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① 최치원 이전의 명작과 최치원의 명작 감상
1. 최치원 이전(以前)엔 두 작품이 명품으로 뽑힘.
1)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詩)」: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내 화를 돋워 살수로 유인하여 대군을 물리쳤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음.
2)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중국의 어떤 시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기에 삼국시대에도 뛰어난 시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2.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의 학자ㆍ경세가. 호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임. 12살에 당으로 건너가 18살에 급제했고, 28살에 귀국했고, 38살에 『시무책(時務策)』을 지었으나 채택되지 못해, 40살에 가야산(伽倻山)에 은둔함. 한시 문집을 남겼기에 문학의 비조(鼻祖)로 여겨짐.
신라에 올 때 당(唐)의 동갑 친구 고운(顧雲)이 준 시는 다음과 같다.
十二乘船渡海來 | 12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
文章感動中華國 |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지. |
十八橫行戰詞苑 | 18살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一箭射破金門策 |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네. |
여기에 최치원이 화답한 시는 다음과 같다.
巫峽重峯之歲 | 무협중봉의 해에 미천한 몸으로 |
絲入中原 | 중원에 들어가. |
銀河列宿之年 | 은하열수【은하열수(銀河列宿): 무협(巫峽)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의 별자리가 있는 데서 연유함.】의 해에 |
錦還東土 | 비단옷을 입고 동토로 돌아왔네. |
3. 최치원의 대표작인 「추야우중(秋夜雨中)」 감상
秋風唯苦吟 擧世少知音 |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니, 온 세상에 절친이 적구나. |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 창밖에 한밤 중 비 오니, 등 앞엔 만리를 달리는 마음. |
1) 이 시는 당에서 썼다고 알려졌으나, 『계원필경』(당에서 지은 시만 모아놓음)에 실려 있지 않기에, 신라에서 지은 걸 알 수 있음. 그렇기에 만리심(萬里心)은 ‘향수’가 아닌, ‘불우한 삶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임.
2) 한시의 형식 중 근체시에 속하며 근체시의 법칙은 다음과 같음
① 이사육부동(二四六不同): 짝수 글자의 평측이 겹쳐선 안 된다.
② 일삼오불론(一三五不論): 홀수 글자의 평측은 상관없다.
③ 이육통(二六通): 두 번째와 여섯 번째 글자의 평측은 같아야 한다.
④ 점법(粘法): 한 연(聯)을 건너뛰며 평측이 같음
⑤ 반법(反法): 각 연마다 2ㆍ4ㆍ6자의 평측이 다름.
② 한시엔 내부와 외부에 소리가 있다
1. 최치원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기에 고운(孤雲)이란 호를 짓고 살아감.
1) 이백의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하늘에 외로이 떠도는 구름에 자신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음.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閒 | 뭇 새 높이 날아 사라지고 조각구름 홀로 떠나 한가롭구나. |
2) 도연명의 「영빈사(詠貧士)」: 빈한한 선비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상한 것인지도 모름.
萬族各有託 孤雲獨無依 | 만물은 각각 의지할 게 있는데 조각구름만 홀로 의지할 곳 없어라. |
2. 삼천리 강산을 떠돌다가 40살인 896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함.
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鵠嶺靑松, 鷄林黃葉]’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 듯함.
2) 후세 김일손이 가야산을 “기(氣)가 빼어나 속세를 끊고 있어 선일자(仙逸者)가 머물 만하다.”고 할 정도의 산임
3.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狂奔疊石吼重巒 | 첩첩한 바위에 무겁게 달려 겹겹한 산이 울려 |
人語難分咫尺間 | 지척에서도 사람들의 말 분간하기 어려워. |
常恐是非聲到耳 | 항상 시비의 소리 귀에 닿을까 두려워 |
故敎流水盡籠山 | 일부러 흐르는 물로 다 산을 둘렀네. 『孤雲集』 |
1) 이 시는 홍류동 계곡 바위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음. 그래서 홍류동 바위를 ‘최공제시석(崔公題詩石)’이라 하며 제시석, 시석이라고도 함. 오늘날의 남은 글씨는 송시열이 새로 쓴 것임.
2) 김종직이 「홍류동(紅流洞)」에서 “九曲飛流激怒雷, 落紅無數逐波來”라고 노래했듯이, 미친 듯이 달리는 물결에 사람 말소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음.
3) 1구의 ‘달리다[奔]’가 ‘내뿜다[噴]’로 된 문집도 있어 모두 좋음.
奔 | 미친 듯이 물이 급하게 달리는 역동성이 돋보임. |
噴 | 바위에 부딪친 물결이 포말을 이루어 휘날리는 시각적 심상이 더욱 구체성을 띰. |
4) 시의 소리엔 시적 내부에 존재하는 내부의 소리와 소리 내어 읽을 때 나는 외부의 소리가 있음. 기구(起句)를 읽을 때 강하고 높은 소리로 거센 물소리와 함께 최치원의 분노성(忿怒聲)을 느낄 수 있음.
5) 4구의 ‘에워싸다[籠]’를 ‘귀머거리[聾]’라 한 문집도 있지만 적절치 않음
籠→聾 | 물소리에 지나치게 끌려 산을 귀머거리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시의(詩意)에 어울리지 않음. |
6) 홍만종도 『소화시평』 상권 65번에서 홍유손이 흉내낸 시를 보고 최치원의 원작만 못하다고 평가하기도 했음.
③ 시의 거센 소리만으로 작가의 울분을 알 수 있다
1. 삶이 완만할 때 쓰인 시는 소리가 부드럽지만 삶이 맘처럼 안 될 때는 분노의 소리가 담겨 소리가 거칠어짐.
2. 황정욱(1532~1607): 엘리트 코스를 두루 밟아 청직(淸職)과 요직을 거쳤음. 손녀가 선조의 아들 순화군(順和君)과 혼인하여 외척(外戚)의 지위를 누림. 함경도로 임란 발발로 피난 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이 왜와 내통함으로 감금됐고, 왜장이 왕자를 죽인다고 협박하여 거짓항복문서를 쓰며 언문편지로 ‘탈출시키겠다’는 편지를 씀. 하지만 언문(諺文) 편지는 폭우로 사라져 길주로 유배 갔다가 한참 후에야 해배되어 노량진에 거주함.
3. 허균(1569~1618): 중기 문신.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ㆍ학산(鶴山)ㆍ성소(惺所)ㆍ백월거사(白月居士).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시는 삼당시인 이달의 문하에서 배움. 명문가의 후손으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지나친 방달함으로 거듭 탄핵되어 파직된 끝에 겨우 수안군수로 감.
詩才突兀行間出 | 시재 우뚝하여 무리 중에 뛰어난데 |
宦路蹉跎分外奇 | 벼슬길 미끄러지니, 삶이 분수 이상으로 기구하기만 하네. |
摠是人生各有命 | 모든 사람의 삶이 각각 운명이 있으니 |
悠悠餘外且安之 | 유유하게 남은 생을 또한 편안히 하시게. |
1) 1604년 좌천되어 수안군수로 부임하는 허균을 보내면서 이 시를 지음.
2) 먼저 허균의 뛰어난 재능을 말하고, 그럼에도 외직으로 나가야 하는 기구한 현실을 말함.
3) 3~4구에선 운명이니 세상사에 편안히 대처하라고 당부의 말을 함.
4) 경물의 묘사나 감정의 표출과 같은 절구시의 전형적인 장법(章法)이 여기엔 없음.
5) 모든 것이 산문적 진술일 뿐이며, 소리 내어 읽어보면 침이 튈 정도로 소리가 거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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