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당나라 책에서 최치원 열전을 입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론하다
당서불립최치원열전의(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
按『唐書藝文志,』, 載崔致遠四六一卷, 又刊『桂苑筆耕』十卷.
余未嘗不嘉其中國之廣蕩無外, 不以外國人爲之輕重, 而旣載於史, 又令文集行于世. 然於『文藝列傳』, 不爲致遠特立其傳, 余未知其意也.
若以爲其事績不足以立傳, 則致遠十二渡海入唐遊學, 一擧中甲科及第, 遂爲高騈從事, 檄黃巢, 黃巢氣沮, 後官至道統巡官侍御史. 及將還本國也, 同年顧雲贈「儒仙歌」, 其一句曰: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其自敘亦云: “巫峽重峯之歲, 絲入中華;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蓋言十二而入唐, 二十八而東還也. 其跡章章如此. 以之立傳, 則固與『藝文』所在沈佺期ㆍ柳幷ㆍ崔元翰ㆍ李頻輩之半紙列傳, 有間矣.
若以外國人則已見于志矣, 又於「藩鎭」ㆍ「虎勇」, 則李正己ㆍ黑齒常之等, 皆高麗人也, 各列其傳, 書其事備矣, 奈何於『文藝』, 獨不爲致遠立其傳也?
余以私意揣之, 古之人, 於文章, 不得不嫌忌, 況致遠以外國孤蹤, 入中朝, 躪踏當時名輩, 若立傳, 直其筆, 恐涉其嫌, 故畧之歟. 是余所未知者也.
해석
按『唐書藝文志,』, 載崔致遠四六一卷,
『당서 예문지』【예문지(藝文志): 정사 기록 가운데 그때에 있던 책의 목록】를 살펴보면 최치원의 사육 변려체(騈儷體) 한 권이 게재되어 있고
又刊『桂苑筆耕』十卷.
또한 『계원필경』【계원필경(桂苑筆耕): 책 이름. 20권 4책.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의 시문집.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을 간추려 28권으로 엮어서 헌강왕(憲康王)에게 바친 문집인데, 이중 사시금체부 2권, 오언칠언금체시 1권, 중산복궤집 5권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 최고의 한시문집으로 한문학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열 권을 간행했다고 적혀 있다.
余未嘗不嘉其中國之廣蕩無外,
나는 일찍이 중국의 넓고 자유분방하며 밖을 두지 않음으로(=차별하지 않아)
不以外國人爲之輕重,
외국 사람이라 해서 그것 때문에 경중을 매기지 않아
而旣載於史, 又令文集行于世.
이미 『당서 예문지』에 게재하고 또한 문집을 명하여 세상에 간행함을 좋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然於『文藝列傳』, 不爲致遠特立其傳,
그러나 『문예열전』에 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열전을 입전하지 않았으니,
余未知其意也.
나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若以爲其事績不足以立傳,
만약 사적이 입전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면
則致遠十二渡海入唐遊學, 一擧中甲科及第,
치원이 12살에 황해를 건너 당나라로 입국하여 유학했고 단번에 갑과【갑과(甲科): 과거에서 성적을 차례로 나눈 등급의 하나. 첫째의 장원(壯元), 둘째의 방안(榜眼), 셋째의 탐화(探花)의 세 사람이 이에 속함】 급제에 뽑혔으며
遂爲高騈從事, 檄黃巢, 黃巢氣沮,
마침내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황소(黃巢): 5세 때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후에 과거에 낙방하자 소금 암매매를 업으로 삼았다. 875년 왕선지의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후 허난·산둥, 남으로는 광저우에 이르는 거의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군을 격파하고, 5년 후에는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자결하였다.】에게 격문(檄文)을 써서 황소의 의기가 꺾였으며【저상(沮喪): 의기나 원기의 기운을 잃음, 꺾임, 풀림, 죽음】
後官至道統巡官侍御史.
차후에 관직은 도통순관시어사에 이르렀고
及將還本國也, 同年顧雲贈「儒仙歌」,
장차 신라로 귀국함에 이르러선 급제 동기생인 고운이 「유선가」【유선가(儒仙歌):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중국 사람으로서 최치원과 동년인 고운(顧雲)이 「유선가」를 지어 송별한 것을 말한다. 석우는 정의가 금석과 같이 단단한 벗으로, 여기서는 고운을 가리킨다. 「유선가」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한 구절에 이르기를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 건너 와, 문장이 중화를 뒤흔들었네. 열여덟 살에 사원을 두루 누비며,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리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를 주었으니
其一句曰: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十二乘船渡海來 | 12살에 배 타고 황해 건너 와서는 |
文章感動中華國 |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감동시켰지. |
其自敘亦云: “巫峽重峯之歲, 絲入中華;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스스로 서술하며 또 말했으니 다음과 같다.
巫峽重峯之歲 | 무협중봉의 해에 |
絲入中華 | 미천한 몸으로 중국에 입국했다가 |
銀河列宿之年 | 은하열수의 해에 |
錦還東國 | 비단옷 입고 신라로 돌아왔네. |
蓋言十二而入唐, 二十八而東還也.
대체로 12살에 당나라에 입국했고 28살에 동쪽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니
其跡章章如此.
자취가 드러남이 이와 같은 것이다.
以之立傳, 則固與『藝文』所在沈佺期ㆍ柳幷ㆍ崔元翰ㆍ李頻輩之半紙列傳,
이것들로 입전한다면 진실로 『문예열전』에 실린 심전기【심전기(沈佺期); (656?~713?) 자는 운경(雲卿)으로, 특히 칠언율시에 능하였다】ㆍ유병ㆍ최원한ㆍ이빈【이빈(李頻): (818?~ 876) 당나라 육주(睦州) 수창(壽昌) 사람. 저서에 『건주자사집(建州刺史集)』 1권이 있는데, 『이악집(梨岳集)』이라고도 한다. 『전당시(全唐詩)』에 시가 3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등의 쓸 게 없어 반절만 차지하는 열전에 더불어
有間矣.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若以外國人則已見于志矣,
만약 외국인이기 때문에 입전하지 않았다면 이미 기록에 드러났으며
又於「藩鎭」ㆍ「虎勇」, 則李正己ㆍ黑齒常之等, 皆高麗人也,
또한 「번진열전」【번진(藩鎭): 당(唐)ㆍ오대(五代)ㆍ송(宋)나라 초기에 절도사를 최고 권력자로 한 지방지배체제.】과 「호용열전」에서는 이정기【이정기(李正己, 732∼781):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유민으로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당나라 평로(平盧)에서 출생하였다. 778년(대력 13) 중국의 속적으로 바꿨다. 당나라의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로서 안사(安史)의 이후 산동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중앙권력의 통제권에서 이탈했으며 국왕처럼 행세하였다.】와 흑치상지【흑치상지(黑齒常之, 630? ~ 689): 삼국시대 말기 백제의 장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부흥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전세가 약화되자 유인궤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로 가서는 여러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무고로 옥사했다.】 등은 모두 고려인임에도
各列其傳, 書其事備矣,
각각 전기를 덧붙였고 그 일을 써서 완비했는데
奈何於『文藝』, 獨不爲致遠立其傳也?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은 유독 치원을 위하여 전기를 입전하지 않은 것인가?
余以私意揣之, 古之人,
내가 사사로운 뜻으로 억측해보면 옛 사람은
於文章, 不得不嫌忌,
문장에 있어서 부득불 (자부심이 세서) 미워하고 꺼려했는데
況致遠以外國孤蹤, 入中朝,
하물며 치원은 외국의 외툴이로 중국에 들어와
躪踏當時名輩,
당시의 이름난 문장가들을 짓밟아 버렸으니 오죽할까.
若立傳, 直其筆,
만약 열전을 입전하여 쓰기를 공정히 했다면
恐涉其嫌, 故畧之歟.
문장을 시기하는 데에 이를까 두려웠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리라.
是余所未知者也.
이것이 내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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