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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초평면 고추 심기 여행 - 2.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초평면 고추 심기 여행 - 2.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0. 2. 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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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시 고추를 심으러 가는 이유?

 

어느덧 국토종단 중에 초평에서 고추를 심은 후1년이 흘렀다. 국토종단의 기억이 희미해진 지금 초평 저수지의 추억이 제대로 기억날 리 없다. 단지 남아있는 인상이란 포근하고 행복하여 몸은 고됐지만 즐거웠다는 피상적인 느낌뿐이다.

 

 

삽으로 흙을 올려주면, 손으로 모종을 세우면 된다.    

 

 

 

추억에 머문다는 것의 의미

 

그래서 얼렁뚱땅 흥신소라는 드라마에서는 기억은 추억을 배신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추억은 과거의 기억 중 좋은 부분만을 확대하여 이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불우한 어린 시절도 곧잘 돌아가고 싶은 시기로 변모되기도 하고 첫 사랑의 추억은 아름답기만 하던 한 때로 눈물을 자아내기도 한다. ‘비극을 제거한 순백의 희극만 가득하던 때로 재창조된 왜곡된 기억이야말로 추억의 다른 말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좋기만 할까? 나의 생각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진 않을까?

그렇다, 지금 나는 1년 만에 초평으로 고추를 심으러 가고 있는 거다. 앞에서 이야기한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초평으로의 여행은 도전과도 같은 것이다. 그땐 좋았을지라도 1년이 흐른 지금은 어색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씁쓸한 기억은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을 지워버릴 것이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자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유용하다. 추억으로라도 남겨두면 두고두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추억이 많아진다는 것은 현재가 즐겁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재에서 아무런 의미도 못 찾으며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지 못해 과거의 추억에만 머물려 한다. 그래서 내가 과거엔 어쩌고 저쨌지하는 따위의 추억담을 자랑삼아 말할 뿐이다. 추억담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모습 속엔 현실에 대한 불안, 현재의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이 숨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난 아직 초평에서의 일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진 않다. 비록 기억이 추억을 배신할지라도새로운 기억으로 이 인연을 가꾸어가고 싶었기에 이렇게 다시 페달을 밟아 나가기로 한 것이다.

 

 

추억이 사그라들지라도, 용기를 내어 가본다. 막둥이는 일년 사이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이분법에 대해

 

근데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건 바로 노동에 대한 생각의 변화.

글 꽤나 읽었다는 놈들은 말이 틀린 법이지.’라는 대사가 전우치라는 영화에 나온다. 글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게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세상이기에 조선시대의 학자들을 한껏 웃어재끼는 전우치의 명대사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다르던가? 정신노동은 고귀한 것이고 육체노동은 저급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노동자농민은 괄시당하고 학자기자는 대우 받고 존경 받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이기에 블루칼라 아버지는 자식을 화이트칼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 자식은 기필코 사무실에서 일하게 만든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말하고, 어떤 개그맨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해야 한다고 장난스레 말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를 내팽겨 치며 거부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사회 분위기가 올바른 것일까? 세상엔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듯이 육체노동은 육체노동대로, 정신노동은 정신노동대로 의미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득의양양해서도, 어떤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기죽을 필요도 없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현실은 직업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사람들의 인식이 다른 걸 당연한 듯 받아들이도록, 그런 차별을 정당화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관념을 전복시키자는 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 일하는 정직한 노동을 경험하며 소금꽃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육체노동은 숭고하다라고 떠벌린들, 경험하거나 실천하지 못하면 전우치에게 글 꽤나 읽었다는 놈들은 말이 틀리다니까라는 핀잔을 듣게 될 뿐이다.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 차별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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