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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1. 빈 칸 채우기, 수시ㆍ팔음가ㆍ약명체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1. 빈 칸 채우기, 수시ㆍ팔음가ㆍ약명체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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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1.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

 

 

부단한 언어의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織造)가 보여주는 현란한 아름다움, 잡체시는 단순히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오늘의 시단에 던진다. 또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형태시들이 기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상은 이렇듯 돌고 도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一生苦沈綿 二月患喉撲 생동안 병고에 괴로웠는데 월에도 감기 들어 목이 쉬었네.
三夜耿不眠 四大眞是假 일 밤을 끙끙대며 잠 못 이루니 대 등신 멀쩡한 몸 헛것이로다.
五旬尙如此 六秩安可過 십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십인들 어찌 살 수 있으리.
七情日煎熬 八還終當藉 정이 날마다 지지고 볶아 환에 마침내 의지하리라.
九經眞自獠 十載徒悲咤 경도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년간 구슬피 탄식하노라.

 

앞절에 이어 잡체시의 세계를 한 차례 더 소개하겠다. 잡체시 중에는 일정한 위치에 정해진 글자를 채워 넣는 형태가 매우 많다. 위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만취정(晩翠亭) 조수(趙須)수시(數詩)이다. 매 구의 첫 자에 차례로 숫자가 매겨져 있다. 운자는 그대로 지켜졌으므로 숫자의 질서만을 배제하면 여느 시와 다를 것이 없다. 감기로 잠까지 설치는 고통 중에 병으로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며 허무한 탄식을 토로한 것이다.

 

수시(數詩)는 국문시가에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춘향전중 춘향이 변사또의 곤장을 맞으며 부르는 십장가(十杖歌)도 그 좋은 예이다. 특히 개화기 시가에 이 같은 예가 많다.

 

다음은 대한매일신보1050(1909. 3. 18)에 수록된 신도옥(新島玉)이란 이의 조일진(弔壹進)이란 작품이다.

 

 

진회원(壹進會員) 너희들도

천만중(二千萬中) 일분자(壹分子)

전론(三戰論)에 미혹(迷惑)받고

대강령(四大綱領) 주창(主唱)타가

조약(五條約)에 선언(宣言)하니

대주(六大洲)에 괴물(怪物)이요

(七賊)들의 노예(奴隸)되니

역민(八域民)의 원수(怨讐)로다

추단풍(九秋丹楓) 엽락(葉落)하니

월창승(十月蒼蠅) 가련(可憐)하다

년부귀(百年富貴) ()하다가

재유취(千載遺臭) 되얏고나

세호창(萬歲呼唱) 하지말아

조창생(億兆蒼生) 비웃는다

 

 

여기서는 숫자의 배열이 1에서 10에 그치지 않고, 백 천 만 억 조까지 확대 부연되고 있다.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매국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 풍자한 내용이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시상의 전개 또한 점층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창작 상 장난기를 수반하면서도, 문면은 서슬 푸르다. 바로 이러한 태도 속에 잡체시의 매력이 드러난다.

 

 

매일신보(每日申報)1959(1912. 5.1)에 실린 수원 사는 이원규(李元圭)란 이가 지은 가루지 타령이란 언문풍월도 수시의 발상을 십분 활용한 몹시 흥미로운 작품이다.

 

 

지일지(一之一之) 글이나 일지(一之)

지이지(二之二之) ()을 이지(二之)

지삼지(三之三之) 집신이나 삼지(三之)

지사지(四之四之) 브즈런해야 사지(四之)

지오지(五之五之) 세월(歲月)가면 늙을 때가 돌아오지(五之)

지육지(六之六之) 항업(航業)은 수로(水路)오 농업(農業)은 육지(六之)

지칠지(七之七之) 암컷이나 칠지(七之)

지팔지(八之八之) 쓰고 남거던 팔지(八之)

지구지(九之九之) 궁교빈족(窮交貧族) 가난구지(九之)

지십지(十之十之) 생전사업(生前事業) 성취(成就)하야 유백세(流芳百世) 하고십지(十之)

 

 

한글 독음으로 읽어보라. 얼마나 놀라운 말장난인가. 지면의 성격 상 더 많은 예를 들 수 없어 유감이지만, 한시에 깊은 소양을 지녔던 이들 개화기 시가의 작가군들이 익숙한 한시의 형태를 응용하여 당시 민중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대개 이러한 종류의 잡체시는 일정한 위치에 채워 넣는 글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수평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춘하추동(春夏秋冬) 네 글자를 넣으면 사시시(四時詩)가 되고, 약초(藥草)의 이름을 매 구절마다 하나씩 삽입하면 약명체(藥名體)가 된다. 별자리의 이름을 넣으면 성명체(星名體)가 되고, 주역(周易)의 괘명(卦名)을 넣어 지으면 괘명체(卦名體)가 된다. 앞서 보았던 새 이름을 넣은 금언체(禽言體)도 있다. 이밖에 궁궐 이름, 장군 이름, 새 이름 등 일일이 예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사시시(四時詩)의 한 예를 보자.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물은 사방 못에 넘실거리고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 많네.
秋月揚明輝 冬嶺秀寒松 가을 달은 해 맑은 빛을 비추고 겨울 산엔 찬 소나무 빼어나도다.

 

매 구절의 첫자가 춘하추동(春夏秋冬)이다. 흔히 도연명(陶淵明)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 나라 양신(楊愼)승암시화(升菴詩話)에 이미 그의 작품이 아니라 진()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임을 밝혀 놓았다. 봄날엔 넘실대는 못 물, 여름 날 기이한 산봉우리 모양을 짓는 뭉게구름, 가을날의 시릴 듯 푸른 달빛, 겨울 산마루에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사시의 광경은 이렇듯 건강하니,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호흡도 따라서 해맑아진다.

 

戈挽落日 此事本難期 쇠 창으로 지는 해를 당기어 보나 이 일 본시 기약하기 어렵네.
田理荒穢 歲暮違所思 돌밭의 황량함을 일구었어도 세모엔 생각과 어그러지네.
染尙云慟 途窮能勿悲 실이 물듦도 슬프다 했다지만 길 막혀도 능히 슬퍼하지 않으리.
林有古賢 淸風高可追 대 숲엔 예전 어진 이 있어 맑은 풍도 높아서 따를만 해라.
瓜繫不食 白首甘棲遲 바가지는 매달려도 먹지 않으니 흰 머리로 깃들어 삶 달게 여기네.
梗笑木偶 漂流爾焉之 흙 인형이 나무 인형 비웃으면서 떠 내려가 너는 어딜 가려뇨.
華走塵埃 恐見高人嗤 가죽 신 신고서 티끌 속을 달려도 高人의 비웃음을 살까 두렵네.
奴足生理 何須鐘鼎爲 감귤로도 먹고 살기 충분하거니 어찌 모름지기 벼슬을 하랴.

 

조선 중기의 시인 권필(權韠)팔음가서회(八音歌書懷)란 작품이다. 제목의 팔음가(八音歌)’란 시의 형식을 말하고, ‘서회(書懷)’는 제목이 된다. 팔음가(八音歌)주역(周易)팔괘에 맞춘 금(, )ㆍ석(, )ㆍ사(, )ㆍ죽(, )ㆍ포(, )ㆍ토(, )ㆍ혁(, )ㆍ목(, 축어柷敔) 등의 여덟 악기를 매 홀수 구 첫 자에 순서대로 얹는 형식의 잡체시이다. () 나라 심형(沈炯)이 처음 이 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개 이러한 형식은 한 편의 시 안에 12()이나 팔음(八音)을 구비함으로써 보다 완벽한 형식미를 갖출 수 있다고 믿은 옛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시의 각 구절들은 모두 전거가 있는 말들이어서 행간의 의미가 깊다. 쇠창으로 해를 끌어당기는 일이나, 쓸모없는 돌밭을 일구어 좋은 결실을 기대한 것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고 애를 써 보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보니 역시의 탄식을 금할 길 없다. 예전 묵자(墨子)는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도 슬퍼했다지만, 죽림(竹林)의 맑은 풍취를 본받아 마음을 닦을 뿐 슬퍼할 것은 없다. 묻혀 사는 초라한 삶이지만 아첨 모리배가 판치는 벼슬길을 어찌 부러워할 것이랴.

 

 

개화기 만주일보1919101일자에는 사몽이란 필명자가 투고한 ()는 약()의 종()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데, 팔음가(八音歌)와 비슷한 발상으로 지어진 실험시이다. 그 첫줄에 자운이라 하여 지금의 우리 고생 장래의 락이로다는 한 줄이 실려 있다.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지금의 우리들은 고생 중에 싸였네

금음밤에 불없이 헐덕이는 우리들

의워싸고 있는 것 제일 못된 악말세

우리의 지금 고생 비관 말고 힘쓰면

리상저끝 결과가 불원간에 오리라

고생 끝에 락이란 예로부터 있는 말

생각하고 깨다라 락심 말고 해보소

장차고 무한하든 우리들의 고생이

래두에 끝 있을 것 자신하고 분발해

의리 없는 저 악마 죄 내쫓아 바리고

락엽진 오얏남게 꽃구경을 합시다

이제는 그전 고생 다 없애 바렸다고

로유남녀 다 모혀 지낸 고생 생각해

다정코 자미있게 기쁜 노래 부르세

 

 

각 행 첫자가 바로 자운이 되며, 전편의 주지(主旨)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특이한 형태의 실험시이다. 각 행 첫줄을 주제로 내걸어 놓고, 다시 각 행의 문맥 의미 속에 그것을 감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잡체시 중에 흥미로운 것이 약명체(藥名體)이다. 매 구절마다 약초(藥草)의 이름을 하나씩 슬쩍 끼워 넣는 것이 정해진 규칙의 전부다. 물론 의미는 그대로 순조롭게 읽혀야 한다.

 

半夏留京口 人言病未蘇 반하(半夏)에 서울에 머무니 병 아직 안 나았다 말들을 하네.
當歸故里 烟月釣前湖 다만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 안개 달빛 앞 호수서 낚시질 하리.

 

권필(權韠)의 약명체(藥名體) 시이다. 각 구절마다 각각 반하(半夏)ㆍ인언(人言)ㆍ당귀(當歸)ㆍ전호(前湖, ) 등의 약명(藥名)을 슬며시 끼워 넣었다. 일상적 의미로 읽을 뿐 다른 암시적 의미는 없다.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제술관(製述官)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행차에 참여 하였는데, 큰 병을 앓은 뒤끝이라 사람들이 많이들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약을 지어 먹노라니까, 그 약방문에 인언(人言)’이란 약초가 있으므로 장난삼아 지었노라는 것이다. ‘인언(人言)’비상(砒霜)’이라고도 하는데 극독을 지녀 극히 소량만으로 약재로 쓰인다. 여기에 쓰인 약재들은 모두 담()이나 감기 따위의 치료제로 쓰이는 것이니, 아마 당시 그가 큰 병을 앓은 뒤끝이라 허하여 기침 감기가 심했던 사정까지도 짐작할 수 있겠다.

 

 

 

 

인용

목차

1. 빈 칸 채우기, 수시ㆍ팔음가ㆍ약명체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3. 파자놀음과 석자시

4. 이합체와 문자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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