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아(箕雅)』와 절충론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시선집(詩選集)이라면,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찬집(撰集)한 『기아(箕雅)』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이후 조선후기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시선집(詩選集)이다. 임병양란(任丙兩亂)의 실의(失意) 이후 깊은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 들어간 소단(騷壇)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숙종(肅宗) 연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시대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숙종(肅宗)ㆍ영조(英祖) 연간에 가열된 당론(黨論)으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詩業)이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후기 사단(詞壇)의 현실에서 볼 때 『기아(箕雅)』의 출현은 조선후기 소단(騷壇)의 중간 보고 이상으로 시사적(詩史的)인 의미는 값진 것이다.
그리고 찬자(撰者)인 남용익(南龍翼)은 시(詩)로써 세상에 이름을 울린 詩人은 아니었지만 그가 저작한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가장 다양한 시품(詩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아(箕雅)』의 자료적 의미 역시 스스로 막중한 것이 된다.
그러나 『기아(箕雅)』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편집정신이다. 역대의 중요 시선집(詩選集)을 두루 섭렵하여, 넘치는 것은 깎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어 상호보완하고 절충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기아(箕雅)』는 형식상으로는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지만, 간행 당시(當時)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문형(文衡)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채시(採詩) 작업 자체를 문형(文衡)의 임무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기아(箕雅)』는 단순히 개인에 의하여 이룩된 사찬(私撰) 선발책자(選拔冊子) 이상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기아(箕雅)』는 신라말의 최치원(崔致遠)과 최승우(崔承祐)에서부터 조선조 숙종대(肅宗代)의 김석주(金錫冑)ㆍ신정(申晸) 등에 이르기까지 497가(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숙종(肅宗) 14년(1688)에 운각(芸閣)의 필서체자(筆書體字)로 인행(印行)한 14권(卷) 7책(冊)이다. 그리고 이 운각필서체자(芸閣筆書體字)는 『기아(箕雅)』를 인쇄(印刷)할 때 처음 사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서문 및 『호곡집(壺谷集)』의 「무자제석만기(戊子除夕謾記)」에 ‘운각주자시용인포(芸閣鑄字始用印布)’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활자(活字)가 『기아(箕雅)』를 인행(印行)할 때 처음 사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편성함에 있어 그 기본 자료가 된 것은 『동문선(東文選)』ㆍ『청구풍아(靑丘風雅)』ㆍ『국조시산(國朝詩刪)』 등이다. 그러나 『동문선(東文選)』은 ‘널리 취하였지만 정선(精選)하지 아니하였다[博而不精]’하고 續編은 소재(所載)가 무다(無多)하며,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정선(精選)하였지만 널리 취하지 않았다[精而不博]’하고 그 속편은 소취(所取)가 불명(不明)하며,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자못 상핵(詳核)한 것이기는 하나 조선초기에서부터 선조대(宣祖代)에 한한 것이므로 수미(首尾)가 완비되지 않은 흠이 있어, 삼선중(三選中)에서 번다(繁多)한 것은 깎고 소략(疏略)한 것은 보태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 이후의 것은 명가(名家)의 시문집중(詩文集中)에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을 취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편자 자신이 직접 취재(取材)한 것은 인조대(仁祖代)에서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는 70여년간의 것이다. 편제(編制)는 『당시품휘(唐詩品彙)』의 예에 따라 우사(羽士)ㆍ납자(衲子)ㆍ규수(閨秀)ㆍ잡류(雜類)ㆍ무명씨(無名氏)의 작품은 각체시(各體詩)의 말미(末尾)에 부재(附載)하였으며 불성씨(不姓氏) 3인(人)을 권미(卷尾)에 부록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모역(謀逆)의 혐의로 피주(被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만 쓰고 성은 붙이지 않는 것이다. 허균(許筠)도 물론 여기에 든다.
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詩)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詩)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色)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격조(格調)ㆍ정경(情境)ㆍ체제(體制)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곧 고려중기부터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던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당(學唐)으로 경도(傾倒)하게 된 시사(詩史)의 의미를 사실대로 간취(看取)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면 이 책에서 남용익(南龍翼)은 찬자(撰者)의 취향이나 편집(偏執)에 사로잡히기 쉬운 선시사(選詩者)이기보다는 시대의 풍상(風尙)과 시가(詩家)의 소장(所長)을 사실 그대로 인정한 편집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시문집(詩文集)인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제작되었으며,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허균(許筠)이 또한 『성수시화(惺叟詩話)』와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라는 사실에서 보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한 남용익(南龍翼)의 시학(詩學)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저작한 『호곡만필(壺谷漫筆)』 권3에 수록된 시화(詩話) 부분을 따로 뽑아 부르고 있는 『호곡시화(壺谷詩話)』는 우리나라 역대의 시가(詩家) 비평에 있어 가장 다양한 시품(詩品)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문집 15권(卷)은 대부분이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특히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에 있어서는 수십(數十), 수백(數百)을 일필(一筆)에 구사하는 장편(長篇)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아(箕雅)』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배율(排律)이나 고체(古體)는 세전(世傳)하는 시선집(詩選集) 중에서 선발(選拔)하고 있을 뿐, 증선(增選)하는 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기아(箕雅)』의 찬집(撰輯) 의도가 처음부터 편집자로서의 임무수행에 주안(主眼)이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남용익(南龍翼)은 소년(少年) 등제(登第)하여 40년 동안 관로(官路)에 있으면서 문형(文衡)의 영관(榮官)에까지 올랐지만, 그러나 공여(公餘)에는 항상 시주(詩酒)를 즐겼을 뿐, 요로(要路)와의 절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대제학(大提學)의 현직(現職)에 있으면서 『기아(箕雅)』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체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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