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씨가 되는 말, 시참론(詩讖論)
1.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人間細事亦參差 | 인간의 잗단 일들 언제나 들쭉날쭉 |
動輒違心莫適宜 | 일마다 어그러져 마땅한 구석 없네. |
盛世家貧妻常侮 | 젊을 땐 집 가난해 아내 늘 구박하고 |
殘年祿厚妓將追 | 늙어 녹이 후해지자 기생이 따르누나. |
雨陰多是出遊日 | 주룩주룩 비오는 날 놀러 갈 약속 있고 |
天霽皆吾閑坐時 | 개었을 땐 언제나 할 일 없어 앉아 있다. |
腹飽輟飡逢美肉 | 배불러 상 물리면 좋은 고기 생기고 |
喉瘡忌飮遇深巵 | 목 헐어 못 마실 때 술자리 벌어지네. |
儲珍賤末市高價 |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 |
宿疾方痊隣有醫 | 묵은 병 낫고 나니 이웃집이 의원이라. |
碎小不諧猶類此 | 자질구레 맞지 않음 오히려 이 같으니 |
楊州駕鶴況堪期 | 양주 땅 학 탄 신선 어이 기약하리오. |
이규보(李奎報)의 「위심시(違心詩)」이다. 세상일이 어디 뜻같이만 될까만은, 하는 일마다 하도 박자가 안 맞고 보니 이런 푸념도 있을 법하다. 그렇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쉬 떠들 것은 아니다.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고, 농가성진(弄假成眞)의 성어도 있다.
시화를 읽다 보면 시를 보고 그 사람의 출처궁달(出處窮達)을 예견하는 삽화들을 뜻밖에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일러 ‘시참(詩讖)’이라고 한다. 대개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
예전 이승만 박사가 ‘남북통일(南北統一)’ 넉 자의 휘호를 하는데, 기세 좋게 나가던 붓질이 마지막 한 일자 한 획을 힘차게 가로 긋는 순간 중간이 반으로 잘리고 말았다. 잘 나가던 붓 끝이 하필이면 한 일자의 가운데 허리에서 두 동강이 났더란 말인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남북 분단의 ‘서참(書讖)’이라고들 말했다. 예전 어느 가수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노래하더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또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고 노래하더니 실제 그렇게 되고 말았던 일 같은 것은 ‘요참(謠讖)’이다.
人言落日是天涯 | 해 지는 저곳이 하늘가라 말하길래 |
望斷天涯不見家 | 하늘 가 바라봐도 고향 집 뵈지 않네. |
已恨碧山相掩暎 | 푸른 산막아 가려 뵈지 않음 한했는데 |
碧山更被暮雲遮 | 저문 구름 푸른 산을 다시 막아 가리우네. |
당(唐)나라 이구(李覯)의 「사(思)」라는 시다. 해가 지는 저 하늘 끝에 내 고향이 있다. 목을 길게 빼어 바라봐도 고향집은 뵈질 않는다. 나와 하늘 끝 사이에는 푸른 산이 막아 서 있어, 막아 선 푸른 산을 원망하는데 다시 저물녘 구름이 그 산마저 가리워버린다. 기가 턱 막힌다. 홍만종(洪萬宗)은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서 이 시를 소개하고 나서, “사람들은 이 시가 겹겹으로 막혀 있는 뜻이 있어 때의 운명이 불우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한다”고 하였다.
또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예전 중국의 유명한 기생 설도(薛濤)가 어렸을 때 우물가 오동을 읊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 가지는 지나는 새 마중을 하고 잎새는 오가는 바람 배웅하누나. |
송나라 때 한 소녀가 들꽃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多情樵牧頻簪髻 | 다정한 목동들이 머리에 즐겨 꽂고 |
無主蜂鶯任宿房 | 주인 없는 꾀꼬리 벌 멋대로 묵어 자네. |
결국 뒤에 모두 기생이 되었는데 대저 시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시구가 그의 운명을 이미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설도(薛濤)는 본래 양가의 딸이었다. 우물 가 오동을 읊는다는 것이 하필 오가는 새를 다 기뻐 맞이하고, 지나는 바람마다 잘 가라고 전송한다고 하였을까? 목동과 나무꾼이 제멋대로 머리에 꽂고, 임자 없는 벌과 꾀꼬리가 제 집인 양 묵어 잔다는 소녀의 노래도 역시 화류계(花柳界)로 나갈 그녀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우적(禹弘績)은 일찍부터 재주로 이름이 났는데, 나이 일곱 살에 어른이 노(老)자와 춘(春)자로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그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
老人頭上雪 春風吹不消 | 늙은이 머리 위에 내린 흰 눈은 봄바람 불어와도 녹지를 않네. |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지만 식자는 그가 요절할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머리 위에 쌓인 눈이 삶의 근심이 가져다 준 얼룩이라면, 봄바람이 불어와 마땅히 이를 녹여 주어야 옳다. 그런데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미 녹일 수 없는 삶의 근심을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다.
『수촌만록(水村漫錄)』에 보면 안명세(安名世)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진달래를 따서 연적에 끼워 놓고 시를 짓게 하니,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杜鵑花一棋 來自碧山中 | 진달래 꽃 한 떨기 푸른 산중에서 와 |
硯滴生涯寄 他鄕旅客同 | 연적에 생애를 부치었으니 타향 나그네 신세와 한 가지로다. |
그의 아버지가 이 시를 보고 울었다. 시에 나타난 뜻이 처량하고 괴로워 멀리 현달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 그는 과연 사화에 연루되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수찬(修撰) 안수(安璲)가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地下定無消恨酒 | 지하엔 한 녹여줄 한 잔 술이 없건만 |
人間難得返魂香 | 인간에도 혼 돌려줄 향 얻기 어렵구나. |
이 시를 짓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병을 얻어 죽었다. 세상 사람들이 시참이라고 생각했다. 『청강시화(淸江詩話)』에 보인다. 지하에는 맺힌 한(恨)을 녹여 줄 한 잔 술이 없고, 인간에는 떠난 넋을 되돌릴 한 촉의 향이 없다 했으니, 그는 지하에도 갈 수 없고 인간에도 돌아올 수 없어 그저 원혼(怨魂)으로 구천(九天)을 맴돌아야 할 처지인 것이다. 도대체 그는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시를 지었을까?
인용
3. 대궐 버들 푸르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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