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시평(小華詩評) 서설(序說)
1. 가치
『소화시평(小華詩評)』은 한국 한시를 뽑아서 품평한 책이다. 소화(小華)는 작은 중화(中華)라는 뜻으로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고, 시평(詩評)은 시의 품평(品評)으로 시의 잘되고 못됨을 평가하여 수준의 높고 낮음을 자리매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소화시평』은 한국 한시 가운데 우수한 작품을 골라 제시하고 그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여 독자의 감상과 이해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책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시의 선집 또는 비평서로서 시화(詩話) 갈래에 속한다.
저자는 홍만종(洪萬宗, 1643~1725)으로 1675년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고대부터 17세기 후반까지 한시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빼어난 작품을 짧고 인상적인 비평의 언어를 동원하여 해설하였다. 이 책 한 권만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한시사(漢詩史)에 빛나는 주요 작품을 감상하고, 시사의 큰 흐름과 우리 시의 특징을 잘 이해하도록 친절하게 안내하는 간편하고도 농축된 저술이다.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아 책이 공개된 이후 수백 년 동안 독서인의 서가에 한 권쯤 놓여 있던 필독서의 하나였다. 시를 즐기고 아는 것이 독서인의 상식이었던 시대의 명저로서 시선집과 시화를 상징하였다. 『소화시평』은 근대 이전 이백여 년 동안 문학을 아끼는 독자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책이다.

2. 17세기 국학의 대표자 홍만종
『소화시평』의 저자 홍만종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기를 살다간 학자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ㆍ장주(長洲)ㆍ몽헌(夢軒)이다.
그는 대대로 고관과 문인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허당(靜虛堂) 홍주세(洪柱世, 1612~1661)로 문과에 급제한 뒤 영천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 등 서인이 추진하는 북벌론(北伐論)에 반대하고 정치적 주관을 지켰다. 조부는 월봉(月峯) 홍보(洪靌, 1585~1643)로 인조 원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이인거(李仁居)의 난에 공을 세워 풍녕부원군(豊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좌참찬(坐參)에 이르렀다. 증조부 습지(習池) 홍난상(洪鸞祥, 1553~1615)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증조부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홍만종은 3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비롯한 낮은 벼슬을 잠깐 지냈다. 하지만 과거시험이나 벼슬과는 큰 인연이 없어 팔십 평생을 학문과 저술활동으로 보냈다. 한양의 마포 강가에 거주하였는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정자 풍월정(風月亭)이 그의 소유였다. 이 누정에 이한당(二閑堂)이란 서재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파한집(破閑集)』과 『보한집(補閑集)』 두 시화에서 두 개의 한(閑)자를 취하여 시화에 대한 열정과 한가롭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병마에 시달린 건강상의 불리한 조건하에서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지 못한 채 소외된 지식인으로 생애를 마쳤다. 교우관계는 그리 넓지 못한 듯하다. 당파는 소론(少論)에 기울었다.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 남인(南人)의 당파보 『남보(南譜)』에 그의 직계 가족을 남인으로 넣고서 “소론으로 돌아갔다[反少]”라고 밝혔다. 관직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했으나 다방면에 박학한 지식은 생존 시부터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른 나이부터 참신한 주제로 독특한 내용을 담은 저술을 써서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확고한 지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 시대 누구보다 개성이 넘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학자였고, 다방면에 걸친 저술로 그만의 학문세계를 구성하였다. 저술의 목록을 주제와 시기에 따라 분류하여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필기(筆記) 6종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3종은 현재까지 전해온다.
(1) 해동이적(海東異蹟): 1666, 24세, 도교 계통 신선의 전기
(2) 속고금소총(續古今笑叢): 미상, 부전(不傳), 외설스런 야담집
(3) 명엽지해(蓂葉志諧) : 미상, 현전, 야담집
(4) 순오지(旬五志) : 1678, 36세, 필기
(5) 몽헌필담(夢軒筆譚) : 미상, 부전, 필기
(6) 부상지림(扶桑志林) : 미상, 부전, 필기
한국의 도교 관련 인물을 조사하여 그 생애를 서술한 『해동이적』은 이 분야의 가장 오래고 중요한 저술로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 도교에 심취한 홍만종의 지적 편력을 보여주는데, 이후 황윤석이 증보하여 『해동이적보(海東異蹟補)』를 저술하였다. 『속고금소총』과 『명엽지해』는 야담집으로 전자는 음담패설집이고 후자는 음담이 섞인 본격적인 야담집이다. 다음으로 『순오지』를 비롯한 3종의 필기(筆記)는 역사, 야담, 문인 일화, 풍속, 시화, 언어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서술하고 있다. 필기에도 시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문학 방면의 저술 7종을 꼽을 수 있다.
(7) 소화시평(小華詩評) : 1675, 33세
(8) 시평보유(詩評補遺): 1691, 49세
(9) 시평치윤(詩評置閏): 미상, 부전(不傳)
(10) 시화총림(詩話叢林) : 1712, 70세
(11) 팔가문정(八家文精) : 미상, 부전, 고문선집
(12) 청구영언(靑丘永言): 미상, 부전, 시조집
(13) 이원신보(梨園新譜): 미상, 부전, 시조집
먼저 『소화시평』과 『시평보유』, 『시평치윤』은 시평 3부작이다. 마지막 것은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으나 그가 우리 한시를 깊이있게 이해하고 널리 소개하는 일에 얼마나 열정을 가졌는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시화총림』은 노년에 역대 시화를 종합하여 정리한 자료집이고, 『팔가문정』은 고문선집이다. 특별히 주목할 저술은 『청구영언』과 『이원신보』인데 당대에 널리 불리던 시조를 수집하여 엮은 시조집으로서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출현한 시조집 편찬의 물꼬를 텄다. 다음으로는 역사서와 족보의 편찬이다.
(14)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摠目) : 1705, 63세
(15)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摠目): 1706, 64세
(16) 풍산홍씨족보(豊山洪氏族譜): 1709, 67세
『동국역대총목』과 『증보역대총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요점을 열거하고 연표의 구실까지 겸한 저작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항 위주로 서술하여 조선 후기에 널리 읽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그의 문집이다. 『몽헌집(夢軒集)』이 있다고 전해오지만 그 실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근자에 영산대 김영호 교수가 『부부고(覆瓿藁)』를 입수하여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이 사본은 『몽헌집』의 자필 초고본으로 추정되는데 그 안에 다수의 저술 서문이 실려 있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저술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소개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홍만종의 저술은 일반 유학자들의 저술에 견주어볼 때 특이한 면을 많이 드러낸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조선의 역사와 민간풍속, 문학과 도교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 특징을 볼 때 그는 자국학(自國學) 분야에 전문적으로 집중한 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저작 가운데 자국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팔가문정』과 『증보역대총목』 2종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학문 성향은 당시로서는 매우 색다르고 신선하며 의의가 깊다. 왜란과 호란이 휩쓸고 간 이후 조선의 지성인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학문의 순수성에 집착하였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이탈하는 사유를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도록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작동시킨 시기였다. 그런데 홍만종은 학계를 무겁게 짓누르는 규범적 사유에서 벗어나 도가적(道家的) 사유를 깊게 깔고, 박학(博學)을 근거로 조선적 현상에 연구를 집중하였다. 이는 당시 정세와 학문의 현황에서 볼 때 상당한 일탈의 행위였다. 그는 외적의 침략과 그 이후 전개된 외세에 대한 배타적 심리를 자국학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지성인이었다.
그의 박학은 조선의 문물제도, 문학, 민간문화 등에 방향을 두었고, 누구보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여 많은 문헌을 섭렵하고 그에 바탕을 두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단군을 조선 역사의 기원으로 설정한 것은 그런 연구방향의 한 가지 징표이다. 저서 대부분이 자국 문화의 우수한 가치와 의의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상층의 문화뿐 아니라 시조집 『청구영언』과 『이원신보』를 편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민간문화, 한글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점에서 그의 학문태도는 개방적이었다. 요컨대 그는 17세기가 낳은 가장 선구적이고 본격적인 국학자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

3. 홍만종의 시화집들 특징
홍만종의 국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바로 시학(詩學) 또는 시화(詩話)이다. 홍만종은 길고 긴 시문학 전통의 가치를 인식하고 조선의 한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심한 조선 시단의 현실을 반성하였다. 그는 사명감에서 우러나온 조선 한시의 전문적 연구에 착수하여 문학과 관련된 문헌을 폭넓게 수집하였다. 문헌을 깊이 이해한 바탕 위에서 그는 조선 한시의 아름다움을 체계적이고 심미적으로 소개하여 『소화시평』, 『시평보유』, 『시평치윤』의 순서로 시화 3부작을 차례로 저술하였다. 『소화시평』을 첫 저술로 하여 이후 그 저술을 보완하는 시평을 두 종 더 편찬한 것이다.
마지막 저작 『시평치윤』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그 서문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나 시단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까지도 발굴하여 소개하려 한 그의 진지한 노력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노년에 편찬한 『시화총림』은 그가 시화를 저술하기 위해 참고한 역대 시화를 정리한 텍스트북의 성격을 띤다. 사실 시화를 향한 관심과 열정은 그의 선대로부터 이어졌다. 아버지 홍주세는 1659년에 『파한집』과 『보한집』을 중간하고 중간이한집발(重刊二閑集跋)을 썼다. 가장 오래되고 높은 수준에 있는 2종의 시화를 간행한 것이 그 아들 홍만종을 시학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다.
『소화시평』은 시화이다. 17세기 이전 한시의 역사에서 대표작을 뽑고 비평을 가한 시선집 겸 비평서이다. 주요 시인의 대표작을 가려 뽑고, 그 작품의 우열과 품격을 엄정하고 균형 있게 비평하였다. 『소화시평』은 선정된 시를 놓고 보면 훌륭한 시선집이며, 시평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한시에 대한 빼어난 비평적 성찰이다.

4. 성격
먼저 시선집으로서 지닌 특징과 가치를 살펴본다. 서문을 빼고 전체 212칙의 체제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상권 | |
| 1~13칙 | 역대 제왕 |
| 14~15칙 | 종실(宗室), 귀유(貴遊) |
| 16~47칙 | 사대부(최치원 ~ 이숭인) |
| 48칙 | 고려조의 연구 엄선 |
| 49칙 | 고려와 조선조 시의 우열 |
| 50~82칙 | 사대부(정도전 ~ 정사룡) |
| 83칙 | 칠언율시 경련(警聯) |
| 84~110칙 | 사대부(정렴 ~ 이달) |
| 하권 | |
| 1~2칙 | 역대 경구(警句) |
| 3~4칙 | 역대 풍유시(오언절구, 칠언절구) |
| 5~32칙 | 사대부(이산해 ~ 홍경신) |
| 33칙 | 표절시 |
| 34~63칙 | 사대부(이춘영 ~ 장유) |
| 64칙 | 역대 경구(15명) |
| 65~92칙 | 사대부(이식 ~ 이원진) |
| 93~102칙 | 사대부 외의 시인군 93칙: 작가불명 / 94칙: 무명씨 / 95칙 : 한 연만 전해지는 시구 / 96칙: 승려 / 97칙: 여항시인 / 98칙: 여성 / 99칙: 기생 / 100칙: 도사 / 101칙: 귀신 / 102칙: 요절 시인 |
시인군의 주축을 이루는 사대부의 시를 품평의 중심에 놓고, 최치원으로부터 출발하여 동시대 시인까지 시대순으로 배열하였다. 사대부에 앞서 통치자인 제왕을 맨 처음에 배치하고 제왕의 주변 계층인 종실과 귀유를 그 다음에 배치하였다. 사대부 외의 신분과 신분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는 작가군을 다룬 10칙의 항목을 맨 마지막에 배치하였다. 신분의 고하에 따라 배열하고 주축이 되는 사대부 시인은 시대순에 따라 배열하였다. 이 체계는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 한시사의 특성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특별한 주제, 예컨대 고려와 조선 시의 우열이나 한시를 이해하는 특별한 방법인 경련(警)ㆍ경구(警句) 및 풍자ㆍ표절과 같은 항목은 군데군데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였다.
주제별 항목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는 특정한 시인의 작품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평가하는 방법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단 한 가지 예외를 빼고는 작품의 인용이 서술의 중심을 이룬다. 김선기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모두 합해 478수의 시가 수록되었는데 308수는 전체 인용이고, 107수는 부분 인용이다. 전체 인용한 시는 칠언절구(53%), 칠언율시(22%), 오언절구(16%)로 구성되어 있고, 부분 인용한 시는 칠언율시가 72%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시인 소개, 창작 동기, 작품 인용, 평가로 이어지는 서술 방법은 시사의 초기부터 당대까지 대표작을 감상할 수 있는 시선집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었다. 실제로 이 책은 저술 이후 근대까지 한국 한시를 감상하는 시선집으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누렸다. 한 권의 책으로 명작 중의 명작을 비평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저작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저작은 없었다.
일부 『소화시평』(국립본, 가람본, 서강대본 등)에는 “세상에서 남용익의 『기아(箕雅)』를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 소화시평은 신기하지 않은 듯 본다. 그러나 이 저작은 『기아』가 나오기 전에 완성되었다. 게다가 홍만종이 평론하고 취사선택한 정밀함은 아무래도 남용익이 구분 없이 넓게만 수록한 것보다 낫다. 독자가 이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라는 필사기가 달려 있는데 『소화시평』이 시애호가에게 왜 그렇게 인기리에 읽혔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보다 간편하고 정밀한 선집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처럼 『소화시평』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기 저술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소화시평』이 어떻게 작품을 제시하고 품평하는지 비평방법을 살펴본다. 먼저 언급할 점은 특정한 작가의 작품을 간명하고 인상적으로 읽도록 구사한 방법인데 대략 다음과 같은 틀을 사용하였다.
(1) 시인을 소개하는 도입부
(2) 제목을 설명하거나 창작동기를 소개하는 대목
(3) 시의 본문 인용
(4) 시에 대한 편찬자의 평가
(5) 작품이나 작가에 얽힌 일화 또는 강평
작품에 따라 변화가 적지 않으나 이 틀을 뼈대로 삼아 가감하였다. 시 본문을 중심에 놓고 앞뒤에 들어가는 소개의 글이나 작품 품평은 군더더기 설명이 없이 명쾌하고 간결하다. 작품을 충실히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서술한 것이다.
이 틀을 유지하면서 홍만종은 즐겨 비슷한 제재나 주제를 가진 다른 작품 또는 작가를 병렬하여 배치하였다. 이것은 서로 다른 작가나 작품을 병렬하는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대비를 거쳐 각 작가 또는 작품의 우열이나 개성, 창작경향을 명료하게 파악하도록 유도하고, 시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제재나 주제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실례로 상권 37칙에서 핍진한 경물묘사의 사례로 이진과 양경우의 시를 비교한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시는 핍진(逼眞)한 묘사를 귀하게 여긴다.
동암(東菴) 이진(李瑱)이 다음 시를 썼다. “허공 가득한 푸른 산빛 옷에 물들고 / 풀이 푸른 연못가에 백조가 난다. / 지난 밤 안개가 자고 간 깊은 산 나무만 남아 / 낮바람에 후득후득 빗줄기를 뿌린다.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는 다음 시를 지었다. “탱자꽃 피어 있는 낮은 사림 걸어 닫고 / 논두렁 밥 내가는 촌 아낙네 걸음도 늦다. / 멍석에 낟알 말리는 호젓한 처마 밑에선 / 병아리 짝지어 무너진 울타리 틈새로 나온다.”
이진은 산집의 경치를 묘사해내되 격조가 높고, 양경우는 전가(田家)의 현장 풍경을 묘사해내되 시어가 오묘하다.
詩貴逼眞.
李東菴瑱詩曰: ‘滿空山翠滴人衣, 草綠池塘白鳥飛. 宿霧夜棲深樹在, 午風吹作雨霏霏.’
梁霽湖慶遇詩曰: ‘枳殼花邊掩短扉, 餉田邨婦到來遲. 蒲茵晒穀茅檐靜 兩兩鷄孫出壞籬.’
李模出山家景致而格高, 梁寫出田家卽事而語妙.
두 시인이 경물을 핍진하게 묘사한 시를 함께 놓고서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비교해보도록 안배하였다. 상권에서 찾아보면, 26칙에서 번안법(飜案法)을 구사한 김극기와 성간의 시를 병렬한 것이나 58칙에서 사육신의 시를 병렬한 것, 59칙에서 신숙주 집안의 시 4편을 든 것, 64칙에서 장난기가 있는 시를 열거한 것, 82칙에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지은 시, 99칙에서 도를 체현한 성혼과 권필의 시를 제시한 것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시를 감상하도록 작가와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통시적으로 작가를 나열한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더욱이 앞의 표에서 제시한 것처럼 고려조의 아름다운 연구를 대거 열거하거나 (상권 48칙) 역대 칠언율시의 경련(상권 83칙)을 다수 제시하고 표절의 혐의가 있는 시만을 따로 모아놓은(하권 33칙) 따위의 방법을 써서 작가별 소개를 벗어나 다채로운 감상으로 안내하였다.

5. 비평가의 세 가지 자격
홍만종은 십대 시절부터 시학에 관심을 갖고 오래도록 공부하여 안목을 키웠노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만큼 비평에 남다른 열정과 전문성을 갖추었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지은 첫 번째 저술부터 전문 비평가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을 논하고 있다. 비평가의 자격으로 그가 내세운 조건을 간추려 살펴보면 대략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시를 정밀하게 읽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독서가 그 기초이다. 『순오지』에는 그가 파악한 문집 목록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가 수집하고자 한 문헌의 방대한 수량을 보여주고 있다. 『소화시평』 서문에서 “위로는 태사(太師, 기자箕子)로부터 아래로는 최근의 시에 이르기까지 무릇 우리나라에서 시라고 칭해지는 것이면 널리 구하고 광범위하게 모았다. 이를 시장에서 사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빌리는 일을 많은 세월에 걸쳐 하고 보니 책이 모두 내 서가의 물건이 되었다[上自太師, 下逮近時, 凡吾東方所稱詩者, 無不博求而廣裒, 購之市, 借之人, 如是者積歲月, 而悉爲吾架上有矣.]”라고 밝힌 것처럼 비평의 기초로서 문헌의 확보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두 번째로는 시의 텍스트를 엄밀하게 고증하는 문제를 중시하였다. 그는 텍스트 비평의 충실한 기초 위에서 작품을 비평하는 자세를 강조하였다. 실제로 대체로 신뢰할 만한 텍스트를 제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소화시평」에는 작자를 잘못 제시하거나 작품을 수록한 근거를 찾기 힘든 사례들이 얼마간 나오지만, 그렇다 해도 고증과 교감을 치밀하게 하려 한 자세를 인정할 만하다.
세 번째로 비평가에게 높은 수준의 안목과 엄정한 태도를 요구하였다. 그는 문장을 다루는 일은 직업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것이라서 “마음이 거칠고 덤벙대는 사람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蓋非麤心大膽之所可易言].” (『시화총림」, 「증정」 제9칙)라 말하고, 『순오지』에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식견(識見)과 학력(學力)과 공정(功程)의 세 가지 자격을 제시하였다.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식견을 가질 수 없고, 옛것에 해박하지 않으면 학력을 얻을 수 없으며, 부단히 익히지 않으면 공정을 지닐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이 세 가지 자격을 갖추지 않고서는 깊이 있는 비평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평의 어려움과 비평가의 위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홍만종은 전문 비평가로서 능력을 『소화시평』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었고, 그 뒤 2종의 후속작에도 함께 발휘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소화시평』 이래로 자신의 비평서에 시화(詩話)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시평(詩評)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명칭은 우연한 작명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시화가 시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뜻한다면, 시평은 시를 미적으로 평가하는 비평가의 비평적 성찰이 담긴 저술을 표방한다. 시평은 틀림없이 시화의 일부이지만 시평이라 표방한 것은 평가한다는 비평 행위에 큰 가치를 부여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개념이다. 그는 그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서 자신을 전문적 비평가로 규정하여 조선 한시에 대한 비평적 성찰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한가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資閒談] 시화나 창작의 지침서 구실을 하는 시화가 일반화된 현실과 의도적으로 차별화한 것이다. 그처럼 그의 시평 3부작은 한시의 역사적 이해를 기초로 하여 엄격한 비평적 행위가 가해진 저술이다.

6. 품평 언어
비평가로서 자의식이 강한 홍만종이 시비평의 언어와 문법으로 채택한 것은 품격비평(品格批評)이었다. 작가와 작품이 건네는 독특한 인상과 품격을 한 글자에서 몇 글자의 품평용어로 제시하는 방법이다. 이 품격비평은 고려 중엽의 『파한집』이래 면면히 이어져왔지만 홍만종에 이르러 그 극점에 이르렀다.
『소화시평』에서는 다음과 같은 품평의 언어들을 조합하여 작품을 비평하고 있다. 이를 도표로 제시한다.
| 簡 | 간단하다 | 感 | 느꺼워하다 |
| 慨 | 개탄하다 | 健 | 굳세다 |
| 傑 | 웅걸하다 | 激 | 분노하다 |
| 潔 | 깨끗하다 | 勁 | 날카롭다 |
| 警 | 놀랍다 | 古 | 예스럽다 |
| 孤 | 외롭다 | 曲 | 곡절이 있다 |
| 工 | 공교하다 | 曠 | 툭 트이다 |
| 宏 | 굉장하다 | 巧 | 바르다 |
| 崛 | 우뚝하다 | 窮 | 궁색하다 |
| 詭 | 궤벽하다 | 近 | 친근하다 |
| 濃 | 농후하다 | 穠 | 짙다 |
| 淡 | 담박하다 | 到 | 알맞다 |
| 朗 | 명랑하다 | 亮 | 밝다 |
| 凉 | 처량하다 | 麗 | 아름답다 |
| 厲 | 사납다 | 烈 | 매섭다 |
| 老 | 노련하다 | 鹵 | 서툴다 |
| 累 | 얽매이다 | 流 | 야들야들하다 |
| 瀏 | 매끄럽다 | 俚 | 상스럽다 |
| 邁 | 호매하다 | 明 | 밝다 |
| 妙 | 오묘하다 | 靡 | 화사하다 |
| 密 | 밀도 있다 | 朴 | 질박하다 |
| 拔 | 특출나다 | 發 | 발랄하다 |
| 放 | 자유롭다 | 僻 | 궁벽하다 |
| 富 | 부유하다 | 浮 | 들뜨다 |
| 奔 | 내달리다 | 悲 | 구슬프다 |
| 鄙 | 비루하다 | 肆 | 거침없다 |
| 澁 | 껄끄럽다 | 爽 | 상쾌하다 |
| 生 | 생경하다 | 纖 | 섬세하다 |
| 贍 | 넉넉하다 | 成 | 갖추다 |
| 邵 | 멋지다 | 䟽 | 소탈하다 / 소략하다 |
| 秀 | 훌륭하다 | 脩 | 아리땁다 |
| 熟 | 숙련되다 | 馴 | 순조롭다 |
| 新 | 새롭다 | 神 | 신비하다 |
| 實 | 실답다 | 深 | 깊다 |
| 雅 | 아담하다 | 昻 | 들떠 있다 |
| 冶 | 세련되다 | 弱 | 허약하다 |
| 嚴 | 근엄하다 | 易 | 쉽다 |
| 淵 | 깊숙하다 | 艶 | 곱다 |
| 醞 | 따뜻하다 | 婉 | 은근하다 |
| 惋 | 답답하다 / 억울하다 / 한탄하다 | 雄 | 웅장하다 |
| 圓 | 둥글다 / 원만하다 | 遠 | 원대하다 |
| 越 | 뛰어넘다 / 넘치다 | 偉 | 헌걸차다 |
| 萎 | 시들다 | 幽 | 그윽하다 |
| 裕 | 여유롭다 | 融 | 무르녹다 |
| 逸 | 빼어나다 | 藉 | 너그럽다 |
| 壯 | 너그럽다 | 長 | 유장하다 |
| 典 | 전아하다 | 轉 | 잘 선회하다 / 전환하다 |
| 切 | 절실하다 | 截 | 끊기다 |
| 絶 | 독특하다 | 正 | 똑바르다 |
| 精 | 정밀하다 | 粗 | 거칠다 |
| 藻 | 문채가 있다 | 縱 | 멋대로 하다 |
| 遒 | 씩씩하다 | 俊 | 준수하다 |
| 峻 | 험준하다 | 重 | 무겁다 |
| 暢 | 시원하다 / 鬯과 같다 | 蒼 | 서늘하다 / 낡다 |
| 悽 | 처절하다 | 淺 | 얕다 |
| 徹 | 꿰뚫다 | 淸 | 맑다, 말쑥하다 |
| 招 | 뛰어나다 | 楚 | 청초하다, 조촐하다 |
| 峭 | 가파르다 | 沖 | 부드럽다 |
| 侈 | 풍성하다 | 緻 | 치밀하다 |
| 則 | 법도가 있다 | 沈 | 웅숭깊다 |
| 踔 | 늠름하다 | 脫 | 매인 데 없다 |
| 蕩 | 호탕하다 | 透 | 후련하다 |
| 平 | 평탄하다 | 寒 | 한미하다 / 쓸쓸하다 |
| 悍 | 사납다 | 汗 | 왕성하다 |
| 閒 | 어여쁘다 / 한가하다 | 伉 | 도도하다 |
| 虛 | 허허롭다 | 險 | 험벽하다 |
| 浩 | 드넓다 | 豪 | 호쾌하다 / 호방하다 |
| 渾 | 혼연하다 | 和 | 조화롭다 |
| 闊 | 활달하다 | 橫 | 횡행하다 |
| 厚 | 도탑다 | 纈 | 현란하다 |
도표에 보인 한자들이 품평용어로 널리 쓰였다. 여기에서는 『소화시평』에 사용된 것만을 제시하였는데 그 한자에 상응하는 우리말 품평용어를 보임으로써 품평용어의 표준번역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는 위 표에 보인 우리말 품평용어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는데 다른 시화의 번역에서도 통일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낱글자들은 ‘맑고 새롭다[淸新]’거나 ‘씩씩하고 굳세다[遒健]’처럼 대부분 두 글자로 조합하여 쓰이지만 ‘기이하고 예스럽고 가파르고 빼어나다[奇古峭拔]’처럼 네 글자로 쓰일 때도 간혹 있다. 이렇게 사용되는 품평용어는 작가나 작품이 독자에게 각인시킨 인상적 이미지나 감성적 판단을 두 글자 아니면 네 글자로 평가한 것이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분석과 이해, 감상과 음미의 과정을 거친 뒤에 종합적으로 비평가의 마음에 형성된 이미지를 감성적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 언어를 통해 작가나 작품이 지닌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여 그중 높은 수준의 작품을 독자에게 제시하였다. 홍만종은 이 품평의 언어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재단(裁斷)하려 하였다.
이 같은 품격비평은 상징적 수법까지 사용하는 품평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구체적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적 이야기나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의 인상을 독자에게 한층 선명하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여(如)’자를 사용하여 직유(直喩)의 기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기에 ‘여자비평(如字批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상권 83칙과 하권 31칙, 41칙, 73칙 등에서 실제로 활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시인 20명의 칠언율시 경련을 두루 품평한 상권 83칙이 대표적이다.
그중 유몽인의 시구 “울긋불긋한 검은 뱀이 길가에 똬리 틀고 있고 / 오똑하게 누런 곰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네[斑爛烏虺蟠道側, 傲兀黃熊坐樹巓].”를 두고 홍만종은 “기이하고 괴상하며 그윽하고 험벽하여 마치 비천야차(飛天夜叉)가 범과 표범을 낚아채 잡아먹는 것과 같다[奇怪幽險, 如飛天夜叉, 攫食虎豹]”라고 품평하였다. 앞에서는 네 글자의 품평용어를 사용하여 평가하고, 이어서 비천야차(飛天夜叉)의 형상을 동원하여 시의 인상을 구체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평 자체가 시적이고, 비유적 평가를 통해 시가 주는 인상과 감성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과 시에 관한 일화가 일반 시화의 주축을 이룬다면 『소화시평』은 그런 것들과 구별되는 비평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비평의 방법이 홍만종이 만든 독자적 창작품은 결코 아니다. 선배들이 해온 다양한 비평방법과 비평의 실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품평에 집중했을 뿐이다. 작가나 작품을 선택할 때도 시평을 전개할 때도 역대 비평가들이 사용했던 방법과 주제를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비평 세계로 끌어들였다. 비평의 실제에서도 선배 비평가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수용한 품평의 실상은 책에서 주석으로 밝혀놓았다.

7. 사본의 문제점
『소화시평』은 저자가 33세 때인 1675년에 저술되었다. 그로부터 30년쯤 지난 무렵 임경((任璟)은 “『소화시평』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고 많은 문사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감상되고 있다”라고 밝혔는데 당시부터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책 한 권으로 조선 한시문학의 큰 줄거리를 손쉽게 가늠하고 주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미덕 덕분이다. 인기는 20세기 전반까지 식지 않아 일종의 스테디셀러처럼 독자들에게 환영받았다.
인기는 무엇보다 필사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웬만한 고서수집가는 이 책의 필사본을 몇 종씩 소장하고 있을 만큼 흔한 책이었다. 불행히도 간행되지는 않았으나 근대 이전까지 독서인의 서가에 두루 얹혀 있는 책의 하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의 수량을 다 헤아리기 어려우나 아무리 적어도 백 종은 충분히 상회하리라고 본다. 일삼아 그 수량을 헤아릴 필요가 없을 수준이다. 독자들의 호응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높은 저술이 간행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나 조선 후기에는 그런 저작이 한둘이 아니다.
이 책의 큰 인기와 넓은 활용 양상은 지성인들이 이 책을 직접 필사하거나 제자들에게 필사를 독려한 실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다산은 아들과 제자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문학을 학습하도록 독려하며 주요 목록을 작성하고 그 책을 초록하는 공부법을 제시하였는데 문학 분야에서는 『소화시평』을 그 목록에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역사와 문학을 배우는 일종의 교과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다산의 강진 제자들이 필사한 『소화시평』이 지금껏 전해오는데 1823년 윤종진(尹鍾軫)이 필사한 책이 그의 ‘순암총서(淳菴叢書)’에 포함되어 있고, 다산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시인 황상(黃裳)의 아우이기도 한 황경(黃褧)이 1804년에 필사한 책이 전하고 있다.
『소화시평』은 이렇게 사본의 수량이 많고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필사되었다. 그 때문에 정확한 정본을 확정하는 문제가 대두하는 데 현재까지 저자 친필본도 발견되지 않았고, 정본으로 확정하기에 적합한 사본도 뚜렷하지 않다. 많은 사본을 검토해보면, 평이 빠지고 시만을 수록한 것, 시체별(詩體別)로 재편집한 것, 내용 일부가 누락되거나 추가된 것, 상권·하권이 분리되지 않고 단권으로 편집된 것 등 원본에서 크게 벗어났거나 의도적으로 바꾼 사본도 제법 많다. 본문의 세부 내용을 검토하면 사본마다 차이는 더욱 커서 분단의 착오나 오자, 어구나 글자의 탈락 및 첨가, 글자의 상이함 등등 필사본이 갖기 쉬운 온갖 문제점을 상당히 복잡하게 드러낸다. 주요 사본을 두루 조사해본 결과, 현존하는 사본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정확한 텍스트가 없다고 결론지어도 좋을 수준이다.
이것은 300여 년 동안 필사에 필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수정과 오류가 쌓여 나타난 현상이다. 19세기 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본 끝에 “이 사본은 필사로 전해져 온 까닭에 와전(訛傳)에 와전을 거듭하여 그 사이에 글자의 오류가 많아 개탄스럽다. 분명하게 잘못된 곳은 망령되이 바로잡되, 의문이 들지만 질정하기 어려운 곳은 옛것 그대로 베껴 옮겨서 의심스러운 것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는 의리를 지킨다”(임형택 교수 소장 사본)라고 밝힌 것처럼 많은 필사자들은 전해오는 사본의 문제점을 인식하였고, 저마다 일정하게 교감과 수정을 가했다. 현재 전하는 사본 대부분은 어느 것이나 그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8. 텍스트 비평과 번역
내가 첫 번역을 할 때 교감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여러 사본을 놓고 교감하긴 했으나 철저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그 뒤로 입수한 많은 사본까지 포함하여 선본을 골라 본격적으로 교감하여 정본을 확정하고자 하였다. 전체 사본을 비교하여 교감하는 것은 일이 벅차기도 하고 사본마다 편차가 너무 심하여 일일이 교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의미의 차이를 가져오는 어구의 교감을 위주로 꼭 필요한 것을 빼놓고는 주석을 달지 않고 나의 안목에 따라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방향과 글자와 문단을 선택하여 정본을 만들었다. 역자가 선본이라고 판단하여 교감에 활용한 사본은 다음과 같다.
(1) 국립본1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b23641-6-1)
(2) 국립본2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BC古朝45-가 117)
(3) 연세대본1 : 연세대 중앙도서관 소장(811.9109.4)
(4) 연세대본2 : 연세대 중앙도서관 소장(정씨문고), 『대교역주 소화시평』(1993)에 영인됨
(5) 서강대본 : 서강대 로욜라도서관 소장(고서 소 96)
(6) 가람본 : 서울대 규장각 소장(가람古 811.09-H758s)
(7) 버클리본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41.7)
(8) 통문관본 : 구 통문관 소장, 이존서 필사, 『홍만종전집』(태학사, 1986)에 영인됨
(9) 역자본1 : 역자 소장, 국립본1과 매우 유사함
(10) 퇴호본(退湖本) : 역자소장, 퇴호가 쓴 ‘소화시평서’가 끝에 실려 있음
이 중에서 (1)과 (5)와 (6)과 (9)는 계통이 같은 사본으로 원본에 가장 가깝고 선본이라 판단한다. 또 (4)와 (8)이 유사한 사본이다. 이 밖에도 선본이 적지 않고 참고하기는 했으나 일일이 밝히지 않는다.
역자는 『소화시평』을 비평사에 빛나는 기념비적 저술이라 생각하여 1993년에 처음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개정판을 출간하였는데 그마저도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오래전에 번역한 책을 들춰볼 때마다 아쉬움이 컸으나 본격적인 개정판의 출간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개정하는 작업을 마무리하여 출간한다.
두 번째 개정판을 내면서 주석을 최소한으로 줄여 작품 감상과 이해에 집중하도록 하고, 번역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구사하며, 원문의 정확한 정본을 확립하는 데 주력한다는 큰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첫 번째 책에 비해 원문을 어떤 사본보다 정확하게 제시하였고, 주석이 3분의 1 아래로 줄어들었으며, 문장은 간결해졌고, 번역과 주석의 수정 보완이 상당히 크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충분히 개선되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을 텐데 수정할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소화시평』의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시평보유』를 번역하는 세미나를 성균관대 한문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중이다. 오래도록 마음의 짐으로 남겨두었던 일인데 한두 해 뒤에는 홍만종의 비평 3부작의 또 다른 하나를 세상의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6월, 퇴계인문관 연구실에서
안대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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