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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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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豆巴

滿面花

雨打浮沙

蜜蜂錯認家

荔枝核桃苦瓜

滿天星斗打落花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이것은 중국 사천 사람들이 곰보를 놀리는 노래이다. 한 글자에서 차례로 한 글자 씩 일곱 자까지 늘여 나갔다. 각 구절의 끝은 같은 운자를 쓰는 면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국음으로 읽어보면 그 자체로 매우 유쾌한 절주를 형성한다. 처음 무얼까? 하는 의문을 던져 놓고, 바로 콩이지 뭐야 하고 받는다. 다시 그 콩은 얼굴에 핀 꽃을 말하는데, 모래밭에 빗방울이 떨어진 형상과 같다. 벌집 같은 그 모습에 꿀벌도 제 집인양 착각할 지경이다. 여지(荔枝)나 복숭아씨나 맛이 쓴 외는 모두 껍질이 쭈글쭈글하여 곰보의 얼굴을 떠올리는 과일들이다. 하도 얽은 그 얼굴은 마치 하늘의 뭇 별들이 가련히 지는 꽃잎을 난타한 듯 참혹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곰보라는 말은 직접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진술이 곰보라는 어휘와 연결되는 순간, 진술은 갑자기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통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조선 후기 사설시조에도 곰보를 가지고 장난친 것이 있다. 안민영의 바독 걸쇠라는 사설시조다.

 

 

바독 걸쇠 갓치 얽은 놈아 졔발 비네게

 

물가의란 오지 말라 눈 큰 준치 헐이 긴 갈치 두룻쳐 메육이 츤츤 감을치 문어(文魚)의 아들 낙제(落蹄) 넙치의 가잠이 부른 올창이 공지 결레 만혼 권장이 고독(孤獨) 암장어() 갓튼 고와 바늘 갓흔 숑리 눈 긴 농게 입 쟉은 병어(甁魚)가 금을만 넉여 풀풀 여 다 달아나는듸 열업시 상긴 오적어(烏賊魚) 는듸 그 놈의 손자(孫子) 골독(骨獨)쓰는듸 바소 갓튼 말검어리와 귀영자(纓子) 갓튼 장고아비는 암으란 줄도 모르고 즛들만

 

암아도 너곳 겻틔 잇시면 곡이 못 자바 대사(大事)ㅣ로다.

 

 

요컨데는 바둑판 무늬처럼 얼굴이 얽은 곰보에게 제발 물 가엘랑은 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왜 그런가? 곰보가 물가에 나타나기만 하면 물속의 온갖 물고기들이 그물인 줄로만 알고 풀풀 뛰어 다 달아나 버리고, 정작 아무 짝에 쓸 데 없는 말거머리와 장고아비만 남으니, 고기를 못 잡아 큰일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신소리이다. 그렇지만 위 중국 사람들의 곰보 노래와 마찬가지로, 이 사설시조에도 별 뜻없는 어휘를 쭉욱 야단스레 늘어놓는 데서 오는 말을 씹는 재미가 특별나다.

 

한시 중에는 이렇듯 글자가 차례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가 있다. 이에 대해 예전에는 특별한 명칭 없이 그저 자일언지칠(自一言至七)’ 등으로 말하곤 했다. 이를 일반적으로 층시(層詩)라고도 하고, 탑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보탑시(寶塔詩)라 하기도 한다. 이 시의 처음 출발은 이백(李白)357언으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를 지으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를 모방한 창작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후세 시인들의 경쟁심리가 보태져서, 다시 1357이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위의 예처럼 아예 1에서 7까지 차례로 늘어나는 형태가 나타났다. 이런 경쟁은 끝이 없게 마련이어서, 우리나라의 여류시인 운초(雲楚)는 무려 1에서 16에 이르는 장편의 층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1에서 10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까지 줄어드는 마름모꼴의 창작도 있다.

 

 

다음은 고려 때 승려 시인 혜심(慧諶)의 시이다. 1에서 10까지 차례로 늘어나고 있다. 물론 운자도 지켰다. 원 제목은 차금성경사록종일지십운(次錦城慶司祿從一至十韻)이다.

 

 

隨業

受身

苦樂果

善惡因

不循邪妄

常行正眞

粃糠兮富貴

甲胄兮仁義

況須參玄得眞

自然換骨淸神

體不是火風地水

心亦非緣慮垢塵

沒縫塔中燈燃不夜

無根樹上花發恒春

風磨白月兮誰病誰藥

雲合靑山也何舊何新

一道通方爲聖賢之所履

千車共轍故古今而同進

 

사람

사람.

업을 따라

그 몸을 받네.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함 악함의 인과로다.

사악함 망녕됨 따르지 말고

언제나 바르고 참됨을 행하라.

부귀라 하는 것 쌀겨와 같다면

인의라 하는 것은 갑옷과 투구로다.

하물며 오묘한 이치 깨쳐 참됨 얻으면

저절로 바탕이 바뀌고 정신도 맑아지리.

내 이 몸은 불과 바람, 땅과 흙이 아니며

마음은 인연과 염려, 티끌 먼지 아닐래라.

이어 붙인 자취 없는 탑에 등불은 밤이 없고

뿌리도 없는 나무 위에 꽃이 피니 늘 봄이라.

바람이 밝은 달을 갈 때에 뉘 병들고 나았으며

구름이 청산과 하나 되니 옛것과 새것 그 뉘러뇨.

시원스레 뚫린 이 길은 성현들께서 밟아오신 바이니

온갖 수레 바퀴가 같아 예나 지금이나 함께 전진하네.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생의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때의 덧없는 부귀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무봉탑(無縫塔)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無根樹)에 꽃이 핌과 같이 그 마음을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노닐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여기서 무봉탑과 무근수란 자아를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쌓아 놓은 글자의 배열이 또한 무봉탑의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개화기의 잡지 청춘6(1915.3)에는 매우 흥미로운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조판의 어려움 때문에 원래 상태로는 보여줄 수 없어 유감이지만,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 세로 14자씩 배열하여, 글자는 중앙을 향하도록 방사형으로 배치하였다. 제목은 부벽루기(浮碧樓記)이다. 읽는 법은 중앙의 글자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한 글자씩 차례로 늘려 읽는 것이다. 펼쳐 보면 이 작품은 1자로부터 10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자까지 줄어드는 마름모꼴의 특이한 시형이 된다.

 

 

江岸

城頭

浮碧空

帶長流

壯觀四海

雄壓西州

側身窺宇宙

引手挽牛斗

仙人所以好居

騷客幾多來遊

風烟四節各殊狀

人事千年等幻漚

乙密臺邊神馬不還

麒麟窟裏古跡空留

高登雕欄頓覺逸興生

逈挹平原便欣塵慮休

丹靑曜日一杯可消百憂

寒氣逼骨五月疑是九秋

僧歸暮寺時聞響竹笻

客過烟浦每見倚蘭舟

東望香爐衆峰兀兀

西指京洛驛路悠悠

花明渡口開雲錦

月到波心掛玉鉤

靑槐遙連柳堤

歌曲時和漁謳

山川獨依舊

風景猶帶羞

名區久別

時序先遒

雖欲居

誠難留

騁眸

擡首

 

누각

누각.

강언덕

성 머리.

허공에 떠

긴물결 둘렀네.

장하게 사해 보며

웅장히 서주 누르네.

몸기울여 우주를 엿보고

손끌어 북두견우를 당기네.

신선들 거처하기 좋은 곳이요

시인들 얼마나 많이 와 놀았던고.

바람안개 사계절 각기 다른 그 모습

천년간 사람 일은 허깨비요 물거품일세.

을밀대 곁으로 신마는 돌아올 줄 모르나니

기린굴 속에는 옛날의 자취만 쓸쓸히 남았네.

채색 난간 오르니 문득 맑은 흥 일어남 깨닫겠고

멀리 평원 바라보니 문득 티끌 생각 사라짐 기뻐라.

단청에 해 비치니 한잔 술에 온갖 근심 사라져 버리고

찬 기운 오싹 뼈에 스며 오월에도 한 가을인가 의심한다네.

중이 저물녘 절에 돌아가니 이따금 대지팡이 소리 들리고

객은 내낀 물가 지나다 언제나 목란 배에 기댐을 보네.

동편으로 향로봉 바라보면 뭇 메들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 서울 쪽 가리키면 역마 길은 아득해라.

나루 어귀 핀 꽃은 구름 비단 펼친 듯 하고

강바닥에 이른 달빛은 옥갈고리 걸은 듯.

홰나무는 멀리 버들 둑에 맞닿았고

노래 소린 어부가에 화답한다네.

산천만은 홀로 변함이 없는데

경치는 오히려 부끄럽구나.

이 좋은 곳 떠나려니

계절이 먼저 가서,

더 머물고싶어도

그럴 수 없어,

바라보다가

고개 들면,

근심

근심

 

 

번역도 의식적으로 마름모꼴이 되도록 해 보았다. 이러한 종류의 문자유희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장난기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시인은 까다로운 제한을 걸어 놓고, 여기에 진중한 내용을 담아 자신의 언어구사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층시의 전통은 개화기 시가에서 그 편린을 보이다가 조지훈의 백접(白蝶)에 와서 다시 재현된다.

 

 

밤 꽃 불 슬 고 정 가 병 하 너 조 기 가 작 꽃 별 노 한

진 다 픈 요 가 슴 들 이 는 촐 쁜 슴 은 피 섬 래

가 피 히 로 에 거 얀 갔 히 노 가 는 겨

리 지 운 눈 라 구 사 래 을

라 눈 물 아 나 라 숨 되

물 지 픈 고 잊 진 진 고

고 가 운 히

아 는

 

 

가운데를 접으면 마치 한 마리 나비 모양이다. 일부러 9자구를 생략하여 나비 날개의 가운데 부분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밖에 시를 회화적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외국시의 경우에도 흔히 발견된다.

 

 

 

2. 바로 읽고 돌려 읽고

 

 

청나라 때 북경에 천연거(天然居)’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건륭황제가 이것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客上天然居 居然天上客 나그네 천연거에 올라가더니 느긋히 천상의 객이 되었네.

 

두 구절의 글자 배열을 보면 둘째 구는 첫 구를 뒤집어 읽은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읽고 거꾸로 읽어 두 구를 만들었다. 그러자 기효람(紀曉嵐)이 이렇게 받았다.

 

人過大佛寺 寺佛大過人 사람이 큰 절간을 지나가는데 절의 부처 사람보다 훨씬 크더라.

 

역시 첫 구를 거꾸로 하여 둘째 구로 얹은 것이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雁飛平頂山 山頂平飛雁 기러기 평정산을 날아가는데 산꼭대기 기러기 떼 가지런하네.

 

花香滿園亭 亭園滿香花 꽃이 만원정에 향기로우니 정원이 꽃 향기로 가득하구나.

 

위의 구절들 또한 앞서와 같은 원리로 이루어졌다. 한자가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재미있는 구절들이다.

 

한시 가운데 회문체라는 것이 있는데, 내리 읽으나 치읽으나 의미가 통하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측이나 압운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므로 그 제한이 몹시 까다롭다. 보통 회문체는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배열하여 바로 읽거나 거꾸로 읽거나 모두 자연스레 의미가 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밖에도 특별히 바둑판처럼 시문을 배열한다든지 중앙으로부터 선회하여 읽는다든지, 순환 반복하여 읽어야 의미가 통한다던지 하는 것도 있다.

 

 

먼저 기본 형태의 회문시를 한 수 읽어보자.

 

腸斷啼鶯春 落花紅蔟地 꾀꼬리 우는 봄날 애끊는 마음 진 꽃은 온 땅을 붉게 덮었네.
香衾曉枕孤 玉臉雙流淚 이불 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해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네.
郎信薄如雲 妾情搖似水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인 듯 제 마음은 일렁이는 강물 같네요.
長日度與誰 皺却愁眉翠 긴 날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근심 겨워 찡그린 상 물리쳐 볼까.

 

이규보(李奎報)미인원(美人怨)이란 작품이다. 창밖에는 이른 새벽부터 꾀꼬리가 울고, 방안 이불 속에는 이른 아침부터 두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누워 있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뒤숭숭한 꿈에서 막 깨어났는데, 그녀의 잠을 깨운 것은 꾀꼬리의 울음소리였다. 설레이는 마음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간밤 비에 떨어진 꽃잎이 마당을 붉게 덮었다. 떨어진 꽃잎은 그녀로 하여금 불길한 예감과 함께 하염없는 이별의 슬픔에 잠겨들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뜬 구름 같은 님의 약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번연히 안 오실 것을 알면서도 강물처럼 출렁대는 기다림으로 그녀는 하루하루를 지탱해 간다. 새벽부터 그녀는 또 이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다. 진 꽃을 바라보는 상심은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을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노래했던 영랑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翠眉愁却皺 誰與度日長 눈썹은 근심 겨워 찌푸려 있어 뉘와 함께 긴 날을 지내어 볼까.
水似搖情妾 雲如薄信郞 강물은 내 마음인 양 넘실거리고 구름은 믿음 없는 님 마음 같네.
淚流雙臉玉 孤枕曉衾香 두 뺨에 옥 같은 눈물 흐르고 외론 베개 새벽 이불 향기롭구나.
地蔟紅花落 春鶯啼斷腸 땅에 가득 붉은 꽃이 떨어지더니 봄 꾀꼬리 애 끊을 듯 울어대누나.

 

이번엔 앞서의 시를 거꾸로 읽어 보자. 즉 앞 시의 첫 자가 끝 자가 되고, 끝 자가 첫 자가 되도록 뒤집어 읽으면 위와 같이 된다. 그녀는 근심 속에 인상을 쓰고 있는데, 긴 날을 함께 보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넘실대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꼭 그녀의 마음인 듯 하고,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신의 없는 님의 약속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새벽녘 외로운 베개를 적시고 있다. 창밖에선 그녀의 시드는 청춘을 조상하듯 분분히 꽃잎이 지고, 꾀꼬리도 가는 봄이 아쉬워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운자를 앞뒤로 맞춰야 하고, 의미도 거꾸로 읽을 때를 대비해야 하나 제약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상이 전개가 자연스럽고, 앞뒤로 읽어 어느 것 하나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없다.

 

 

회문시 중에는 글자를 하나씩 밀려서 읽어도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차 주전자에 흔히 써넣는 다호시(茶壺詩)이다. ‘가이청심야(可以淸心也)’라는 다섯 글자가 써 있는데, 이를 한 글자씩 밀면서 읽으면 이렇게 된다.

 

可以淸心也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고
以淸心也可 맑은 마음으로 마셔도 좋다.
淸心也可以 맑은 마음으로도 괜찮으니
心也可以淸 마음도 맑아질 수가 있고
也可以淸心 또한 마음을 맑게 해준다.

 

둥근 차 주전자에 돌려가며 쓴 글이니 사실 어느 글자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 글자부터 읽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자자회문시(字字廻文詩)’라고 한다.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문시는 제()ㆍ량()에서 시작되었으니 대개 문자의 유희일 뿐이다. 옛날 두도(竇滔)의 아내 소혜(蘇惠)가 비단을 짠 뒤에도 그 법이 오히려 남아 있어, 송 삼현(三賢)이 또한 모두 뛰어났다. 대저 회문시란 바로 읽어도 순조롭고 쉬우며, 거꾸로 읽더라도 뻑뻑하거나 껄끄러운 태가 없이 말과 뜻이 모두 묘한 뒤라야 좋다고 할 수 있다.

回文詩起, 盖文字中戱耳. 竇稻妻織錦之後, 杼袖猶存, 而宋三賢亦皆工焉.

夫回文者, 順讀則和易, 而逆讀之亦無聲牙艱澁之態, 語意俱妙, 然後謂之工.

 

 

여기서 이인로(李仁老)가 말한 소혜의 직금이란 회문선기도직금(回文璇璣圖織錦)’이 본래 이름인데, 하늘의 별자리 문양인 선기도안(璇璣圖案) 위에 가로 세로 각 29자 씩 841자를 바둑판처럼 수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841자를 수놓은 것을 돌려 읽거나 가로 세로로 읽거나 대각선으로 읽거나 건너 뛰어 읽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게 되면 무려 200여수의 아름다운 시를 얻을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역대로 이를 읽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 여러 편 제출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의 직금도가 널리 성행하였다. 개화기 때는 아예 소약란직금도(蘇若蘭織錦圖)란 제목의 딱지본 소설까지 나왔다. 이후로 이를 응용하거나 변용한 다양한 형태의 작금도가 선보였다. 몇 예를 보이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위의 두 그림은 필사본 고전소설 옥린몽(玉麟夢)에 나오는 삽화이고, 아래 두 그림은 규방미담(閨房美談)에 보인다. 이 작품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 수십 수에서 수백 수의 시를 조합해낼 수 있다. 직금(織錦)이라 한 것은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아낙이 비단에 한 글자씩 수를 놓아 편지 대신에 부치곤 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은 거북 모양으로 수놓은 직금도의 일종으로 당나라 때 변방의 장수였던 장규(張壄)의 아내가 지은 시이다.

 

 

鄕 離

還 已

早 是

敎 征 客 十 秋 强

天 子 願 對 鏡 那

獻 堪

形 龜 作 妝 理 重

繡 聞

腸 雁

砧 更 斷 幾 廻 修

調 尺

杵 拂 淚 霜 見 素

垂 先 練 製 爲 先

疊 衣

箱 裳

 

 

글자의 배열을 따라 선을 이으면 완연한 거북의 모양이 이루어진다. 남편 장규가 변방으로 떠난 지 10여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아내 후씨(侯氏)는 이 시를 수놓아 대궐에 가서 천자께 바쳤다. 이를 받아본 당 무종(武宗)은 그녀의 재주를 높이 사, 남편을 고향에 돌아오게 하였다. 아울러 비단 삼백필의 부상을 내렸다. 위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제일 위 글자로부터 오른편 시계방향으로 빙 돌면서 차례로 읽는다. 아래 원문과 위 거북이 형태를 비교해 보자.

 

睽離已是十秋强 우리 님과 헤어진지 10년도 넘어
對鏡那堪重理妝 거울 보며 화장함이 그 언제던가.
聞雁幾廻修尺素 기러기 울어 옐 제 편지 쓰기 몇 번이며
見霜先爲製衣裳 서리 지면 서둘러 님의 옷을 지었다오.
開箱疊練先垂淚 상자 열면 명주옷에 눈물이 먼저 지고
拂杵調砧更斷腸 방망이로 다듬이질 다시 애가 끊누나.
繡作龜形獻天子 거북 모양 수를 놓아 천자께 바치오니
願敎征客早還鄕 수자리 군사 일찍 돌아오게 해주옵소서.

 

직금도란 비단에 한 땀 한 땀 글자를 수놓아 이루는 것이므로, 자연히 여인네의 규정을 노래하는 것이 보편적 관습이 되었던 듯하다.

 

 

이제 그 한 예를 보기로 하자. 다음은 한나라 때 소백옥(蘇伯玉)의 아내가 멀리 촉 땅에 있는 남편을 그리며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쟁반 가운데 써서 보냈다는 반중시(盤中詩)이다.

 

이 시는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정 중앙의 ()’자에서 아래 ()’자로 내려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다시 그 다음 원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해 읽으면 다음과 같은 3자시가 된다.

 

山樹高 산엔 나무가 높이 솟았고
鳥鳴悲 새는 구슬피 울음 우누나.
泉水深 흐르는 샘물은 깊기도 한데
鯉魚肥 뛰노는 잉어는 살이 올랐네.
空倉雀 텅빈 창고에 사는 참새가
常苦飢 언제나 주림으로 괴로워 하듯,
吏人婦 벼슬살이 떠나간 이의 아내는
會夫稀 지아비 만나보기 정말 힘드네.
出門望 문을 나가 멀리를 바라보자니
見白衣 흰 옷 입은 사람이 멀리 뵈길래,
謂當是 바로 우리 님이야 소리쳤더니
而更非 가까이 와서 보니 다시 아닐세.
還入門 돌아와 문 닫고 들어서자니
中心悲 이 내 마음은 슬퍼만 지네.
北上堂 북으로 당() 위에 올라가서는
西入階 서편의 계단으로 들어온다오.
急機絞 서둘러 님께 보낼 비단을 짜니
灎聲催 북 소리 요란히 바쁜 소릴세.
長嘆息 길게 한숨 쉬며 탄식 하지만
當語誰 누구와 더불어 이야길 할까.
君有行 그대 마음 언제나 변치 않을 줄
妾念之 저는 그렇게 믿고 있지요.
出有日 나갈 제는 곧 오마 하시고서는
還無期 도리어 가마득히 기약도 없네.
結巾帶 수건과 띠를 묶고 지내며
長相思 길이 언제나 그리는 마음.
君忘妾 그대가 저를 잊으신다면
天知之 하늘이 가만 있지 않을거예요.
妾忘君 또 제가 그대를 잊는다 해도
罪當治 그 죄를 마땅히 받아야지요.
妾有行 제 마음 교교(躈躈)히 변치 않음은
宜知之 그대도 마땅히 아시겠지요.
黃者金 누런 것은 금이요
白者玉 흰 것은 옥.
高者山 높은 것은 산
下者谷 낮은 것은 골짜기.
姓爲蘇 님의 성은 소씨(蘇氏)
字伯玉 이름은 백옥(伯玉).
人才多 사람이 재주도 많이 지녔고
智謀足 속에 든 지혜와 꾀 충분하지요.
家居長安身在蜀 장안에 집 두고도 촉()에 가 있어
何惜馬蹄歸不數 말달려 자주 못옴 얼마나 애석하리.
羊肉千斤酒百斛 양고기 천근에다 술이 또 천 말
令君馬肥麥與粟 보리 콩을 먹여서 말은 살졌네.
今時人 지금 세상 사람들
智不足 지혜가 부족해서
與其書 이 편지 주어도
不能讀 능히 읽지 못하리.
當從中央周四角 마땅히 중앙에서 사방으로 돌도록.

 

단 석자 구로 자신의 남편을 향한 절절한 기다림을 표현해낸 솜씨도 절묘하려니와, 끝에 가서는 아예 이 시를 읽는 법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달았다.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한 예를 하나 더 읽어보자. 명나라 장조(張潮)가 엮은 해낭촌금(奚囊寸錦)에 실린 영기(令旗)란 작품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깃발 안에 49자가 적혀 있고, 정중앙의 ()’ 자만 검게 표시했다. 이 시를 읽는 방법은 좀 복잡하다. 중앙의 자에서 출발해서 아래로 내려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7자씩 끊어 읽는다. 그리고 다음 구의 첫 자는 전 구의 끝 글자를 반으로 갈라서 따온다. 예를 들어 첫 구의 끝 글자 ()’에서 ()’을 취하고, 둘째 구의 끝 글자 ()’에서 ()’ 자를 취하는 방식이다. 퍼즐을 풀면 다음과 같다.

 

令出功成好勒銘 영 내리면 공 이루어 공 새기기 좋은데
金戈鐵馬靜瑽琤 쇠 창과 갑옷 말이 고요히 쟁글댄다
王侯仗此安邊檄 왕후께서 이를 기대 변방 격서 안돈하고
文武憑伊致太平 문무가 너를 빌려 태평을 이루도다
一面巧排龍虎勢 한 면으로 용호 형세 교묘히 물리치고
執宮分列斗牛横 궁을 지켜 두우진(斗牛陳)을 나누어 벌인다네
黃藍紅白仍兼綠 황색 남색 홍색 백색 녹색마저 아우르니
彔隊元戎總擅名 좋은 부대 무기들이 온통 이름 떨치누나

 

각 구절의 끝 글자와 다음 글자의 첫 글자를 보면 절반씩 갈라 꼬리따기 식으로 접속된다. 시의 내용은 군령기의 효용과 의미를 기렸다. 그림 자체를 설명한 셈이다. 단순한 화문에 다시 하나의 파자퍼즐을 보탠 난이도가 높은 형태다.

 

 

 

 

해낭촌금(奚囊寸錦)에 수록된 시 한 수 더 보자. 삼각형 안에 다시 삼각형을 넣은 모습이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 유석도(儒釋道)’ 세 글자를 넣었다. 제목은 함삼위일(函三爲一)읽는 법은 꼭대기 ()’에서 시작 한 바퀴 돌아 ()’에서 안쪽 삼각형을 돌아 처음 ()’에서 맺는다. 시를 읽으면 다음과 같다.

 

儒家萬券高於釋 유가의 만 권이 불가 보다 높으니
佛典咸通看道書 불전에 모두 통해 도서를 본다네
仙子丹藏券石內 신선의 단서 경전 석실 안에 간직되니
咸邀納子拜吾儒 납자를 다 맞이해 오유(吾儒)에서 절 올린다

 

세 개의 꼭지점에 나란했던 학문이 한 줄기로 회통하여 유학으로 일원화되는 과정을 내용뿐 아니라 읽는 순서를 통해서도 드러내 보였다.

 

 

 

 

이런 형태가 한 단계 더 발전하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된다.

 

 

雨 冷

藏 雲 睄

山 望 紅

遠 花

水 流 春 老 吟 殘 蘂

窪 軟

東 鬪 含

隱 叉 香

荀 吐

 

 

중국의 이공시격(李公詩格)이란 책에 수록된 반복시(反覆詩)이다. 이 시를 읽는 법 또한 절묘하기 짝이 없다. 겉 마름모꼴은 모두 20자로 되어 있는데, 아무 글자 아무 방향으로 읽어도 시가 된다. 대개 5언절구 30수 가량을 얻을 수 있다. 또 가운데 십자가 모양에는 모두 13개의 글자가 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읽어 7언절구 4수가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내려오다가 가운데 ()’자에서 왼편으로 혹은 오른편으로 읽던지, 왼편에서 읽어오다가 ()’에서 위로 또는 아래로 읽던지 하는 방법으로 다시 4수를 얻을 수 있다. 그밖에 전체 스물 아홉 자 가운데 임의로 한 글자를 취하여 좌우로 압운을 취해 5언 혹은 7, 또는 장단구로 읽어 다시 수십 수를 만들 수 있다. 희한한 문자유희이다.

 

지면상 마름모꼴 한 수만 읽어 본다.

 

冷睄紅花蘂 軟含香吐尖 서늘함 붉은 꽃 떨기에 서려 있고 부드러운 향기는 봉오리 끝에.
筍隱東窪水 遠山藏雨烟 죽순은 동쪽 물가에 숨어 자라고 먼 산은 비 안개를 감추고 있네.

 

현대까지도 이런 회문시는 창작된다. 중국의 주책종(周策縱)1962년 싱가포르를 여행한 뒤 그 소감을 담은 성도기유(星島紀遊)란 작품을 남겼다. 시의 원문은 스무 글자를 동그랗게 원형으로 써 놓았다. 이 시 또한 자자회문시이다.

 

 

荒渡斜舟繞亂沙白岸晴芳樹椰幽島艶華月淡星

 

 

작가는 아무 글자로 시작해도 괜찮고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좋다고 주를 달아 놓았다. 이밖에 한 글자나 두 글자, 세 글자 씩 건너 뛰어 읽거나, 7언 또는 장단구로 읽을 수도 있다. 일일이 소개하자면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분량의 책이 한 권 될 터이므로 여기서는 몇 가지 용례만 제시키로 한다. 우선 시계 방향으로 읽어보자.

 

荒渡斜舟繞 亂沙白岸晴 황량한 나루엔 배가 비스듬 매어 있고 어지런 모래사장 흰 언덕 개었구나.
芳樹椰幽島 艶華月淡星 향기론 야자나무 그윽한 섬엔 아름다운 달빛과 희미한 별빛.

 

한 글자씩 밀려서 읽으면 순독(順讀)ㆍ도독(倒讀)으로 40수를 얻을 수 있다. 한 글자씩 건너뛰며 읽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해서 다시 수십 수의 시를 얻을 수 있다. 그 한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星月艶幽樹 淡華島椰芳 별빛 달빛 희미한 나무에 곱게 비치고 엷은 꽃 핀 섬에는 야자나무 향기롭네.
晴白亂舟渡 岸沙繞斜荒 맑은 날 나루엔 배가 어지럽고 언덕 모래는 들판을 비스듬히 둘러 있네.

 

이것을 다시 7언절구로 읽어 약 40수 가량의 작품을 얻을 수 있다.

 

渡荒星淡月華艶 빈 나루 별빛 맑고 달빛이 휘황하니
華艶島幽椰樹芳 꽃 고운 섬 고요하고 야자나무 향기롭네.
樹芳晴岸白沙亂 나무 향기 개인 언덕, 백사장은 어지럽고
沙亂繞舟斜渡荒 모래사장 배를 두른 저녁 나루 쓸쓸해라.

 

더욱이 위 시는 각 구의 처음과 끝이 꼬리따기 식으로 연결되어 있어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방법으로 읽어, 20 글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의 조합이 놀랍게도 각체를 망라하여 무려 1천수가 넘는다고 하니, 한마디로 어안이 벙벙하다.

 

 

3.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골계총서(滑稽叢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 한 원님의 첩이 총명하여 능히 문자를 이해했다. 그 고을에 문객 한 사람이 해학을 잘 하므로 원님이 아껴 우스개 얘기를 하며 서로 격의 없이 지냈다. 하루는 재상이 첩과 더불어 동산 정자에서 상춘 하고 있는데, 문객이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네 글자를 써서 재상에게 보내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님은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첩이 곁에서 그 글을 읽더니 웃으며 말했다. “무에 어려울 게 있답니까? ‘()’ 자가 매우 기니 이는 장일(長日)’입니다. ‘()’ 자에 점 하나가 없으니, 바로 무점심(無點心)’입지요. ‘()’자를 조그맣게 썼으니 소인(小人)’이구요, ‘()’자 안에 획을 비웠으니 복중공(腹中空)’입니다. 그러니까 길고 긴 날 점심이 없으니, 소인의 뱃 속이 비었습니다[長日無點心, 小人腹中空].’라는 말이올씨다. 근사하게 한 상 차려 줄줄 알고 기다리는데 점심상이 없으니 밥 달란 말이옵니다.” 원님이 그제야 크게 웃으며 한 상 잘 차려 내 보내더란 이야기다. 글자의 모양새로 친 장난치고는 제법 풍격이 있다.

 

잡체시 중에는 이런 식으로 글자의 모양을 가지고 장난을 친 시가 있다. 보통 머리로는 알 수가 없어 신지체(神智體)라고 부른다. 예전 송나라 신종(神宗) 때 일이다. 북방 오랑캐의 사신이 중국에 사신 와서는 늘 시 솜씨를 뽐내 중국측 시인들을 깔보며 태도가 방자하였다. 소동파(蘇東坡)가 황제의 명으로 이를 접반케 되었는데, 사신이 또 시로 소동파를 떠보려 하였다. 소동파가 말했다. “시를 짓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시를 보기란 조금 어렵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써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신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그 뒤로 다시는 시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소동파가 사신에게 보여준 시는 다음과 같다. 편의상 횡서로 쓴다.

 

()’는 길쭉하고, ‘()’자는 짤막하다. ‘()’자는 어인 일로 속이 비었다. ‘()’자는 어인 일로 저리 크며, ‘()’는 무슨 까닭에 옆으로 누웠던가. ‘()’은 어찌 저리 가늘고 길쭉한가. 대개 세 글자씩 7언 한 구를 이루는 한 수의 칠언절구를 이렇게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니 북로(北虜)의 사신이 모를 수밖에. 진땀을 흘리는 그에게 소동파(蘇東坡)가 그 시를 풀이해 주었다. 그 풀이는 이러하다.

 

長亭短景無人篐 긴 정자 짧은 볕은 사람 없는 그림인데
老大橫拖瘦竹笻 늙은이 마른 대지팡이 옆으로 당겨보네.
回首斷雲斜日暮 돌아보면 끊긴 구름 하루 해도 저무는데
曲江倒蘸側山峯 곡강엔 산 그림자 거꾸로 비쳐 있다.

 

! 어떤가. 위 그림과 이 시의 풀이를 한 글자 한 글자 대조해 보면 그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니 장정(長亭)’이고 ()’은 짤막해 단경(短景)’이 된다. ‘()’자는 속자로 가운데 ()’자 부분이 ()’ 대신 ()’을 쓰기도 하므로 ()’자에 가운데 빈 것을 무인화(無人畫)’로 읽은 것이다. 3구에 ()’는 반대로 돌려서 써 놓았으니 회수(回首)’가 되고, ‘()’자는 가운데가 뚝 끊어져 단운(斷雲)’으로 읽는데. ‘()’자는 아래 ()’를 비스듬하게 써 놓고 사일모(斜日暮)’로 풀었다. 절묘하지 않은가? 동파문답록(東坡問答錄)이란 책에 보인다.

 

이런 장난은 소동파(蘇東坡)가 북로 사신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순식간에 만들어 낸 것인데, 뒤에 재미로 유사한 창작이 간헐적으로 나왔다. 앞서 본 날은 긴데 점심이 없으니의 예도 바로 이런 장난이 상당히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예화이다.

 

 

 

 

우리나라 문집을 읽다 보니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趙緯韓)의 문집에도 신지체 한 수가 실려 있다. 문집을 그대로 오려 붙이면 아래의 사진과 같다.

 

이를 어떻게 읽을까? 대개 신지체는 위의 예에서도 보듯 한 글자가 두 글자 또는 세 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모두 16자로 되어 있으니 대개 58구의 율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퍼즐을 앞서의 방식을 따라 풀면 다음과 같다.

 

小郡臨湖上 危樓近太淸 작은 고을 호수 가에 임하여 있고 높은 누각 푸른 하늘 가까이 있다.
濃烟迷大野 片雨入荒城 짙은 안개 넓은 들에 어지럽더니 황량한 성 보슬비가 흩뿌리누나.
遠峀斜陽盡 橫塘細草平 먼 산에 지는 해도 스러져 가고 횡당엔 가는 풀만 우거졌구나.
空齋無一事 長嘯倚前楹 빈 집에 아무런 일이 없길래 앞 난간에 기대에 휘파람 분다.

 

시의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판각이다 보니 각공이 원시의 뜻을 십분 살려 주지 못한 감이 있지만, 풀이한 시와 대비해 보자. ‘()’자를 작게 쓴 것은 소군(小郡)’임을 나타내고, ()’자가 ()’자 위에 얹혔으니 임호상(臨湖上)’이 된다. ‘()’를 비스듬하게 눕혀 놓았으니 위루(危樓)’일시 분명하고, ‘()’자는 보통 보다 크게 써서 ()’자와 바싹 붙여 놓았으니 근태청(近太淸)’이 아니겠는가. ‘()’는 짐짓 굵은 획으로 써서 농연(濃烟)’ 즉 짙은 안개를 표시했고, ‘()’도 크게 쓰고 획을 어지럽게 해서 미대야(迷大野)’를 이끌어 냈다. ‘()’자는 반쪽을 잘라 편우(片雨)’로 읽고, ‘()’도 일부러 획을 거칠게 한 뒤 ()’자가 파고들게 만들어 입황성(入荒城)’을 도출하였다. 나머지도 이와 같은 독법으로 읽을 수 있다. 원참 할 일이 없으니 별 희한한 짓도 다 했다. 그러나 재미있지 않은가? 근엄함만 가지고 산대서야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해소(諧笑)에 불과해도 운치가 있고 풍류가 있다.

 

이상 간략히 층시와 회문시, 탁자시 등으로 불리는 잡체시들을 약간 수 살펴보았다. 이 모두 한자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창작들이다. 물론 장난기가 다분히 서려 있지만, 적어도 내용면에서는 진중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마치 겉으로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속에 물건들을 숨겨둔 숨은 그림 찾기와 유사하다. 언어로 유희하는 퍼즐 놀이인 것이다. 이밖에도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잡체시가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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