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
고려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하였지마는 충렬왕(忠烈王) 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유학(基本儒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유교(文學儒敎)로 일관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일찍이, 당시의 유사(儒士)들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만 익히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한 자가 없는 것을 개탄하여, 일경일사(一經一史)에 통한 사람을 국자감(國子監)에 교수(敎授)케 하라고 한 사실을 보면 이때까지도 국자감(國子監)에 경사(經史)에 통한 교수(敎授)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30년에 안향(安珦)이 양현고(養賢庫)가 탄갈(彈渴)하여 선비를 기를 수 없는 것을 걱정하여, 육품(六品)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는 은(銀) 일근(一斤)을 내고 칠품(七品) 이하는 각각 포(布)를 내어 보조하자고 제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학교(學校)가 얼마나 쇠퇴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시에 선명하게 보인다【이 시는 중국사신(中國使臣) 장모(張某)의 작(作)이라고도 한다】.
香燈處處皆祈佛 | 향등(香燈) 켠 곳곳마다 불공 드리고 |
簫鼓家家競賽神 | 퉁소 불고 북치는 집에 치성 드리느라 법석이네. |
獨有數間夫子廟 | 호올로 두어칸 공부자묘(孔夫子廟)가 있건마는 |
滿庭秋草寂無人 | 왼 뜰에 가을풀 뿐 사람이 없네. |
안향(安珦)은 만년(晚年)에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걸어두고 군모(軍慕)하는 뜻을 표하고, 호(號)도 주자(朱子)의 호(號) 회암(晦庵)을 본떠 회헌(晦軒)이라 하였다. 주자(朱子)가 죽은 뒤 불과 40년에 안향(安珦)이 났으므로 시대의 거리도 멀지 않았지만, 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주자(朱子)를 숭모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충렬왕(忠烈王) 15년(1289)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주자서(朱子書)를 초(抄)하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象)을 그려가지고 돌아왔으며,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두번째 원(元)나라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서 문묘(文廟)를 배알(拜謁)하고 성리설(性理說)을 변론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충선왕(忠宣王) 때까지는 정주(程朱)의 학(學)이 중국에서 처음 행하여졌으므로 동방(東方)에는 아직 미치지 아니하였다.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이를 배워 돌아오게 되자 이제현(李齊賢)ㆍ박충좌(朴忠佐)가 가장 먼저 배우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우탁전(禹倬傳)」에 의하면, 탁(倬)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더욱 역학(易學)에 깊었다고 한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이 처음으로 동방에 들어 왔을 때 이에 대하여 아는 이가 없었는데, 탁(倬)이 문을 닫고 연구하여 월여(月餘)만에 해득하여 생도(生徒)에게 교수(敎授)함으로써 이학(理學)이 비로소 행하여졌다고 적고 있다. 정씨(程氏)의 역전(易傳)은 송유이학(宋儒理學)의 정수(精髓)다. 때문에 역전(易傳)은 역학(易學)을 동방에 전하였다는 뜻으로 탁(倬)의 별호(別號)가 된 것이다.
또 「권부전(權溥傳)」에 따르면 권부(權溥)는 독서하기를 즐겨하여 늙도록 이를 폐하지 않았으며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간행하였으므로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은 부(溥)에게서 창시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역대(歷代)의 효자 64인의 사적을 모아서 그의 사위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찬(贊)을 짓게 하고 이를 효행록(孝行錄)이라 이름하여 세상에 행하게 하였다. 권근(權近)은 그의 현손(玄孫)이다.
이로써 보면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은 송유(宋儒)의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한 선구자이며 안향(安珦)보다는 후배지만 안향(安珦)의 생전에 서로 만나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정주학(程朱學)은 수인(數人)의 유자(儒子)에게 처음으로 전수되었을 뿐 이때까지도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사정을 가장 적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櫟翁稗說)』 전집(前集)에 나타난 다음 문답에서 볼 수 있다.
덕릉(德陵, 忠宣王)이 제현(齊賢)에게 묻기를 우리나라가 옛적에는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고 칭하였는데 지금 학도(學徒)들이 중[僧]을 따라 글을 배우니 시문(詩文)이나 짓는 무리가 많고 경(經)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아주 적은 것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와 같이 물었을 때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옛적에 태조(太祖)가 초창기에 있어서도 먼저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였고 한번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하여 드디어 수재(秀才) 정악(廷鶚)으로써 박사(博士)를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生徒)를 교수(敎授)하게 하여 채백(綵帛)을 주어서 권장하고 곡식을 내려서 먹게 하였으니 간절히 마음을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묘(光廟, 光宗)의 뒤에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서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벌여 세우고 촌락에 학당(學堂)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리어 사유(師儒)와 제자가 훈도(薰陶)되어 따라서 일어나니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히 의종(懿宗)의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이 일어나서 옥과 돌이 함께 탔[焚]으므로 겨우 몸을 빼쳐 살아난 자는 깊은 산중에 도망하여 중의 의복을 입고 여년(餘年)을 마치었으니 신준(神俊)ㆍ오생(悟生)의 무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에 국가에서 점차 문치(文治)를 회복하매 사자(士子)들이 비록 공부하기를 원하는 뜻이 있으나 배울 곳이 없으므로 멀리 산중에 숨어 중의 의복을 입은 이들을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신준(神俊)이 그에게 배운 사람이 과거 보러 가는 데에 전송하면서 지은 시에 “信陵公子統精兵 遠赴邯鄲立大名 天下英雄皆法從 可憐揮淚老侯嬴”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학도(學徒)들이 중들에게 가서 글을 배우는 것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학교를 넓히고 교육에 힘쓰시어 문예(文藝)를 높이고 오륜(五倫)을 밝혀서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신다면 어느 누가 참다운 유학자(儒學者)를 버리고 중들을 따르며 실학을 버리고 장구(章句)나 익히겠습니까? 이제까지 시문(詩文)이나 힘쓰던 무리들이 모두 장차 경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학문 풍토를 단적으로 적시(摘示)한 것이기도 하지만 장래(將來)할 여조유학(麗朝儒學)의 일대변혁을 예료적(豫料的)으로 진술할 발언이 될 수도 있다.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겪은 후에 학교(學校)가 폐이(廢弛)하게 되자 공민왕(恭愍王)은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여 흥학(興學)의 의지를 보인다. 이때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은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 강론(講論)한 것은 정자(程子)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였다.
이색(李穡)은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여 불법(佛法)을 믿어서 사람들의 비평을 받았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술하고 있지만 그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정주학(程朱學)만을 강설(講說)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정몽주(鄭夢周)를 칭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그의 문인(文人)인 박상충(朴尙衷)ㆍ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이 모두 그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당시의 교관(敎官) 중에는 정몽주(鄭夢周)가 가장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있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사서(四書)의 주자집주(朱子集注)를 강의할 때에 사람들의 의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어 듣는 이들이 의심하였는데 호병문(胡炳文)이 지은 『사서통(四書通)』이 중국에서 나오자 정몽주(鄭夢周)의 의견과 부합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색(李穡)은 정몽주(鄭夢周)가 리(理)를 논하는 것은 횡설(橫說)이나 수설(竪說)이라도 리(理)에 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 더구나 그에게는 기울어지는 고려의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씨(李氏)에게 피살된 정충대절(精忠大節)이 있을 뿐 아니라 명(明)나라를 높이고 중화(中華)의 제도를 쓰자고 먼저 주장한 사람이므로 후세의 유학자(儒學者)들이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보았다.
그는 저술이 거의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고 의심한 이(鄭逑ㆍ李植 등)도 있었으나 의연히 이학(理學)의 조(祖)로서 추숭을 받았다. 그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워 궁리치지(窮理致知), 반궁천실(反躬踐實)하여 혼자 염락부전(廉洛不傳)의 비법을 얻었다든가(成傳林, 「圃隱行狀」). 염락(濂洛)의 도(道)를 부르짖고 불로(佛老)의 틈을 배척하며 강론(講論)이 정묘(精妙)하며【『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 주자(朱子)를 종(宗)으로 삼아 후학으로 하여금 주경입본(主敬立本), 궁리치지(窮理致知)를 알게 했다【송시열(宋時烈)의 「신도비명(神道碑銘)」】는 후대의 평가가 이를 사실로써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고려말의 신유학(新儒學)은 안향(安珦)으로부터 비롯하여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이 배출되고, 백이정(白頤正)의 (學)은 그를 정점으로 하여 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ㆍ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 등을 거쳐 문벌관료층으로 이어지지만 한편 정몽주(鄭夢周)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절의파(節義派)의 성리학(性理學)은 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ㆍ김종직(金宗直)ㆍ정여창(鄭汝昌)ㆍ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는 연원(淵源) 계보(系譜)가 작성되고 있다.
고려말 이전까지만 해도 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 사상과 같은 것이 표준이 된 일은 없다. 그러나 고려말에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됨에 따라 문학의 본질이 문학의 내질에서 변별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학외적인 사상적 표준에 의하여 논의되는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문학관념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 문학을 한갓 도(道)의 표현수단으로 생각하는 ‘문이관도(文以貫道)’나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전통적인 문학관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이룩한 이 방면의 연구성과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대부분이 문학의 내질에 관한 문제, 특히 시론(詩論)과 같은 것에 편중함으로써 사실상 문학이론 위에 군림하여 문학이론 자체를 규제해 온 문학관의 구실에 대하여 해명하는 과정을 구하는 노력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관념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文學)’의 자의와 그 내용의 함의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덕행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요, 언어엔 재아와 자공이요, 정치엔 염유와 계로요, 문학엔 자유와 자하가 있다.
德行: 顔淵ㆍ閔子騫ㆍ冉伯牛ㆍ仲弓. 言語: 宰我ㆍ子貢. 政事: 冉有ㆍ季路. 文學: 子游ㆍ子夏
이른바 십철(十哲)을 그 소장(所長)에 따라 사과(四科)로 나눈 가운데서 문학(文學)엔 자유(子游)ㆍ자하(子夏)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문학이라고 한 것은 물론 문학비평의 대상으로서의 순문학(純文學) 그것이 아니고 문장(文章)과 박학(博學)의 이의(二義)를 겸유(兼有)하고 있는 광막무은(廣漠無垠)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일체의 서적(書籍)과 일체의 학문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진(周秦)시대에 있어서의 문학의 개념에 대해서는 청말(淸末)의 학자인 증국번(曾國審)이 유학(儒學) 사상을 분류, 개관한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다. 증국번(曾國審)은 위학지술(爲學之術)의 기원을 공문사과(孔門四科)에 두고, 유학(儒學)사상을 다음과 같이 사개부문(四個部門)으로 분류한 바 있다.
① 의리(義理) | ② 고거(考據) |
공문(孔門) ‘덕행德行)’의 과(科) | 공문(孔門)의 ‘문학(文學)’의 과(科) |
오늘날의 송학(宋學) | 오늘날의 한학(漢學) |
주돈이(周敦頤)ㆍ이정(二程) 형제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 | 허신(許愼)ㆍ정현(鄭玄)ㆍ고염무(顧炎武)ㆍ요내(姚鼐) 등 |
③ 사장(詞章) | ④ 경제(經濟) |
공문(孔門)의 ‘언어(言語)’의 과(科) | 공문(孔門)의 ‘덕행(德行)’으로 정사(政事)를 겸한 것 |
종고(從古)의 예문(藝文)과 금세(今世)의 제(制)ㆍ의(義)ㆍ시(詩)ㆍ부(賦) | 전대(前代)의 전례(典禮)ㆍ정서(政書)와 당세(當世)의 장고(掌故) |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修)ㆍ曾聲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소식(蘇軾)ㆍ黃庭堅 등 | 제갈량(諸葛亮)ㆍ육지(陸贄)ㆍ범중엄(范仲淹)ㆍ사마광(司馬光) 등 |
여기서는 공문(孔門)에서 이르는 문학은 고거지학(考據之學) 또는 경학(經學)에 가까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공자(孔子)의 문학관의 일단을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공자(孔子)가 문(文)을 숭상한 것은 도처에 유로(流露)되고 있는 사실이지마는 공자(孔子)에 있어서의 ‘문(文)’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경향에 다분히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자공이 “공문자는 어째서 문(文)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니, 공자께서 “민첩하고 배우길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文)이라 일컬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공문(孔門)에서의 문학은 비록 도(道)를 소외하고 문(文)을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학(學)이 모두 인륜(人倫)을 밝힌 것이므로 고인(古人)의 이른바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겠다는 것이다. 공문(孔門)의 문학은 곧 삼대(三代)의 학(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어서 이 또한 다분히 학술적인 의의로 파악한 것이며 부화(浮華)한 수식만을 일삼던 한 대(漢代) 이후의 문(文)과 스스로 구별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문학은 지(知)와 행(行)을 겸하고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공문(孔門)의 문학관에서 가장 중요한 두 방면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문(尙文)ㆍ상용(尙用)의 양면성과도 부합되는 소론(所論)인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주진(周秦)시대에 있어서의 이른바 문학은 문장(文章)과 박학(博學)의 이의(二義)를 동시에 겸유하고 있어 문(文) 곧 학(學)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의 개념이며 최초의 문학관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양한(兩漢)시대에 이르면 문(文)과 學을 분별하여 부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문학과 문장(文章)을 또한 분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대(漢代) 있어서의 문학은 다만 학술적인 의의만 함유하게 되었고 문(文) 또는 문장(文章)은 오직 사장(詞章)만을 지론하는 것이 되었는 바 이에 이르러 근대인이 일컫는 문학의 의의와 가까워진 것이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나오는 ‘문학(文學)’은 대개 학술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에 반하여 미이동인(美而動人)하는 문사(文辭)를 다른 문건(文件)과 구별해서 문(文) 또는 문장(文章)이라 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있어서는 문학이 이때에 와서 비로소 학술과 획연히 구별이 되어 스스로 그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문학과 그 의의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문학비평의 전문적인 작업이 비롯된 것도 물론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육조(六朝)의 문학은 그 문사(文辭)의 성격에 따라 문(文)과 필(筆)로 나누기도 하는 바 이에 따르면 문(文)은 주로 정(情)이나 미감(美感)을 중시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순수문학(純粹文學)이라 하고 필(筆)은 그 중히 하는 것이 지(知)와 응용(應用)에 있다 하여 이를 잡문학(雜文學)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수당(隋唐)ㆍ북송(北宋)에 이르면 다시 복고(復古)의 풍이 일어나게 된다. 수당(隨唐)ㆍ오대(五代)의 창작계가 음미(淫靡)ㆍ부람(浮濫)으로만 흐르게 됨에 따라 이때에 육조(六朝)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내질(內質)에서 변별하려 함으로써 문학을 논하는 표준으로서의 문학관을 학(學)의 바깥에서 구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대(唐代)에 있어서는 문학을 논하는 표준을 이미 성현(聖賢)의 저작에서 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성현(聖賢)의 저작을 통해서 도(道)를 밝히려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문(文)에 치우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당인(唐人)은 ‘문이관도(文以貫道)’를 말하고 ‘문이재도(文以載道)’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관도(貫道)라고 하면 이는 이미 문(文)을 인하여 도(道)를 보는 것이 되므로 도(道)는 반드시 문(文)에 의빙해야만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文)과 도(道)의 경중(輕重)이 나타나게 되며 결과적으로 문(文)과 도(道)는 이개물(二個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한(李漢)이 「한창려집서(韓昌黎集序)」에서 ‘문자관도지기(文者貫道之器)’라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는 단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송대(宋代)에 있어서는 한 걸음 나아가 성현(聖賢)의 사상이 문(文)을 논하는 표준이 됨으로써 문학은 한갖 도학(道學)의 부용(附庸)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주돈이(周敦頤)가 통서(通書)에서 밝힌 ‘문소이재도야(文所以載道也)’가 그 대표적인 발언이 될 것이다. 재도(載道)에 있어서의 문(文)은 도(道)를 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고려말 충렬왕대(忠烈王代)에 송대(宋代)의 유학(儒學)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당(唐)ㆍ송(宋) 이래의 ‘문이관도(文以貫道)’나 ‘문이재도(文以載道)’가 문학이론의 지배원리로 군림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미구(未久)에 나타날 조짐을 보인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충선왕(忠宣王)과 이제현(李齊賢)의 문답내용은 아직도 성리학(性理學)의 보급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에 있었던 것이므로 흥학(興學)과 교화(敎化)를 앞세운 것이며 사장(詞章)을 배격하는 효용론(效用論)은 후차적(後次的)인 것이 되고 있다. 때문에 이제현(李齊賢)은 시를 관풍(觀風)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전래의 민요(民謠)를 악부(樂府)형식으로 옮기고 있으며 이곡(李穀)이 ‘본국(本國)의 문풍(文風)이 부진한 것은 공리(功利)를 급무로 삼고 교화(敎化)를 여사(餘事)로 삼기 때문이다【이색(李穡), 『가정집(家亭集)』5,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라고 한 것도 동궤(同軌)의 현상이다. 이곡(李穀)에 이르러, ‘載道之器 皆謂經 釋氏所說 誠難思【이색(李穡), 「順菴新置大藏李克禮州判作詩以讚次其韻」】’라하여 경술(經術)이 재도(載道)의 수단임을 강조한 초기의 발언이 되고 있지만, 이는 불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제시한 입론(立論)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의 기능에 대하여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색(李穡)에 이르러서는 직접 시도(詩道)를 논하여 효용적인 문학관을 개진하고 있며 시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도(詩道)가 관계하는 것이 막중하여 왕화(王化)와 인심(人心)이 이에서 나타난다. 세교(世敎)가 쇠하자 시(詩)가 변하여 소(騷)가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래로 5언(言)과 7언(言)이 시작되면서부터 시의 변화가 극도에 달했다. 비록 고시(古詩)와 율시(律詩)가 아울러 나타나고 공교(工巧)하고 치졸한 것이 계통이 다르긴 하지만 또한 각각 그 성정(性情)을 도야하여 그 취지(趣旨)에 적용하였으니 그 사기(詞氣)에서 따져보면, 세도(世道)의 오르내림이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詩道所係重矣, 王化人心於是著焉. 世敎衰, 詩變而爲騷, 漢以來五七言作, 而詩之變也極矣. 雖其古律並陳, 工拙異貫, 亦各陶其性情, 而適其適, 就其詞氣而觀之, 則世道之升降也. 如指諸掌.- 이색(李穡), 「中順堂集序」(『牧隱文』9),
물론 여기서 제시한 ‘성정(性情)’은 시의 소발처(所發處)를 천명한 상투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음 글들은 이색(李穡) 자신의 문학관을 선명하게 보여준 부분이다.
문장(文章)은 외도(外道)다. 그러나 마음에 뿌리를 박으므로 마음의 발로(發露)는 시대와 관계가 있다. 때문에 시를 외우는 자는 풍아(風雅)의 정(正)과 변(變)에 느낌이 있지 않을 수 없다. 말세(末世)의 장구(章句)는 날로 아래로 쳐져 정음(正音)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文章外也. 然根於心, 心之發關於時, 是以誦詩者, 不能不有感於風雅之正變焉. 叔世章句, 日趍于下, 無愧乎正音之不復作也. -이색(李穡), 「栗亭先生逸藁序」(牧隱文』 8),
도(道)가 문(文)의 근본이며 문(文)은 도(道)의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는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발(陶隱集跋)』에서 시를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은(陶隱)의 시어(詩語)는 이미 쇄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며 그 취향(趣向)이 오직 이에 있으므로 넉넉히 사람의 성정(性情)의 정(正)을 감동시켜 ‘무사(無邪)’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陶隱詩語旣灑落無一點塵, 而其趨惟在於此, 足以感人情性之正, 而歸於無邪矣.
이숭인(李崇仁)의 시가 성정(性情)의 표에서 나와 사무사(思無邪)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칭도(稱道)하고 있다.
이색(李穡)의 이러한 효용적인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은 그의 시작(詩作)에서도 도처에 유로(流露)되고 있다.
坐對東風一笑新 | 앉아서 동풍을 대하게 되어 또 한번 웃어보네. |
乾坤容此老衰身 | 천지가 이 늙은 몸 용납해 주었으니까. |
文章小技漸趨俗 | 문장(文章)은 소기(小技)인데 점점 시속(時俗)이 되어 |
箕斗虛名眞累人 | 기성(箕星)ㆍ두성(斗星) 헛된 이름 사람을 얽어매네. |
流水浮雲沒蹤迹 | 흐르는 물 뜬 구름은 종적이 없는데 |
落花啼鳥有精神 | 떨어지는 꽃 우는 새는 정신이 있네. |
餘生更感君恩重 | 여생(餘生)에 또다시 임금의 은혜 느끼게 되니 |
江上田廬不患貧 | 강 위에 오두막집 가난 걱정 아니하네. |
그는 「유감(有感)」이란 시에서, 문장(文章)의 기능이 소기(小技)에 지나지 않는 사실 상태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장(文章)이 속상(俗尙)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색(李穡)의 「독시(讀詩)」에서도 그는 시경시(詩經詩)의 효용적인 ‘사무사(思無邪)’를 재확인하고 있다.
豳自風爲雅 王由雅列風 | 관풍(關風)은 풍(風)으로부터 아(雅)가 되었고 왕풍(王風)은 아(雅)로 말미암아 풍(風)의 열(列)에 끼었네. |
人心自今古 世道有汙隆 | 인심(人心)은 고금(古今)이 있고 세도(世道)는 승침(昇沈)이 있네. |
草木皆蒙化 鳶魚亦降衷 | 초목(草木)들도 교화(敎化)를 입고 연어(鳶魚)도 본성(本性)을 받았네. |
思無邪一句 誰識素王功 | 사무사(思無邪) 일구(一句)를 누가 공자(孔子)의 공(功)인 줄 알리오? |
시경시(詩經詩)의 정신을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로 단정하여 효용성을 강조한 공자(孔子)도 ‘말이란 뜻이 통하면 그만이다[辭達而已]’라 하여 그의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표현론을 개진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보이기까지 한다.
정몽주(鄭夢周)는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로서 후대인의 추앙을 받아왔지만 유전(遺傳)하는 저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몽주(鄭夢周) 자신이 직접 개진한 문학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은 그의 자작시(自作詩)인 「교수현별서교유선(膠水縣別徐敎諭宣)」를 통하여 경술(經術)을 존숭하는 학문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萬邦同軌日 聖主右文時 | 만방(萬邦)이 질서대로 돌아가는 날이요 성주(聖主)가 글을 숭상하는 때라. |
邂逅逢佳士 懽忻似舊知 | 뜻밖에 가인(佳人)을 만나 이렇게 기쁜 것은 옛부터 알기 때문이라. |
風儀傾後輩 經術卽吾師 | 풍의(風儀)는 후배를 경도시키고 경술(經術)은 바로 내 스승이네. |
遠大宜相勉 何須惜別離 | 멀고 크게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니 어찌 모름지기 이별을 안타까와 하리오? |
이 시의 주지는 일상적인 해후(邂逅)를 읊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의리정도(義理精倒)한 포은(圃隱)의 진면목이 약여(若如)하다.
그러나 후인(後人)의 글에 비친 정몽주(鄭夢周)의 효용적인 문학관은 당시의 삼은(三隱: 牧隱ㆍ圃隱ㆍ陶隱) 가운데서도 가장 짙은 농도를 보여준다. 정몽주(鄭夢周)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전(道傳)이 16ㆍ7세 때 성율(聲律)을 익혀 대우(對偶)를 맞추고 있는데, 하루는 려강민자복(驪江閔子復)이 도전(道傳)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달가(鄭達可)선생을 만났더니 하는 말이, ‘사장(詞章)은 말예(末藝)일 뿐이다. 이른바 수기(修己) 정심(正心)의 학(學)이 있는데 그 설(說)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 하고, 지금 이순경(李順卿)과 더불어 이 두 책을 가지고 삼각산(三角山) 절에 가서 강구(講究)하고 있는데 그대는 이 사실을 아는가?” 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하여 읽었다. 비록 얻은 것은 없으나 자못 기뻤다.
道傳十六七, 習聲律爲對偶語, 一日, 驪江閔子復, 謂道傳曰: “吾見鄭先生達可, 曰: ‘詞章末藝耳. 有所謂身心之學, 其說具大學中庸二書.’ 今與李順卿携二書, 往于三角山僧舍講究之, 子知之乎?” 予旣聞之, 求二書以讀, 雖未有得, 頗自喜. - 정도전(鄭道傳), 「圃隱奉使藁序(三峯集』 권3),
여기서 그가 사장(詞章)을 말예(末藝)라고 한 것은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삼는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의 간접 표현이며 앞에서 보인 이색(李穡)의 ‘문장외야(文章外也)’ 보다도 그 강도를 높인 것이다.
이숭인(李崇仁) 역시 시도(詩道)를 성정(性情)에서 구하여 시는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제김가행시고후(題金可行詩藁後)」란 글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시도(詩道)의 변한 것이 지극하여 논자(論者)들은 왕왕 성정(情性)에 근본을 두지 않고 오직 한 귀절 한 글자의 공졸(工拙)만을 추구하니 내가 이를 병통(病痛)으로 여긴지 오래다…… 일찍이 시가 발(發)하는 것이 정성(情性)에 근본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느냐. 가행(可行)이 내 문하(門下)에 출입한 지 10년인데 진실로 그 사람됨을 좋아하며 시는 그 밖의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으니 마음 속에 쌓이면 밖에 나타난다는 것이 사실이구나.
詩道之變極, 而論者往往不本於情性, 惟一句一字之工拙是求, 余之病此久矣. …… 曾謂詩之發不本於情性乎? 可行游予門十年于玆, 固藥其爲人, 詩廼餘事也. 而又如此, 積於中形諸外, 信哉!
그러나 이숭인(李崇仁)의 구체적인 시작(詩作)에서는 효용적인 문학관의 투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선미(禪味)를 느끼게 하는 허다한 작품들이 도처에 산견(散見)된다.
2.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의 관풍의식(觀風意識)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은 주자학(朱子學)의 보급이 아직도 일반화되지 않은 중간 과정에서 특히 풍교(風敎)의 떨침에 같은 관심을 보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의지는 근엄한 이곡(李穀)의 시작(詩作)에 천근(千斤)의 무게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에 있어서는 따로 소악부시(小樂府詩)를 마련하여 민풍(民風)을 정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현(李齊賢, 1287 충렬왕13~1367 공민왕16, 자 仲思, 호 益齋ㆍ櫟翁)
은 분명히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 시기를 구획하는 데 중요하게 구실한 시인이요 문장가(文章家)임에 틀림없다. 그는 중국의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드물게 보는 악부(樂府)의 작자로서,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가요를 악부체(樂府體)로 번역하여 이를 소악부(小樂府)라 했으며, 만상(萬象)을 구비한 그의 시는 당시의 소단(騷壇)이 온통 송시(宋詩)를 배우고 있을 때 한시(漢詩)를 우리시로 정착시키어 단연 그 정종(正宗)으로 군림하였다. 때문에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시를 이천년래(二千年來) 동방(東方)의 명가(名家)라 했으며, 김택영(金澤榮)은 조선 삼천년(三千年)의 제일대가(第一大家)라 했던 것이다.
문(文)에 있어서도 그는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말한 그대로, 사육대우(四六對偶)를 오로지 하던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빠져 나와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修)의 고문(古文)과 신사(新辭)를 제창하여 세상을 크게 울렸다.
고려중기에 이르러 기사문(記事文)에 뛰어난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하여 고문(古文)의 선구로서 풍후박고(豊厚樸古)한 서한(西漢)의 산문(散文)을 시범했으나, 이는 당송(唐宋)의 고문(古文)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것이다. 익재(益齋)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목은(牧隱)이 정주(程朱)의 학(學)을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주소(注疏) 어록(語錄)의 기미가 많았다고 하지만, 익재(益齋)의 영향을 받은 목은(牧隱)의 문장은 아래로 양촌(陽村) 권근(權近)ㆍ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등에 상전(相傳)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익재(益齋)가 후세의 문장가에 대하여 개산(開山)의 공을 끼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구한말(舊韓末)에 김택영(金澤榮)이 려한구가(麗ㆍ韓九家)의 문(文)을 선정할 때 고려에서 김부식(金富軾)과 이제현(李齊賢)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현달(顯達)한 문학세가(文學世家)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20대에 백이정(白頤正)을 사사(事師)하여 남보다 먼저 정주(程朱)의 학(學)을 배웠다.
그러나 28세 때, 원(元)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 만권당(萬卷堂)에서 충선왕(忠宣王)을 모시면서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사귀어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2년 뒤에 왕명(王命)으로 남촉(南蜀)에 주유(周遊)하게 되자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남기어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33세 때에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강남(江南, 浙江地方)으로 두루 여행을 하였으며 35세가 되던 해에는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충선왕(忠宣王)이 타사마(朶思馬)로 이배(移配)하게 되어 왕을 만나러 1만 5천리의 장정(長征)을 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의 인간과 문학의 폭을 크게 넓힐 수 있었으며, 이덕무(李德懋)가 말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 우리 선인(先人)의 족적(足跡)이 이렇게 넓은 지역을 편답(遍踏)하기도 처음 있은 일이 되었으며, 그 성예(聲譽)를 중국에서 자자(藉藉)하게 한 것도 최치원(崔致遠) 이후 처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동안의 중국 생활을 통하여 그는 중국의 음률과 사곡(詞曲)을 익혀, 그 이전에도 시도된 일이 없었고 이후에도 변변한 작품을 창작해 내지 못한 사(詞)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은 그는 이후 오조(五朝)를 역사(歷仕)하는 동안 네 번이나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안으로는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기에 정(精)과 성(誠)을 다했으며, 밖으로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성신(誠信)으로 조정하여 고려왕조를 위기에서 구해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임금이 인견(引見)을 청하면,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진주(進奏)하여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서 그를 가리켜 ‘성리(性理)의 학(學)을 즐기지 않은 까닭으로 정력(定力)이 없이 공맹(孔ㆍ孟)을 공설(空說)한다’고 한 것은 그가 불가(佛家)의 문자를 찬술(撰述)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폄척(貶斥)을 받은 것 같다.
이제현(李齊賢)의 모든 것은 그의 문생(門生) 목은(牧隱)이 그 묘지명(墓誌銘)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이름이 온누리에 떨치고’, ‘도덕(道德)이 으뜸이요 문장의 정종(正宗)’이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익재난고(益齋亂藁)』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50수 가까운 시편(詩篇)이 수록되어 있어 시가 정종(正宗)의 면모를 알아내는 데는 이로써도 충분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보덕굴(普德窟)」(五絶), 「산중설야(山中雪夜)」(七絶)를 비롯하여 「팔월십칠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 放舟向峨嵋山)」(七律), 「구요당(九曜堂)」(七絶), 「표모분(漂母墳)」(七絶), 「범려(范蠡)」(七絶), 「탁군(涿郡)」(七絶), 「업성(鄴城)」(七絶), 「황토점(黃土店)」(七律), 「민지(澠池)」(五古)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재원(在元)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산중설야(山中雪夜)」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紙被生寒佛燈暗 | 종이 이불 한기가 돌고 불등(佛燈)은 어두운데 |
沙彌一夜不鳴鐘 | 사미(沙彌)는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다. |
應嗔宿客開門早 | 틀림없이 자던 손님 일찍 나간 것 꾸짖겠지만 |
要看庵前雪壓松 | 암자 앞에 눌린 소나무 보려 했을 뿐이로다. |
이 시는 일자(一字)의 허비(虛費)나 이완(弛緩)도 없이 마치 구슬을 꿰듯이 삼엄(森嚴)하게 조직되고 있어 문자 그대로 공묘(工妙)의 극치를 보게 하는 작품이다. 숙객(宿客)도 의례적인 숙빈(宿賓)이 아니라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하는 소박한 숙객(宿客)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卷下) 5번이나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98번에서 보면 이상은(李商隱)의 ‘鑪煙消盡寒燈晦, 童子開門雪滿松’에서 따온 것은 틀림없겠으나 최해(崔瀣)는 ‘익노(益老) 반생(半生)의 시법(詩法)이 이 시에서 다했다[益老半生詩法. 盡在此詩].’고 격찬했을 정도다.
이 밖에도 이제현(李齊賢)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시속(時俗)의 노래들을 칠언(七言)으로 번역하고 이를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다. 그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모두 칠절(七絶)로 되어 있다. 「처용가(處容歌)」ㆍ「서경별곡(西京別曲)」ㆍ「정과정곡(鄭瓜亭曲)」은 원가(原歌)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밖의 「장암가(長巖歌)」ㆍ「거사련(居士戀)」ㆍ「제위보(濟危寶)」ㆍ「사리원(沙里院)」ㆍ「소년행(少年行)」ㆍ「오관산(五冠山)」은 실전(失傳) 가요이므로 이 소악부(小樂府)를 통하여 원가(原歌)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원가(原歌)가 전하고 있는 작품의 경우를 보면 한 노래의 전편(全篇)을 직역한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살리기는 하되 정채(精彩)만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소악부(小樂府)란 명호(名號)에 대해서도 아직 정론이 없다. 중국의 악부(樂府)에 대하여 우리나라 악부(樂府)란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도 하고【이우성(李佑成), 「고려말기(高麗末期)의 소악부(小樂府)」, 『한국한문학연구(韓國漢文學硏究) 1】 또는 단시형(短詩型)인 칠절(七絶)로 되어 있으므로 그 소시적(小詩的) 성격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한다【이종찬(李鍾燦), 「소악부시고(小樂府試攷)」, 『동악어문논집(東岳語文論集)』 1 參照】 그러나 소악부(小樂府)란 명칭은 제양(齊梁) 시대에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민간 노래를 지칭한 데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소시적(小詩的) 단형시(短型詩) 형태에 붙여진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 이름이 중국의 제양(齊梁) 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진술에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詩歌自齊梁以來, 因爲文人模倣小樂府, 一步一步走向輕艷浮靡的風格. -장장궁(張長弓), 『중국문학사(中國文學史)』, p.121.
詩餘之興, 齊梁小樂府先之. -왕국유(王國維),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유대걸(劉大杰),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 p.505
但到了齊梁間之小樂府, 句法字數確能有一定的形式. -유대걸(劉大杰),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
그러나 이것들은 제양(齊梁) 당시의 기록이나 구체적인 작품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인의 짐작에 의하여 임의로 붙인 것인지 의심은 남는다.
이곡(李穀, 1298 충렬왕24~1351 충정왕3, 자 仲父, 호 稼亭)
은 초명(初名)이 예백(藝白)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그의 가계(家系)는 한산(韓山)의 향리층(鄕吏層)이었으며 이곡(李穀)의 부자대(父子代)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있다가 원(元)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한림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까지 지냈으며 그 뒤에도 원(元)과의 왕래가 자주 있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與中朝文士, 交遊講劘…辭嚴義興, 典雅高古, 不敢以外國人視也.’라 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가정집(稼亭集)』에 전하는 것 외에도 『동문선(東文選)』등 선발책자(選拔冊子)에 30여편이 수록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도중피우유감(途中避雨有感)」(七絶), 「설야소작(雪夜小酌)」(五律), 「칠석소작(七夕小酌)」(七律), 「정조설(正朝雪)」(七律), 「원정숭천문하(元正崇天門下)」(七律), 「수도한강(水渡漢江)」(七律) 등 수작(秀作)이 많으나 재원(在元) 시절에 쓴 것이 대부분이다.
「도중피우유감(途中避雨有感)」은 다음과 같다.
甲第當街蔭綠槐 | 길 가에 덩실한 집 푸른 회나무에 덮였는데 |
高門應爲子孫開 | 높은 문은 응당 자손 위해 열렸겠지. |
年來易主無車馬 | 근년(近年)에 주인이 바뀌어 찾아드는 거마(車馬)도 없는데 |
惟有行人避雨來 | 지나가는 나그네만 비를 피하고 있구나. |
변전(變轉)을 거듭하던 려말(麗末)의 정국(政局)을 직절(直截)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사어(辭語)가 근엄(謹嚴)하여 품위를 돋보이게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문풍(文風)이 떨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현실을 개탄한 바 있거니와 그에게 있어서의 문풍(文風)은 곧 교화 또는 풍교(風敎)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풍(觀風)의 의지가 그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2) 최해(崔瀣)의 곤돈(困頓)과 정포(鄭誧)의 유려(流麗)
최해(崔瀣,1287 충렬왕13~1340 충혜왕복위1, 자 彦明父ㆍ壽翁, 호 拙翁. 猊山農隱)
는 이제현(李齊賢)과 동시대의 문인이다. 등제후(登第後) 충숙왕(忠肅王) 때 원(元)에 들어가 그곳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개주판관(盖州判官)을 지내고 환국(還國)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서 그쳤다. 그는 재기지고(才奇志高)하여 독서와 문사(文辭)에 있어서 사우(師友)의 지도에 힘입지 않고 자득(自得)하였다고 하며 방탕감언(放蕩敢言)하고 권귀(權貴)에게 아첨하기 싫어하여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초기의 선발책자(選拔冊子)인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했으며 시선집(詩選集)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비주(批注)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인지문(東人之文)』은 사륙(四六)과 오칠(五七)의 잔권(殘卷)만이 전하고 있어 전편의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그의 문집 『졸고천백(拙藁千百)』에 『동인지문(東人之文)』의 서문이 있어 그 개략을 알게 해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그의 시작(詩作)은 30여수에 이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현재설야(縣齋雪夜)」(七絶)와 「사호귀한(四皓歸漢)」(七絶)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재설야(縣齋雪夜)」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三年竄逐病相仍 | 3년 동안 쫓겨난 몸 병이 또 따르니 |
一室生涯轉似僧 | 일실(一室)에 갇힌 생애 절로 중[僧]과 같구나. |
雪滿四山人不到 | 왼 산에 눈이 쌓여 사람은 오지 않는데 |
海濤聲裏坐挑燈 | 파도 소리 들으며 앉아서 등을 돋운다. |
다른 시작(詩作)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이 작품은 특히 서거정(徐居正), 『동인시화(東人詩話)』 권상 19번을 보면 곤돈(困頓)한 그의 기상(氣象)을 한 눈으로 읽게 한다.
정포(鄭誧, 1309 충선왕1~1345 충목왕1, 자 仲孚, 호 雪谷)
는 최해(崔瀣)의 문인(文人)이며 추(樞)의 아버지다.
그는 소년등제(少年登第)하여 충숙왕(忠肅王)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충혜왕(忠惠王)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서 그쳤다. 뒤에 원(元)에 들어갔다가 승상별가보화(丞相別哥普化)의 사랑을 입어 원제(元帝)에게 천거하려 할 때 그곳에서 병졸(病卒)했다.
그는 타고난 시재(詩才)가 있어 『고려사(高麗史)』 「정해(鄭瑎)」에서는 ‘시어가 간략하고 예스러우며 필적 또한 오묘하다[詩詞簡古, 筆蹟亦妙].’라 하였으며 이색(李穡)은 「설곡시고서(雪谷詩藳序)」에서는 ‘설곡의 시는 맑지만 쓰지 않고 곱지만 음탕하지 않아 말의 기운이 우아하고 깊지만 도교의 풍속을 즐기지 않았다[雪谷之詩, 淸而不苦, 麗而不淫, 辭氣雅遠, 不肯道俗].’이라 하였다. 남용익(南龍翼)도 그의 『기아(箕雅)』 서문에서 ‘유려한 시어를 구사하는 이라면 정사간과 진한림과 정설곡과 …… 정원재라 할 것이다[流麗則, 鄭司諫ㆍ陳翰林ㆍ鄭雪谷…鄭圓齋]’라 하여 그의 아들 추(樞)도 아버지와 시풍(詩風)을 같이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현전하는 정포(鄭誧)의 시작(詩作)은 30여편에 이르고 있으나 특히 유려(流麗)한 그의 시편(詩篇)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것이 많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七絶)을 비롯하여 「강구(江口)」(五絶), 「서강잡흥(西江雜興)」(七絶), 「중구(重九)」(五律), 「증이천각달존(贈李天覺達尊)」(七律) 등이 모두 명작이다.
五更燈影照殘粧 | 오경(五更)의 등촉(燈燭)이 지워진 화장을 비추는데 |
欲語別離先斷腸 | 이별을 말하려 하니 애간장을 끊는구나. |
落月半庭推戶出 | 달이 진 뜨락에 내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
杏花疎影滿衣裳 | 살구나무 성긴 그림자 옷자락에 가득 차네. |
위의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은 정포(鄭誧)의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정인(情人)과의 이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연(內燃)으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3) 이색(李穡)의 박채불유(博採不遺)
이색(李穡, 1328 충숙왕15~1396 태조5, 자 穎叔, 호 牧隱)의 문장(文章)은 그 폭이 넓을 대로 넓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각체(各體)의 도처에서 명문(名文)을 양산하고 있는 그의 문장(文章)은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곳도 없다. 쫓거나 내닫는 성급함도 없이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말이 풍부하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말한 그대로 먹을수록 맛있고 배부르게 해준다.
『목은집(牧隱集)』의 문장(文章)은 그가 사거(死去)한 수백년 동안 그것을 헐뜯는 입놀림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울렸다. 문장(文章)을 대하는 풍상(風尙)이 달라진 조선중기 이후에 있어서도 그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古文)을 주창한 간이(簡易) 최립(崔岦)도 목은(牧隱)의 문집을 보고서는, 우리나라 문장(文章)은 당연히 목은(牧隱)으로 으뜸을 삼아야 한다고 했으며, 자손을 위하는 자는 하필이면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목은집(牧隱集)』을 읽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허천사(許天使)가 와서 우리나라의 문집을 찾았을 때에도 기대승(奇大昇)이 이규보(李奎報)ㆍ김종직(金宗直)ㆍ서거정(徐居正)ㆍ목은(牧隱) 등의 문집을 그 앞에 내놓았지만 그 가운데서 유독 하나를 뽑은 것이 『목은집(牧隱集)』이라고 한다.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평을 가한 것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가장 심한 경우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식암집서(息菴集序)」에서 우리나라 문장(文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문장(文章)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셋이 있다. 얇고 거칠어서 절심(切深)하지 못하며, 야하고 속되어서 아려(雅麗)하지 못하며, 늘어놓고 난잡하여 간정(簡整)하지 못하다.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冗靡而不能簡整也.
창강(滄江)은 이것이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에는 백화체(白話體, 語錄)가 많아 이후 200년 동안 문장(文章)이 모두 여기에서 병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농암(農巖) 자신의 진술을 들어보면, 그는 『호곡시화(壺谷詩話)』의 목록에서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을 으뜸이라고 한 남용익(南龍翼)의 주장을 일축하고, 문(文)에 있어서는 단연코 목은(牧隱)을 대가(大家)로 받들어야 한다고 실토하고 있다. 목은(牧隱)의 시에 있어서도, 속된 말이 많다는 뒷사람들의 비평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허균(許筠)이 말한 것처럼 시대의 풍상(風尙)이 달라졌을 때에는 오히려 목은(牧隱)의 평가에 보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은, 문(文)은 서한(西漢)을, 시(詩)는 건안체(建安體, 漢魏間의 詩體)를 좋아했다고도 하지만 목은(牧隱) 자신은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修)가 나의 스승이라고 했다. 때문에 그의 문장(文章)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도 시끄럽고 요란하며 쉽사리 한 군데로 모아지지 않았다.
특히 목은(牧隱)의 시는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웅혼(雄渾)한가 하면 곱고 예쁘며, 준결(峻潔)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호섬(豪贍)한 것이 있으며 엄중(嚴重)한 것도 있고 오심(奧深)한 것이 있어 전정(全鼎)을 맛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시에 대한 평가다.
이로써 보면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이, 웅준(雄峻)한 포은(圃隱)과 전아(典雅)한 양촌(陽村)과, 간결(簡潔)한 도은(陶隱)과 호매(豪邁)한 삼봉(三峯)도 모두 선생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 평가는 목은(牧隱)의 시세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발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은시(牧隱詩)의 장처(長處)를 가장 감동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선후기의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그는 「동인논시(東人論詩)」 3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를 비교하여 한마디로 ‘위장부전요조랑(偉丈夫前窈窕娘)’이라고 했다. 훤칠한 위장부(偉丈夫)의 모습은 문(文)에 있어서도 목은(牧隱)의 진면목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바로 목은시(牧隱詩)의 ‘호방(豪放)’을 말한 것이다. 다만, 목은(牧隱)의 시(詩)에는 설명(說明)은 있지만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그의 ‘호방(豪放)’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색(李穡)은 유명한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계(家系)는 원래 한산(韓山)의 향리층이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중앙의 사대부로 진출하였다. 14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1세에 원(元)의 서울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머물러 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性理學)에 침잠했다.
재원(在元) 3년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며 26세에 이제현(李齊賢)이 주시(主試)한 과거에 장원하여 이제현(李齊賢)과의 인연이 여기서 깊어지게 되었다. 그후 그는 다시 연경(燕京)에 가 한림원(翰林院)에 보임되었으나 다음해 그 곳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그가 배운 학문과 능력으로 조정에 봉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치면서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이때에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學官)으로 채용하여 유학(儒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ㆍ이숭인(李崇仁) 등 일대의 명류(名流)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왕조가 성립된 지 4년 만에 그는 태조(太祖)의 부름을 받아 친구의 예로써 그를 만났다고 하며 한산백(韓山伯)에 봉(封)함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결과가 되었으며 다음해 그는 여강(驪江)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출처 불명의 하사주(下賜酒)를 마시고 급사(急死)했다는 마지막 수수께끼를 남기고 갔다
목은(牧隱)의 시작(詩作)은 문집 밖에도 70여 수가 시선집(詩選集)에 전한다. 호방(豪放)한 그의 시풍 때문에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선발(選拔)에 인색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부벽루(浮碧樓)」(五律)와 「독두시(讀杜詩)」(七律)가 특히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부벽루(浮碧樓)」만 보인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 어제 영명사(永明寺)를 지나다가 잠깐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네. |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 텅빈 성에는 한 조각 달이 걸려 있고 늙은 돌 위에 구름도 천추(千秋)나 되었네. |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 기린마(麒麟馬)는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天孫)은 어느 곳에서 노닐고 있는고? |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 난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산은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
훤칠한 이색(李穡)의 모습을 시로써 보여준 것이 이 작품이다.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시간의 시각화를 기도한 표현기법에서도 크게 성공하고 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지막 미련(尾聯)에 가서 자신도 모르게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가는 느낌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3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조식(雕飾)도 아니하고 탐색(探索)도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도 궁상(宮商)에 합한다고 하여 성률(聲律)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보이었다. 그러나 이 「부벽루(浮碧樓)」에서 부벽루(浮碧樓)는 그의 의상(意象)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을 뿐 결코 묘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부벽루를 지나가다가 지나간 역사를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부벽루는 회고적(懷古的)인 감상을 노래하게 한 매개물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한다.
4) 정몽주(鄭夢周)의 호방(豪放)과 이숭인(李崇仁)의 전아(典雅)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6~1392 공양왕4, 자 達可, 호 圃隱)
는 인종(仁宗) 때에 문명(文名)을 드날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그는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유가(儒家)ㆍ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한 여말(麗末)의 학자 문인이다. 그가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 하여 이를 흠으로 일컫는 후대의 비평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피살된 고려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성계(李成桂)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그였지만, 그의 정충대절(精忠大節)만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그는 ‘반역(叛逆)’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색(李穡)이 ‘몽주가 이치를 논할 때면 횡설수설하지만 이치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기에 추대되어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삼았다[夢周論理, 橫說竪說, 無非當理, 推爲東方理學之祖].’라 하여 한마디로 끝막음을 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도 김종직(金宗直)과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는 계보를 도통(道統)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의 시 역시 호방(豪放)한 기상(氣象)과 애군허국지의(愛君許國之意) 때문에 대체로 높은 칭예를 받았다. 하륜(河崙)이 ‘말은 호방하고 뜻은 자유분방하여 조화롭지만 부류 짓는 데엔 이르지 않고 곱지만 과장됨엔 이르지 않는다[辭語豪放, 意思飄逸, 和不至於類, 麗不至於靡].’라 한 것이라든가 권채(權採)가 「포은선생시권서(圃隱先生詩卷序)」의 ‘발설하여 문장이 되는 것들이 웅장하고도 깊으며 우아하고 강인하며 넉넉하고 포괄적이며 조화롭다[發而爲文章者, 雄深而雅健, 渾厚而和平].’이라 한 것 등이 모두 ‘웅혼(雄渾)’과 ‘화아(和雅)’를 함께 말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 47을 보면, 변계량(卞季良)은 ‘포은호방준장 횡방걸출기상(圃隱豪放俊壯, 橫放傑出氣象).’이라 하여 특히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을 칭도했으며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6번에서 그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정포은은 이학과 절의가 한 때에 우뚝했을 뿐 아니라, 그 문장은 호방하고도 걸출했다[鄭圃隱非徒理學節義冠于一時, 其文章豪放傑出].’이라 한 것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을 함께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시문집(詩文集) 외에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40여수나 전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그의 시세계를 알아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는 「춘흥(春興)」(五絶), 「강남곡(江南曲)」(七古), 「정부원(征婦怨)」(七絶) 등 수작(秀作)이 많지만 특히 그의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을 알게 해주는 것은 율시(律詩)에 더 많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五律),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七律),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七律)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춘흥(春興)」은 다음과 같다.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 봄비 가늘어 방울 듣지 않더니 밤중에사 조그맣게 소리 들리네. |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 눈이 녹아 남쪽 개울에 물이 불어났겠으니 풀 싹은 얼마쯤 돋아났을까. |
봄을 노래하고 있지만, 목전사경(目前寫景)의 수법에 의존하지 아니하였다. 가랑비 오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소리를 자연의 이(理)에서 구하고 있어 유가시(儒家詩)의 면목이 남달리 돋보인다. 특히 ‘춘우세부적(春雨細不適)’에서 명사 ‘적(滴)’을 동사화하고 있는 기법은 동적(動的)인 미감의 표현을 한눈으로 읽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승구(承句)의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에 이르러서는 빗소리가 너무 약하여 ‘군동(群動)이 정식(停息)하는 밤중에서야 가느다랗게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동정(動靜)의 대응을 높은 솜씨로 이룩하고 있다. 기구(起句)와 결구(結句)의 호응도 좋다.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는 다음과 같다.
定州重九登高處 | 정주(定州)에서 중구(重九)날 높은 곳에 오르니 |
依舊黃花照眼明 | 국화꽃 예와 같이 눈 앞에 환하네. |
浦敍南連宣德鎭 |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宣德鎭)에 이어졌고 |
峯巒北倚女眞城 | 산봉우리는 북으로 여진성(女眞城)에 기대었네. |
百年戰國興亡事 | 백 년 동안의 전쟁은 흥하고 망하는 일, |
萬里征夫慷慨情 | 만리(萬里)에 온 병사는 강개(慷慨)로운 정일세. |
酒罷元戎扶上馬 | 술 끝나자 대장이 말 위에 올려 주니 |
淺山斜日照紅旌 | 얕은 산 빗긴 해가 붉은 깃발 비추네. |
이 작품은 물론 관북(北關)에서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이 달리는 듯하다. 김종직(金宗直)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이 작품을 뽑아주지 않은 것도 이 ‘호방(豪放)’을 싫어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려(流麗)’로 이름난 정포(鄭誧)를 보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두 작품이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정포(鄭誧)의 「중구(重九)」(五律)는 다음과 같다.
地僻秋將盡 山寒菊未花 | 땅이 궁벽하여 가을도 가려 하는데 산이 추워 아직 국화도 피지 않았네. |
病知詩愈苦 貧覺酒難賖 | 병이 드니 시 짓기 더욱 괴로운 줄 알겠고 가난할 때 술 사오기 어려움 깨닫네. |
野路天容大 村墟日脚斜 | 들길에 하늘이 크고 마을 빈 터에 햇발이 비꼈네. |
客懷無以遣 薄暮過田家 | 나그네 회포를 풀 길이 없어 어둑한 저녁 무렵 전가(田家)를 지나네. |
정(情)과 경(景)을 반반으로 뒤섞으면서 미끄럽고 곱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는 이와 대조적이다. 웅혼계(雄渾系) 시인들은 대체로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를 억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거니와 이 작품에서도 작자는 꾸미는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문자 그대로 ‘대박이미산(大樸而未刪)’이다. 그러나 그는 미련(尾聯)에 이르러 대장이 말에 올려주었기 때문에 높이 말을 타고 있는 그는 주변에 있는 본래의 산들이야 높건 말건 일언(一言)으로 ‘천산(淺山)’으로 만들어 그의 기상(氣象)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포은시(圃隱詩)의 가장 높은 경지는 ‘기실(紀實)’에 있다.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11수 중 그 네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平生南與北 心事轉蹉跎 | 평생 남북으로 돌아다니는 신세, 마음과 일도 따라서 어긋나네. |
故國海西岸 孤舟天一涯 | 고국은 서해안에 있고 외로운 이 몸 멀리 하늘가에 있네. |
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 | 매화 핀 창에는 봄빛이 빨리 오고 나무 지붕에는 빗소리가 크네. |
獨坐消長日 那堪苦憶家 | 홀로 앉아 긴 날을 보내노라니 고향 생각 괴로움을 어찌하리요? |
동사의 사용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전편의 구도(構圖)가 크고 넓어 호방(豪放)한 그의 기상(氣象)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事實)의 기술(記述)만으로도 명작(名作)을 가능케 한 학자시(學者詩)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숭인(李崇仁, 1349 충정왕1~1392 태조1, 자 子安, 호 陶隱)
은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ㆍ김구용(金九容) 등과 더불어 교관(敎官)으로 일했다.
이숭인(李崇仁) 역시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유가(儒家)이자 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하였지만, 특히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여 당시의 표전사명(表箋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원(元)으로부터 금은마포(金銀馬布)의 세공(歲貢)을 감하게 한 것도 그의 힘이었다고 한다【『고려사(高麗史)』ㆍ 열전(列傳), 「이숭인조(李崇仁條)」】.
그러나 그 역시 정몽주당(鄭夢周黨)으로 몰리어 멀리 내쫓겨야 했으며, 끝내는 정도전(鄭道傳)이 보낸 황거정(黃居正)에 의하여 장살(杖殺)되었다. 이숭인(李崇仁)과 정도전(鄭道傳) 사이에 있었던 오호도시(嗚呼島詩) 사건은 참독(慘毒)한 일화(逸話)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거니와 이 오호도시(嗚呼島詩)가 빌미가 되어 결국 정도전(鄭道傳)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시문(詩文)은 한결같이 ‘간결(簡潔)’, ‘전아(典雅)’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숭인의 문장과 말이 법대로 바르니 이색은 매번 ‘이 사람의 문장을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라고 칭찬했다[崇仁文辭典雅, 穡每歎曰: ‘此子文章, 求之中國, 世不多得’].”이라 했으며 특히 이색(李穡)은 「도은시고후(陶隱詩藁後)」에서 그의 시에 대하여 ‘도은의 시어는 씻은 듯이 한 점의 티끌조차 없다[陶隱詩語, 洒落無一點塵].’이라 했다. 그리고 정몽주(鄭夢周)는 목은(牧隱)과 대비하여 ‘홀로 문장을 물려받아 목옹을 이어 찬란하게 북두성이 가슴 속에 나열지은 이다[獨擅文章, 繼牧翁, 粲然星斗列胸中]’라 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도 『동인시화(東人詩話)』 목은시(牧隱詩)를 평한 곳에서 ‘간이하고 청결함은 도은과 같다[簡潔如陶隱]’라 하여 목은(牧隱)과 도은(陶隱)을 병칭하고 있지만, 도은(陶隱)시의 특장(特長)에 있어 목은(牧隱)ㆍ포은(圃隱)과 그 세계를 달리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숭인(李崇仁)의 시는 그의 문집에 3권이 전하고 있으며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작품도 40여수에 이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촌거(村居)」(五絶)를 비롯하여 「제승사(題僧舍)」(七絶), 「의장(倚杖)」(五律), 「억삼봉(億三峯)」(五律), 「추회(秋回)」(七律), 「오호도(嗚呼島)」(七古), 「신설(新雪)」(五律) 등이 알려진 것들이다. 이 가운데서 「신설(新雪)」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蒼茫歲暮天 新雪遍山川 | 아득한 세모(歲暮)의 하늘에 첫눈이 산천에 깔렸네. |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 새들은 산 중의 나무를 잃고 중[僧]은 돌 위에 샘을 찾는다. |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 주린 가마귀 들 밖에서 우짖고 얼어붙은 버드나무 시냇가에 누웠네. |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 어느 곳에 인가(人家)가 있길래 저 멀리 숲 속에서 흰 연기가 날까? |
「촌거(村居)」와 더불어 이숭인(李崇仁)의 ‘간결(簡潔)’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욕심을 내거나 다듬는 기교도 애써 부리지 않았으므로 티없이 맑고 깨끗하다. 정감의 유로(流露)를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어 목전(目前)의 사경(寫景)이 더욱 상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촌거(村居)」와 「신설(新雪)」이 모두 『동문선(東文選)』에 빠져 있는데, 여기에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5) 려말(麗末)의 시인(詩人)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 등 이른바 삼은(三隱)을 전후한 시대에는 안정된 우리의 진귀(珍貴)를 맛보게 하는 많은 소인(騷人)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적어 보일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는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박상충((朴尙衷)ㆍ권한공(權漢功)ㆍ민사평(閔思平)ㆍ신천(辛蕆)ㆍ전녹생(田祿生)ㆍ한종유(韓宗愈)ㆍ백문보(白文寶)ㆍ오순(吳珣)ㆍ최원우(崔元祐)ㆍ이공수(李公遂)ㆍ이달충(李達衷)ㆍ탁광무(卓光茂)ㆍ한수(韓脩)ㆍ정추(鄭樞)ㆍ설손(偰遜)ㆍ이인복(李仁復)ㆍ김구용(金九容)ㆍ유숙(柳淑)ㆍ이집(李集)ㆍ이존오(李存吾)ㆍ원천석(元天錫)ㆍ원송수(元松壽)ㆍ길재(吉再) 등이 려말(麗末)에서 선초(鮮初)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성망(聲望)이 높았던 시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신천(辛蕆)의 「목교(木橋)」(七絶), 한종유(韓宗愈)의 「한양촌장(漢陽村庄)」(七絶), 이달충(李達衷)의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五古), 한수(韓脩)의 「야좌(夜坐)」(五律), 정추(鄭樞)의 「정주도중(定州途中)」(七絶)과 「오리동박헌납용진간재운부지(汚吏同朴獻納用陳簡齋韻賦之)」(五古), 설손(偰遜)의 「산중우(山中雨)」(五絶), 김구용(金九容)의 「범급(帆急)」(五律), 유숙(柳淑)의 「벽란도(碧瀾渡)」(五絶), 이집(李集)의 「한양도중(漢陽途中)」(五律) 등은 명편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신천(辛蕆, ?~1339 충숙왕 복위 8, 호 德齋)
은 안향(安珦)의 문인(門人)으로 여말(麗末)의 주자학(朱子學) 수용과정에서 크게 기여하였으며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목교(木橋)」(七絶), 「평해동헌(平海東軒」(七律) 등이 여러 시선집(詩選集)에 보인다. 「목교(木橋)」를 보인다.
斫斷長條跨一灘 | 긴 가지 잘라서 여울에 걸치니 |
濺霜飛雪帶驚瀾 | 서리 뿌리고 눈 날리듯 놀랜 물살 이루네 |
須臾步步臨深意 | 잠깐 사이에 걸음걸음 깊은 데까지 이르는 뜻을 |
移向功名宦路看 | 공명 찾는 벼슬길에 빗대어 본다. |
환로(宦路)에 나아가는 것이 마치 깊은 여울에 걸쳐져 있는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음을 직절하게 말한 것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의 상응이 선명하여 작자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세교(世敎)를 의식한 유가(儒家)의 작품이어서 문학의 효용적 기능을 확인하는 데 모자람이 없지만, 예술적인 단련은 찾아볼 수 없다.
한종유(韓宗愈, 1287 충렬왕13~1354 공민왕3, 자 師古, 호 復齋)
는 충숙(忠肅)ㆍ충혜왕(忠惠王)의 복위 과정에서 원(元0나라를 내왕하며 왕권(王權) 수호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의 시작(詩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전하고 있는 「한양촌장(漢陽村莊)」이 있을 뿐이다. 작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十里平湖細雨過 | 십리 길 조용한 호수에 보슬비 지나가고 |
一聲長笛隔蘆花 | 한 가닥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 들리네 |
直將金鼎調羹手 | 금솥에서 국 끓이던 그 솜씨로 |
還把漁竿下晚沙 | 도리어 낚시대 들고 저녁 모래밭으로 내려가네 |
젊은 시절에는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울만큼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공명을 이루어 이름을 떨쳤다. 만년(晩年)에 고향으로 돌아가 한적(閑適)을 즐기며 쓴 작품이다. 재상의 여유를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으나 전구(轉句)가 지나치게 돌출하여 전편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재상의 경륜으로 낚시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인(文人)의 경계(境界)와 다른 점이다.
이달충(李達衷, ?~1385 우왕11, 호 霽亭)
은 성품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의 전횡 시대에 신돈에게 직언을 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이 주살(誅殺)된 후 다시 등용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五古), 「취가(醉歌)」(七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을 보기로 한다.
將行有河海 將涉無舟航 | 가려니 강과 바다 건너려니 배가 없네 |
要見我所思 欲往還彷徨 | 다만 생각하는 사람 보려함이나 가려다가 도리어 주저하네 |
才非傅說楫 世運亦未昌 | 재주는 부열의 노가 되지 못하고 세상의 운 또한 트이지 않네 |
潛光且竢命 妄動遭禍殃 | 빛 숨기고 천명을 기다려야지 망령되이 움직이다 재앙을 만날 걸세 |
『동문선(東文選)』에 전하고 있는 팔수(八首) 중 제 7수이다. 섭세(涉世)에 신중하여야 함을 스스로 경계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수(韓脩, 1333 충숙왕 복위2~1384 우왕10, 호 柳巷)
의 저작은 『유항시집(柳巷詩集)』 38장(張)이 전하고 있을 뿐 문집이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일찍부터 시명(詩名)을 얻어 익재(益齋)와 목은(牧隱)으로부터 칭상(稱賞)을 받은 그는 특히 목은(牧隱)과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五律), 「봉화한산군(奉和韓山君)」(五律), 「척약재승주내방음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酒中)」(七律), 「요목은선생등루완월(邀牧隱先生登樓翫月)」(七律), 「야좌(夜坐)」(七古)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작품이 율시 가운데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을 보인다.
此日亦云暮 百年眞可悲 | 오늘도 날이 저물었으니 평생이 진실로 슬프구나 |
心爲形所役 老與病相隨 | 마음은 몸뚱이에 부림을 당하고 늙어가니 병이 서로 따르네 |
篆冷香殘後 窓明月上時 | 향불이 탄 후라 연기가 차갑고 달이 오를 때라 창이 밝도다. |
有懷無與晤 聊和古人詩 | 회포 있어도 말할 사람 없으니 에오라지 고인의 시에 화답하노라 |
두보(杜甫)의 원시(原詩)는 확인되지 않지만, 밤에 홀로 앉아 쓴 것이므로 전편의 분위기는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ng’음의 적당한 구사와 허자(虛字) ‘운(云)’의 적절한 사용으로 시의 소리는 명랑한 편이다.
정추(鄭樞, ?~1382 우왕8, 자 公權, 호 圓齋)
는 아버지 정포(鄭誧)와 더불어 유려(流麗)한 풍격(風格)으로 이름높은 시인이다. 여러 선발책자(選拔冊子)에 뽑히고 있는 것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정주도중(定州途中)」(七絶), 「금란굴(金幱窟)」(五律), 「만경대(萬景臺)」(五律), 「숙청심루(宿淸心樓)」(五律), 「기암둔(寄嚴遁)」(七律), 「오리동박헌납용진간재운부지(汚吏同朴獻納用陳簡齋韻賦之)」(五古) 등이다.
다음은 그의 「정주도중(定州途中)」이다.
定州關外草萋萋 | 정주 관문 바깥에는 풀만 무성하고 |
沙磧無人日向西 | 모래밭에 사람 없고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
過海腥風吹戰骨 | 바다의 비린 바람 전사자의 해골에 불어 |
白楡多處馬頻嘶 | 느릅나무 많은 곳에 말 자주 울더라 |
이 작품은 결구(結句)의 연상(聯想)이 특히 돋보인다. 전쟁과 백유(白楡)ㆍ마(馬) 등의 상응이 그러한 것이다. 정주(定州)가 북방(北方)의 관문(關門)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늘 있어온 전쟁을 떠올리고 전장(戰場)의 쓸쓸함을 주된 정조로 삼고 있다.
설손(偰遜, ?~1360 공민왕9, 호 近思齋)
은 원래 위구르[回鶻] 사람으로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高麗)에 귀화하여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의 조상들이 설련하(偰輦河)에서 살았으므로 고려 왕실에서 그에게 ‘설(偰)’로 사성(賜姓)을 하였다.
그의 대표작 「산중우(山中雨)」를 본다.
一夜山中雨 風吹屋上茆 | 한 밤중 산 속에 비 내리는데 바람은 지붕의 띠풀에 분다네 |
不知溪水長 祗覺釣船高 | 시냇물 불어난 것은 알지 못하지만 다만 낚싯배 높아진 것만 깨달을 뿐이네 |
밤 사이 비가 온 산중의 풍경을 읊은 작품이다. 고깃배가 높이 떠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시냇물이 길게 불어난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평범하면서도 속기(俗氣)가 보이지 않는다. 기(起)ㆍ승구(承句)와 전(轉)ㆍ결구(結句) 간의 대응이 뛰어나 작자의 높은 솜씨를 확인케 한다.
이 시는 특히 『명시별재(明詩別裁)』와 『명시종(明詩綜)』에 나란히 실려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김구용(金九容, 1338 충숙왕 복위7~1384 우왕10, 자 敬之, 호 惕若齋)
은 숭유(崇儒)의 군주(君主)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恭愍王)이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였을 때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이때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논(論)하는 등 주자학(朱子學)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에는 강호자연(江湖自然)을 사랑하는 흥취(興趣)가 작품의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여강기둔촌(驪江寄遁村)」(七絶), 「무창(武昌)」(七絶), 「기달가종군(寄達可從軍)」(五律), 「범급(帆急)」(五律), 「차이호연(次李浩然)」(七律), 「강수(江水)」(七律) 등이 대부분 그러하여 이를 확인케 한다.
「범급(帆急)」을 보이기로 한다.
帆急山如走 舟行岸自移 | 돛이 빨라서 산은 달리는 듯하고 배 지나가매 언덕 절로 옮겨지네 |
異鄕頻問俗 佳處強題詩 | 타향에선 자주 풍속 물어보게 되고 아름다운 경치 만나면 억지로 시를 짓네 |
吳楚千年地 江湖五月時 | 오나라와 초나라는 천년의 옛 땅 강호 자연은 오월의 계절이라네 |
莫嫌無一物 風月也相隨 |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다고 꺼려하지 말라 바람과 달이 응당 서로 따를 걸세 |
학자의 시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정취(情趣)가 전편에 넘치고 있으며, 애써 단련한 흔적이 없어 청신(淸新)함을 더해준다.
유숙(柳淑, 1324 충숙왕11~1368 공민왕17, 자 純天, 호 思菴)
은 문집을 남기지 않아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시선집에 전하는 「벽란도(碧欄渡)」(五絶)와 「차가야사주노(次加耶寺住老)」(七律)를 통하여 짐작힐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공민왕(恭愍王)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며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에도 대공(大功)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나, 그의 충직(忠直)을 두려워 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벽란도(碧欄渡)」를 본다.
久負江湖約 風塵二十年 | 오랫동안 강호의 기약 저버리고 풍진 세월 이십년 |
白鷗如欲笑 故故近樓前 | 백구도 비웃는 듯 울음 울며 다락 앞으로 다가오네 |
벽란도(碧瀾渡)는 송사(宋使)가 뱃길로 이르던 곳이다. 유숙(柳淑)이 벽란도(碧欄渡)를 지나며 자연에 은거하지 못하고 일상에 바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본 작품이다. 그러나 유숙(柳淑)은 후일 후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 일을 슬퍼하는 뒷사람들에 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집(李集, 1327 충숙왕1~1387 우왕13, 자 浩然, 호 遁村)
은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 현달(顯達)하지 못했다. 그의 『둔촌잡영(遁村雜詠)」은 잡영(雜詠)ㆍ부록(附錄)ㆍ보편(補編)을 합쳐 84에 지나지 않는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ㆍ척약재(惕若齋) 등과 주고받은 시편으로 보아 시세계의 경계(境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기정상국(寄鄭相國)」(七), 「여주제영(驪州題詠)」(七絶), 「한양도중(漢陽途中)」(五律) 등이다.
「한양도중(漢陽途中)」을 보인다.
病餘身已老 客裏歲將窮 | 병을 앓아 몸 벌써 늙었고 나그네 신세 한해가 다하려 하네 |
瘦馬鳴斜日 羸僮背朔風 | 여윈 말 석양에 울고 약한 아이 삭풍을 등졌네 |
臨津冰合凍 華岳雪連空 | 임진강은 얼음 얼어 걸어 건너기 알맞고, 화악산에 눈이 하늘에 연이었네 |
回首松山下 君門縹緲中 | 머리 돌려 송악산 아래 바라보니 그대 집은 아득히 먼 곳에 있네 |
이 작품은 만년에 객중(客中)의 어려움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특히 병약(病弱)한 기려(羈旅)의 처지를 읊조리고 있는 것이 많지만 군졸함이 없이 쇄락(灑落)하기만 하다.
6) 운석(韻釋)의 시편(詩篇)
고려(高麗) 왕조(王朝)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했지만,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저급한 민간신앙(民間信仰)과 불교신앙(佛敎信仰)이었으며, 이러한 기본 성향(性向)은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된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도 변화의 진폭(振幅)은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귀족적인 고려 왕조의 문화 풍토에서 배출된 불승(佛僧)들 가운데는 유가(儒家)의 관료적(官僚的) 발신(發身)에 필수과정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산문(山門)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이때의 유교는 기본유학(基本儒學) 즉 문학유교(文學儒敎)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학(文學) 수업(修業)은 단순한 종교인의 교양 이상의 것임은 물론이다. 의종(毅宗) 때에 있었던 무신란(武臣亂)으로 문사(文士)들이 수난을 당했을 때 글을 배우고자 하는 학도(學徒)들이 산사(山寺)에 찾아가 승복(僧服) 입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해명하는 보족(補足)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류(女流)와 세류(細流)의 시작(詩作)은 대체로 평이한 것들이 많아 초심자의 시학습에 도움을 주기도 하거니와 고려 일대(一代)를 통하여, 몸은 선문(禪門)에 맡겼지만 정감(情感)이 넘치는 시편을 남긴 승려들도 있다. 불가(佛家)의 종교적 신앙을 노래한 게송(偈頌)이나 설리시(說理詩) 말고도 넉넉히 문인시(文人詩)의 권역(圈域)에 들만한 시작(詩作)을 남긴 운석(韻釋)들도 많다. 시선집에서 뽑아 준 인물로는 종령(宗聆)ㆍ계응(戒膺)ㆍ대각(大覺)ㆍ조영(祖英)ㆍ혜문(惠文)ㆍ요일(寥一)ㆍ달전(達全)ㆍ천인(天因)ㆍ원감(圓鑑)ㆍ진정(眞靜)ㆍ선탄(禪坦)ㆍ탄연(坦然)ㆍ굉연(宏演)ㆍ월창(月窓)ㆍ나옹(懶翁)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특히 달전(達全)ㆍ천인(天因)ㆍ원감(圓鑑)ㆍ진정(眞靜)ㆍ선탄(禪坦)ㆍ굉연(宏演) 등이 여러 편의 가작(佳作)을 남기고 있다.
달전(達全, ?~?)
은 그 생평(生平)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시편은 각종 시선집에서 공통적으로 4편이나 뽑아주고 있으며, 이들이 모두 칠언고시(七言古詩)인 것으로 보아 그의 장처(長處)가 칠언고시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시선집에 뽑힌 그의 대표작으로는 「차운제현국부(次韻諸賢菊賦)」(七古), 「등연경호천사구층대탑(登燕京昊天寺九層大塔)」(七古), 「차이하장진주운(次李賀將進酒韻)」(七古), 「송이원수부진(送李元帥赴鎭)」(七古) 등이 있다.
다음이 「등연경호천사구층대탑(登燕京昊天寺九層大塔)」이다.
龍蛇窟深如夜黑 | 용과 뱀의 굴이 깊어 밤처럼 어두운데 |
日光斜穿滴不滴 | 햇빛이 뚫어도 스며들지 못하네. |
躋攀上了天下白 | 붙잡고 기어오르니 천하가 하얗고 |
紅埃腥風一時窮 | 붉은 티끌 비린 바람이 한꺼번에 없어지네. |
眼中一粟大元國 | 눈 앞에는 대원국(大元國)도 한 낱 좁쌀 같은데 |
莾莾茫茫是何色 | 아득하고 아득한 저것 무슨 빛깔인가? |
血肉之身天外飛 | 속세의 육신이 하늘 밖으로 날아가니 |
仙耶佛耶何處歸 | 신선인가 부처인가 어디로 돌아갈까? |
원래 고조(古調) 장편(長篇)은 힘을 바탕으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거니와, 특히 이 작품은 섬세하게 다듬는 것은 엄두도 내지 않아 무잡(蕪雜)하리 만큼 절로 힘차다. 승과 속 어느 쪽에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주선(住禪)의 처지는 가리우지 못하고 있다.
천인(天因, 1205희종 1~1248고종 35)
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 시호(諡號)는 정명(靜明)이다.
17세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문과(文科)에는 실패하여, 후일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의 제 2세가 되었다. 『청명국사시집(靜明國師詩集)』3권과 『청명국사후집(靜明國師後集)』 1권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로서는 충지(沖止) 다음으로 많은 작품이(17편) 각종 시선집에 선발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차운원상인산중작(次韻院上人山中作)」(五古), 「유사선암유작(遊四仙嵓有作)」(五古), 「차운답지(次韻答之)」(七古) 등의 고시(古詩)가 여러 선발책자에 두루 뽑히고 있어, 그의 고조장편(古調長篇)에 대한 능력을 짐작케 한다.
「유사선암유작(遊四仙嵓有作)」을 보인다.
仙遊邈已遠 嘉境轉幽寂 | 신선 놀던 옛 자취 아득히 이미 먼데 아름다운 경개는 더욱 그윽하네. |
晴川碧如藍 石蘚暖於席 | 맑은 시내는 쪽빛처럼 푸르고 돌이끼는 깔개보다 따뜻하네. |
逍遙能幾時 俛仰忽陳迹 | 소요한들 그 얼마나 할 수 있으리요?? 쳐다 보는 사이에 홀연 묵은 자취되리라. |
淹留非不佳 但恐日易夕 | 오래 머무는 것 좋아하지 아니함 아니지만 다만 해가 쉬 저물까 저어하노라. |
사선(四仙)이 놀던 곳에 올라 감회를 서술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선미(禪味)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고시(古詩)에서 항용하는 고사(故事)의 원용이 자연스러워 부착(斧鑿)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 7구의 ‘사앙홀진적(使仰忽陳迹)’은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보이는 ‘전날 좋아하던 것이 잠깐 사이에 이미 묵은 자취가 되어버렸다[向之所欣, 俛仰之間, 以爲陳迹].’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원감(圓鑑, 1266 원종7~1292 충렬왕18)
의 속성(俗姓)은 위(魏), 명(名)은 법환(法桓)으로 뒤에 충지(沖止)로 개명하였다, 호(號)는 복암(宓庵), 원감(圓鑑)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에서 태어나 문과(文科)에도 급제하였다.
충지(沖止)의 시작(詩作)은 각종 시선집에서 19수를 선발하고 있어 승려로서는 가장 많은 것이 되고 있으며, 특히 「한중잡영(閑中雜詠)」, 「우중수기(雨中睡起)」, 「차박안찰항제밀성(次朴按察恒題密城)」 등은 여러 선발 책자에서 모두 뽑아 주고 있다. 선사(禪師)의 신분이면서도 선속(禪俗) 어느 쪽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중(閑中)의 정취(情趣)를 노래한 시작(詩作)들이 읽는 이의 안광(眼光)을 사로잡는가 하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예사롭게 보아넘기지 아니하고 삶의 구석구석까지 비판하고 있는 운어(韻語)들은 그의 시 세계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한중잡영(閑中雜詠)」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捲箔引山色 連筒分澗聲 | 주렴 걷어 올려 산빛 끌어 들이고 대통 이어 산골 물소리 나누어 갖는다. |
終朝少人到 杜宇自呼名 | 아침 내내 찾아오는 사람 드문데 소쩍새만 스스로 제 이름 부르네 |
이 작품은 문인시의 수준으로도 손색이 없다. 오언시(五言詩)에는, 시의 잘 되고 못됨을 결정짓게 하는 일자(一字)가 있다고 하여 이를 시안(詩眼)이라 부르기도 하거니와, 승구(承句)의 ‘연통분간성(連筒分澗聲)’의 ‘분(分)’은 『장자(莊子)』의 ‘도분(道分)’을 연상케 한다. 대나무 통을 이어 산골 물소리를 ‘나누어 가진다’는 ‘분(分)’이야말로 말로써 나타내기 어려운 경지를 탁 트이게 말해주고 있다. 특히 결구(結句)의 ‘자명호(自呼名)’은, 사물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만유(萬有)의 이치를 깨우쳐 주고 있어 조용한 감동을 준다.
진정(眞靜, ?~?)
의 이름은 천책(天𩑠)이고 진정(眞靜)은 그의 호이다. 그러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진정(眞靜)의 이름도 천책(天𩑠)이므로 양자간의 이동(異同)이 분명치 않다.
다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의하면 진정(眞靜)이 만덕사(萬德寺)에서 『호산록(湖山錄)』을 남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천책(天𩑠)은 진정(眞靜)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작 「안봉사(安峯寺)」는 다음과 같다.
幽徑幾多曲 亂山千萬重 | 그윽한 길 몇 굽이더냐 어지러운 산들 천만겹이네. |
靑纏訪古利 白佛餘淸風 | 푸른 행전으로 옛절을 찾으니 흰 불진에 맑은 바람 분다. |
皓月掛虛閣 閑雲低碧空 | 흰 달은 빈 누각에 걸렸고 한가로운 구름 푸른 하늘에 나직하네. |
踈慵不掃地 殘葉滿庭紅 | 게을러 땅도 쓸지 않아 흩어진 단풍잎 온 뜰에 붉구나. |
불승(佛僧)들의 시작(詩作)이 대체로 그러하거니와 이 작품 역시 말이 적고 조직이 단조로워 읽는 이로 하여금 상쾌감을 주기도 한다.
선탄(禪坦, ?~?)
은 곡성인(谷城人)으로 시(詩)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는 사실밖에는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작품으로는 「와병(臥病)」(七絶), 「능가산중(楞伽山中)」(七絶), 「차보문사(次普門寺)」(七律) 등이 시선집에 전한다.
「와병(臥病)」을 보인다.
鞍馬紅塵半白頭 | 홍진 세상에서 말 타고 다니며 머리가 세었는데 |
楞伽有病早歸休 | 능가산이 그리워 일찍이 돌아 왔네. |
一江煙雨西山暯 | 온 강에 비 내리고 서산에 해 저무는데 |
長捲踈廉不下樓 | 성긴 발 늘 걷어둔 채 누각을 내려오지 않는다. |
승려의 시작답게 구법(句法)이 까다롭지 않아 초심자의 시 학습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작자의 심정과 처지를 평면적으로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굉연(宏然, ?~?)
의 호(號)는 죽간(竹澗),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며 시(詩)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고 한다. 12편에 이르는 시작(詩作)이 각종 시선집에 전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유자청궁(遊紫淸宮)」을 보인다.
洪涯先生舊所隱 | 홍애선생이 옛날에 숨었던 곳 |
階下碧桃花飄零 | 뜰 아래는 벽도화가 흩날리누나. |
夜光出井留丹藥 | 야광이 우물에서 나와 단약에 남아 있고 |
春露浥松生茯苓 | 봄 이슬이 소나무에 젖어 복령이 돋았네. |
天女或携綠玉杖 | 선녀들은 녹옥장을 짚고 있기도 하고 |
仙人自讀黃庭經 | 신선들은 스스로 황정경을 읽고 있네. |
隣寺歸來不五里 | 이웃 절에서 돌아오는 길 오리도 안되는데 |
回頭望斷煙冥冥 | 머리 돌려도 보이지 않고 연기만 아득하네. |
도관(道觀)으로 보이는 차청궁(紫淸宮)에서 놀다가 절로 돌아오면서 지은 것이다. 신선들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을 뿐 선사(禪師)로서의 자기 모습은 잊어버리고 있다. 특별히 다듬은 솜씨를 찾아 볼 수 없어 공졸(工拙)을 논할 수 있는 부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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