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조선 숙종(肅宗) 연간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지연(地緣)과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한 문인 학자들의 학맥을 지칭한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만년(晩年)에 강화도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천명하였을 때 그 문하에서 이광명(李匡明)ㆍ이광신(李匡臣)ㆍ이광려(李匡呂)ㆍ이광사(李匡師)ㆍ신대우(申大羽) 등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이 학맥은 구한말 이건방(李建芳)ㆍ이건창(李建昌)ㆍ정인보(鄭寅普)에까지 이른다. 이들은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여얼(餘孽)로 이 고경(苦境)을 걷게 되면서 양명학(陽明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 전하게 되었으며 후일 이건창(李建昌)의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에 이르러 강화도령철종(江華道令哲宗)이 등극(登極)함에 따라 처음으로 환로(宦路)에 나가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문인으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린 사람은 이광려(李匡呂)와 이광사(李匡師)이다.
이광려(李匡呂, 1720 경종1 ~1783 정조7, 자 聖載, 호 月巖)는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만년에 참봉 직함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덕무(李德懋)가 “진사 이광려의 자는 성재로 시는 우아하고 중후하며 심오하고 깨끗해 명성이 한 나라에 가득찼고 혹자는 시가 당세제일이라 말할 정도였다[李進士匡呂, 字聖載, 詩雅重深潔, 名滿一國, 或云詩爲當世第一].”라 한 것이라든가, 이학규(李學逵)가 “근세의 시와 문장으론 마땅히 시로는 이참봉과 문장으론 박연암으로 한 시대의 명문장가라 여겨야 한다[近世詩文, 當以李參奉朴燕岩爲一代名家]”라 한 바와 같이 영정(英正) 연간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많이 시작(詩作)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호를 일컫지도 않았으며, 스스로 문을 숭상하지도 않았으므로 남겨둔 시문이 없었던 탓이다[先生未嘗自號, 亦未嘗以文自喜, 無巾箱之蓄. -李晩秀, 「李參奉集序」].
홍석주(洪奭周)는 이광려(李匡呂)의 시작(詩作)과 그 작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근세 시인 가운데서는 참봉 이광려를 최고로 삼는 이가 많다. 그 시는 생각을 다듬고 표현을 손질하여 결코 껍데기 진부한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다작할 수 없었고 더욱이 거편도 드물다. 그러나 전문가적 정신[匠心]은 자신만의 경지를 이루어 옛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면이 있다.
近世詩人, 多推李參奉匡呂爲上乘, 其詩刻意陶煉, 絶不爲膚率語, 以故不能多作, 尤鮮爲巨篇, 然至匠心獨造, 往往不愧古人. 「鶴岡散筆」 卷3
홍석주(洪奭周)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광려(李匡呂)의 시는 “각의도련(刻意陶煉)”의 결과 시의 형식과 내용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광려(李匡呂)의 「숙연광정(宿練光亭)」 시는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練光亭對大同樓 | 연광정은 대동루를 마주하고 |
重疊靑山映綠洲 | 겹겹이 푸른 산 푸른 물가에 비치네.. |
睡起簾㫌上初日 | 자다 일어나니 주렴에 아침 해 오르고 |
半江伊軋動行舟 | 강에는 삐그득 지나가는 배 소리. |
평양의 연광정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지은 것이다. 안짝은 일상적인 평범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바깥짝의 ‘상초월(上初月)’, ‘동행주(動行舟)’를 제조한 높은 수준의 솜씨는 범용(凡庸)의 상식으로서는 미치기 어려운 세계임에 틀림없다. 푸른 산과 푸른 대동강을 배경으로 한 연광정에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정적인 구도로 포착해 그려내고, 이어 이 정적을 깨며 강 가운데로 삐그덕 지나는 배를 그려 마무리를 짓고 있다.
한편 이광려(李匡呂)는 당시의 사회현실을 고발한 오언고시 「양정모(良丁母)」를 남겨, 당시 가렴주구를 일삼던 세정(稅政)의 잔학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양정모(良丁母)」의 서문에는 이광려(李匡呂)가 어렸을 때 이웃 장정의 어미가 징포 때문에 통곡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라 적은 것이라 하였다.
生男作良丁 盡道不如女 | 아들 낳아 양정(良丁)이 되면 딸만도 못하다고 다들 말하네. |
孰知爲女身 身世苦復苦 | 누가 알리 여자로 태어나서 그 신세 쓰리고도 고닮음을. |
嫁作閒丁妻 復爲閒丁母 | 시집가 한정(閒丁)의 아내되면 다시 한정의 어미되거니 |
閒丁母實悲 又甚閒丁婦 | 한정의 어미란 실로 슬프니 한정의 아내보다 더하고 말고, |
(중략) | (중략) |
國中壯實丁 本足充額數 | 나라 안에는 장정도 많아 본래 머리수 채우기 넉넉하련만 |
直爲貧弱者 無錢與掌務 | 단지 가난하고 약한 자 되면 담당자에게 인정 쓸 돈이 없다네. |
貧弱已寃苦 况乃死無處 | 가난하고 약한 것도 원통하고 괴로운데 하물며 죽어도 묻힐 곳 없나니. |
一婦痛至骨 尙足變霜露 | 한 계집의 원한이 뼈에 사무치면 오뉴월에도 서리 내리게 한다던데. |
(하략) | (하략) |
가난한 한정(閒丁)의 어미를 통해 가혹한 세정(世情)의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소재 자체는 저속으로 떨어지기 쉬운 범속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높고 낮음이 없이 긴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솜씨 또한 수준 높은 시인의 것임을 확인케 해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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