再嘆) 삼탄(三嘆) 희한해 할 만큼의 기절묘절(奇絶妙絶)한 청경(淸景)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작부터 온 집안에 가득하던 매화 향기는 웬일인지 정작 소식이 없다. 일어나 창을 열고 활짝 피어 있는 매화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맡아 본다. 그러나 적적 감감할 뿐이다. 문득 『공자가어』 「육본」의 한 대문이 떠오른다. ‘착한 이와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ㆍ난초의 방에 든 것과 같아, 이윽고 그 향기를 맡지 못하게 되나니, 곧 그와 함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 그렇다. 매화 향기도 같은 이치로, 이미 온몸 속속들이 포화 상태로 배어 있기에, 새삼스러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 청아고결(淸雅高潔)한 매화 정신에 자신도 이미 동화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그지없이 흡족해 하는 작자의 그 아치청흥(雅致淸興)에 우리도 부지중(不知中) 동참(同參)한 듯한 느낌이 든다.
자다 말고 일어난 야반의 심미(審美) 소동의 한 장면이다.
기ㆍ승구의 생동하는 수묵화 삼자 합동으로 연출하는 영상미의 극치이다. 또 ‘매화’하면 누구나 그 은은히 부동(浮動)하는 암향청취(暗香淸臭)에 도연(陶然)히 매료(魅了)되는 말초적 상미(爽味)를 일컫거니와, ‘적부지(寂不知)’와 같은, 통째로 잡아떼는 강한 부정으로, 도리어 일대 반전(一大反轉)의 절대 긍정을 이끌어낸 결구의 반의적 수사 솜씨 또한 기발하다 할 만하지 않은가?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496~49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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