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본말(本末)과 종시(終始)는 하나다
전덕홍(錢德洪)
曰: “物有本末, 先儒以明德爲本, 新民爲末, 兩物而內外相對也; 事有終始, 先儒以知止爲始, 能得爲終, 一事而首尾相因也. 如子之說, 以新民爲親民, 則本末之說亦有所未然歟?”
曰: “終始之說, 大略是矣. 卽以新民爲親民, 而曰明德爲本, 親民爲末, 其說亦未嘗不可, 但不當分本末爲兩物耳.
夫木之幹, 謂之本; 木之梢, 謂之末, 惟其一物也, 是以謂之本末. 若曰兩物, 則旣爲兩物矣, 又何可以言本末乎? 新民之意, 旣與親民不同, 則明德之功, 自與新民爲二. 若知明明德以親其民, 而親民以明其明德, 則明德親民焉可析而爲兩乎?
先儒之說, 是蓋不知明德親民之本爲一事, 而認以爲兩事. 是以雖知本末之當爲一, 而亦不得不非爲兩物也.”
해석
曰: “物有本末,
여쭈었다. “‘사물에는 본말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先儒以明德爲本, 新民爲末,
선배 유학자인 주희는 ‘명덕(明德)’을 근본으로 삼고 ‘신민(新民)’을 말단으로 삼아
兩物而內外相對也;
두 물건으로 내외를 서로 대조하였다.
事有終始,
‘일엔 시종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先儒以知止爲始, 能得爲終,
선배 유학자인 주희는 ‘지지(知止)’를 처음으로 삼고 ‘능득(能得)’을 끝으로 삼아【明德新民, 兩物而內外相對, 故曰本末; 知止能得, 一事而首尾相因, 故曰終始. -『大學或問』】
一事而首尾相因也.
하나의 사태로 수미가 서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如子之說, 以新民爲親民,
선생의 말이 ‘신민(新民)’을 ‘친민(親民)’으로 삼는다면
則本末之說亦有所未然歟?”
본말의 설명이 또한 그렇지 않은 게 있습니까?”
曰: “終始之說, 大略是矣.
말씀하셨다. “‘종시(終始)’에 관한 말이 대략적으론 옳다.
卽以新民爲親民, 而曰明德爲本, 親民爲末,
이미 ‘신민(新民)’을 ‘친민(親民)’으로 삼아 ‘명덕(明德)’이 근본이 되고 ‘친민(親民)’이 말단이 되니,
其說亦未嘗不可,
그 말은 또한 일찍이 불가한 건 아니지만
但不當分本末爲兩物耳.
다만 본과 말을 나누어 두 가지 사물로 삼는 것이 부당할 뿐이다.
夫木之幹, 謂之本;
일반적으로 나무의 뿌리를 근본이라 말하고
木之梢, 謂之末,
나무의 끝을 끝이라 말하지만,
惟其一物也, 是以謂之本末.
오직 하나의 물건으로 이것을 ‘본말(本末)’이라 말하는 것이다.
若曰兩物, 則旣爲兩物矣,
만약 ‘두 가지 사물’이라 말한다면 이미 두 가지 사물이 되니
又何可以言本末乎?
또한 어찌 ‘본말(本末)’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新民之意, 旣與親民不同,
‘신민(新民)’의 뜻이 이미 ‘친민(親民)’과 같지 않다면
則明德之功, 自與新民爲二.
‘명덕(明德)’의 공은 절로 ‘신민(新民)’과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若知明明德以親其民, 而親民以明其明德,
만약 ‘명명덕(明明德)’으로 ‘친기민(親其民)’하고 백성을 친하게 여김으로 밝은 덕을 밝힘을 안다면
則明德親民焉可析而爲兩乎?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은 쪼개어 둘이 될 수 있겠는가.
先儒之說, 是蓋不知明德親民之本爲一事,
선배 유학자 주희의 설은 대체로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의 근본이 하나의 사태가 됨을 알지 못하고
而認以爲兩事.
오인하여 두 가지 사태라 여겼다.
是以雖知本末之當爲一,
이런 이유로 비록 본말(本末)이 마땅히 하나가 됨을 알고서
而亦不得不非爲兩物也.”
또한 두 가지 사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용
'고전 > 대학&학기&중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문(大學問) - 7. 양지(良知)에 관해 (0) | 2020.03.17 |
---|---|
대학문(大學問) - 6.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과 마음 정해짐에 따라 움직이는 몸 (0) | 2020.03.17 |
대학문(大學問) - 4. 양지를 통해 지극한 선에 이를 수 있다 (0) | 2020.03.17 |
대학문(大學問) - 3. 내면에 구비된 명덕을 통해 지극한 선에 이르라 (0) | 2020.03.17 |
대학문(大學問) - 2. 나와 너, 천지만물은 일체다 (0) | 2020.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