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부와 경(敬)
퇴계의 『성학십도』와 경의 철학
퇴계의 말년 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는 우주와 인간 전체가 상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天命)’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 명령하는 하늘, 인격적 주재자의 가능성으로서의 천(天)이라는 관념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천명, 즉 하늘의 명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퇴계는 명쾌히 대답한다: “천(天)은 리(理)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천(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위는 나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곧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곧 리(理)며 성(性)이다. 나의 마음은 나라는 존재의 일신(一身)을 주재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경(敬)이다. 그래서 퇴계의 철학을 경의 철학이라 말하고 그의 교육론을 경의 교육론이라 말한다. 주희(朱熹)는 학자의 공부로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이사(二事)를 말했는데, 그는 암암리 이 양자가 호상발명(互相發明)한다고 말하면서도 궁리, 즉 객관적 사물의 탐구에 더 역점을 두었다. 퇴계는 거경과 궁리를 근원적으로 포섭하는 경의 철학을 확립하고 철저히 우리 몸의 내면의 본질을 파고든 것이다.
경과 어텐션
경이란 우리가 여기서 말한 “몸의 공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명이 사라진, 이 지상에 던져진 고독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경(敬)은 우리말에서 보통 “진지함(earnestness)”, “공경함(reverence)”을 뜻한다.
그런데 신유학의 독특한 용어로서는 일차적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의미가 된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하나에 전념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경은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으로 환치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집중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학습의 효율성을 지배하는 근원적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학생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양이 곧 공부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공부의 핵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중하는 마음의 상태가 경(敬)인 것이다. 이러한 경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동학이 말하는 성ㆍ경ㆍ신 세 글자
우리 민족사상사의 획기적인 분수령을 기록한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崔水雲, 1824~64)의 좌잠(座箴)에 이런 말이 있다.
나의 도는 넓고 넓지만 또 간략하기 그지없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별다른 도리가 아니요, 성(誠), 경(敬), 신(信) 세 글자일 뿐이다.
吾道博而約, 不用多言義. 別無他道理, 誠敬信三字. 「座箴」
성(誠)은 우주적 운행의 성실함(Cosmic Authenticity)을 말하는 것이요, 경(敬)은 집중하는 진지한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요, 신(信)이란 신험 있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수운은 제자들에게 성ㆍ경ㆍ신 이 세 글자 속에서 ‘공부(工夫)’를 할 것을 당부한다. 그의 『동경대전』은 ‘공부’라는 용어의 전통적 의미를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의 맥락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거시적 테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교육의 역사는 ‘공부의 역사’였던 것이다.
▲ 동양 사상 속의 공부는 경으로 시작하여, 경으로 끝나는 집중력을 요하는 단련을 말하고 있다.
몸은 정신·육체 분할 이전의 개념
공부는 몸(Mom)을 전제로 한다. 몸이란 정신(Mind)과 육체(Body)의 이분법적 분할을 거부하는 인격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니, 그것이 곧 ‘수신(修身)’이다. 선진고전의 ‘신(身)’이라는 글자는 ‘심(心)’을 포섭한다. 공부는 몸의 디시플린(discipline, 규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몸의 단련이란 몸의 다양한 기능의 민주적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 부분의 기능도 그 탁월함(아레떼)에 도달했을 때 가치상의 서열을 부여할 수 없다. 개념들의 연역적 조작에 영민한 학생이 수학을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나 운동선수가 탁월한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음악성이 뛰어난 학생이 악기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의 ‘공부’로서 인정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몸’이라는 우주의 총체적인 조화로운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 꾸준히 해나갈 수 있다면, 뭐든 공부가 된다. 목공수업을 하는 아이들.
일상성의 승리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걷고, 생활하고, 독서하고, 놀이하고, 쉬고, 잠자는 모든 일상적 행위가 경(敬)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진지함 속에 개인과 사회와 우주의 도덕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교육의 원리로서 자각해야 한다. 자녀에게 성모랄을 가르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매사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몸의 모랄을 깨닫게 하는 더 효용이 높은 도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파탄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일상적 규율의 원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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