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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 1. 글자로 쌓은 탑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 1. 글자로 쌓은 탑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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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豆巴

滿面花

雨打浮沙

蜜蜂錯認家

荔枝核桃苦瓜

滿天星斗打落花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이것은 중국 사천 사람들이 곰보를 놀리는 노래이다. 한 글자에서 차례로 한 글자 씩 일곱 자까지 늘여 나갔다. 각 구절의 끝은 같은 운자를 쓰는 면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국음으로 읽어보면 그 자체로 매우 유쾌한 절주를 형성한다. 처음 무얼까? 하는 의문을 던져 놓고, 바로 콩이지 뭐야 하고 받는다. 다시 그 콩은 얼굴에 핀 꽃을 말하는데, 모래밭에 빗방울이 떨어진 형상과 같다. 벌집 같은 그 모습에 꿀벌도 제 집인양 착각할 지경이다. 여지(荔枝)나 복숭아씨나 맛이 쓴 외는 모두 껍질이 쭈글쭈글하여 곰보의 얼굴을 떠올리는 과일들이다. 하도 얽은 그 얼굴은 마치 하늘의 뭇 별들이 가련히 지는 꽃잎을 난타한 듯 참혹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곰보라는 말은 직접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진술이 곰보라는 어휘와 연결되는 순간, 진술은 갑자기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통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조선 후기 사설시조에도 곰보를 가지고 장난친 것이 있다. 안민영의 바독 걸쇠라는 사설시조다.

 

 

바독 걸쇠 갓치 얽은 놈아 졔발 비네게

 

물가의란 오지 말라 눈 큰 준치 헐이 긴 갈치 두룻쳐 메육이 츤츤 감을치 문어(文魚)의 아들 낙제(落蹄) 넙치의 가잠이 부른 올창이 공지 결레 만혼 권장이 고독(孤獨) 암장어() 갓튼 고와 바늘 갓흔 숑리 눈 긴 농게 입 쟉은 병어(甁魚)가 금을만 넉여 풀풀 여 다 달아나는듸 열업시 상긴 오적어(烏賊魚) 는듸 그 놈의 손자(孫子) 골독(骨獨)쓰는듸 바소 갓튼 말검어리와 귀영자(纓子) 갓튼 장고아비는 암으란 줄도 모르고 즛들만

 

암아도 너곳 겻틔 잇시면 곡이 못 자바 대사(大事)ㅣ로다.

 

 

요컨데는 바둑판 무늬처럼 얼굴이 얽은 곰보에게 제발 물 가엘랑은 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왜 그런가? 곰보가 물가에 나타나기만 하면 물속의 온갖 물고기들이 그물인 줄로만 알고 풀풀 뛰어 다 달아나 버리고, 정작 아무 짝에 쓸 데 없는 말거머리와 장고아비만 남으니, 고기를 못 잡아 큰일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신소리이다. 그렇지만 위 중국 사람들의 곰보 노래와 마찬가지로, 이 사설시조에도 별 뜻없는 어휘를 쭉욱 야단스레 늘어놓는 데서 오는 말을 씹는 재미가 특별나다.

 

한시 중에는 이렇듯 글자가 차례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가 있다. 이에 대해 예전에는 특별한 명칭 없이 그저 자일언지칠(自一言至七)’ 등으로 말하곤 했다. 이를 일반적으로 층시(層詩)라고도 하고, 탑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보탑시(寶塔詩)라 하기도 한다. 이 시의 처음 출발은 이백(李白)357언으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를 지으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를 모방한 창작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후세 시인들의 경쟁심리가 보태져서, 다시 1357이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위의 예처럼 아예 1에서 7까지 차례로 늘어나는 형태가 나타났다. 이런 경쟁은 끝이 없게 마련이어서, 우리나라의 여류시인 운초(雲楚)는 무려 1에서 16에 이르는 장편의 층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1에서 10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까지 줄어드는 마름모꼴의 창작도 있다.

 

 

다음은 고려 때 승려 시인 혜심(慧諶)의 시이다. 1에서 10까지 차례로 늘어나고 있다. 물론 운자도 지켰다. 원 제목은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韻)이다.

 

 

隨業

受身

苦樂果

善惡因

不循邪妄

常行正眞

粃糠兮富貴

甲胄兮仁義

況須參玄得眞

自然換骨淸神

體不是火風地水

心亦非緣慮垢塵

沒縫塔中燈燃不夜

無根樹上花發恒春

風磨白月兮誰病誰藥

雲合靑山也何舊何新

一道通方爲聖賢之所履

千車共轍故古今而同進

 

사람

사람.

업을 따라

그 몸을 받네.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함 악함의 인과로다.

사악함 망녕됨 따르지 말고

언제나 바르고 참됨을 행하라.

부귀라 하는 것 쌀겨와 같다면

인의라 하는 것은 갑옷과 투구로다.

하물며 오묘한 이치 깨쳐 참됨 얻으면

저절로 바탕이 바뀌고 정신도 맑아지리.

내 이 몸은 불과 바람, 땅과 흙이 아니며

마음은 인연과 염려, 티끌 먼지 아닐래라.

이어 붙인 자취 없는 탑에 등불은 밤이 없고

뿌리도 없는 나무 위에 꽃이 피니 늘 봄이라.

바람이 밝은 달을 갈 때에 뉘 병들고 나았으며

구름이 청산과 하나 되니 옛것과 새것 그 뉘러뇨.

시원스레 뚫린 이 길은 성현들께서 밟아오신 바이니

온갖 수레 바퀴가 같아 예나 지금이나 함께 전진하네.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생의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때의 덧없는 부귀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무봉탑(無縫塔)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無根樹)에 꽃이 핌과 같이 그 마음을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노닐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여기서 무봉탑과 무근수란 자아를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쌓아 놓은 글자의 배열이 또한 무봉탑의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개화기의 잡지 청춘6(1915.3)에는 매우 흥미로운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조판의 어려움 때문에 원래 상태로는 보여줄 수 없어 유감이지만,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 세로 14자씩 배열하여, 글자는 중앙을 향하도록 방사형으로 배치하였다. 제목은 부벽루기(浮碧樓記)이다. 읽는 법은 중앙의 글자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한 글자씩 차례로 늘려 읽는 것이다. 펼쳐 보면 이 작품은 1자로부터 10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자까지 줄어드는 마름모꼴의 특이한 시형이 된다.

 

 

江岸

城頭

浮碧空

帶長流

壯觀四海

雄壓西州

側身窺宇宙

引手挽牛斗

仙人所以好居

騷客幾多來遊

風烟四節各殊狀

人事千年等幻漚

乙密臺邊神馬不還

麒麟窟裏古跡空留

高登雕欄頓覺逸興生

逈挹平原便欣塵慮休

丹靑曜日一杯可消百憂

寒氣逼骨五月疑是九秋

僧歸暮寺時聞響竹笻

客過烟浦每見倚蘭舟

東望香爐衆峰兀兀

西指京洛驛路悠悠

花明渡口開雲錦

月到波心掛玉鉤

靑槐遙連柳堤

歌曲時和漁謳

山川獨依舊

風景猶帶羞

名區久別

時序先遒

雖欲居

誠難留

騁眸

擡首

 

누각

누각.

강언덕

성 머리.

허공에 떠

긴물결 둘렀네.

장하게 사해 보며

웅장히 서주 누르네.

몸기울여 우주를 엿보고

손끌어 북두견우를 당기네.

신선들 거처하기 좋은 곳이요

시인들 얼마나 많이 와 놀았던고.

바람안개 사계절 각기 다른 그 모습

천년간 사람 일은 허깨비요 물거품일세.

을밀대 곁으로 신마는 돌아올 줄 모르나니

기린굴 속에는 옛날의 자취만 쓸쓸히 남았네.

채색 난간 오르니 문득 맑은 흥 일어남 깨닫겠고

멀리 평원 바라보니 문득 티끌 생각 사라짐 기뻐라.

단청에 해 비치니 한잔 술에 온갖 근심 사라져 버리고

찬 기운 오싹 뼈에 스며 오월에도 한 가을인가 의심한다네.

중이 저물녘 절에 돌아가니 이따금 대지팡이 소리 들리고

객은 내낀 물가 지나다 언제나 목란 배에 기댐을 보네.

동편으로 향로봉 바라보면 뭇 메들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 서울 쪽 가리키면 역마 길은 아득해라.

나루 어귀 핀 꽃은 구름 비단 펼친 듯 하고

강바닥에 이른 달빛은 옥갈고리 걸은 듯.

홰나무는 멀리 버들 둑에 맞닿았고

노래 소린 어부가에 화답한다네.

산천만은 홀로 변함이 없는데

경치는 오히려 부끄럽구나.

이 좋은 곳 떠나려니

계절이 먼저 가서,

더 머물고싶어도

그럴 수 없어,

바라보다가

고개 들면,

근심

근심

 

 

번역도 의식적으로 마름모꼴이 되도록 해 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문자유희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장난기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시인은 까다로운 제한을 걸어 놓고, 여기에 진중한 내용을 담아 자신의 언어구사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층시의 전통은 개화기 시가에서 그 편린을 보이다가 조지훈의 백접(白蝶)에 와서 다시 재현된다.

 

 

밤 꽃 불 슬 고 정 가 병 하 너 조 기 가 작 꽃 별 노 한

진 다 픈 요 가 슴 들 이 는 촐 쁜 슴 은 피 섬 래

가 피 히 로 에 거 얀 갔 히 노 가 는 겨

리 지 운 눈 라 구 사 래 을

라 눈 물 아 나 라 숨 되

물 지 픈 고 잊 진 진 고

고 가 운 히

아 는

 

 

가운데를 접으면 마치 한 마리 나비 모양이다. 일부러 9자구를 생략하여 나비 날개의 가운데 부분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밖에 시를 회화적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외국시의 경우에도 흔히 발견된다.

 

 

 

 

인용

목차

1. 글자로 쌓은 탑

2. 바로 읽고 돌려 읽고

3.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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