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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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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藏頭體)와 첩자체(疊字體)

 

 

한충(韓忠, 1486~1521)은 기개가 호방하고 비파 연주 솜씨도 뛰어났던 문사였다. 그가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용한 점장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평생의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 점쟁이는 그의 사주를 따져본 뒤,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내용은 이러하였다.

 

 

年壯氣拔天摩 把龍泉幾歲磨 上梧桐將發響 中律呂有時和

傳三代詩書敎 起千秋道德波 幣已成賢士價 生何獨怨長沙

 

 

68구의 시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예언한 것일까? 시를 받아든 한충(韓忠)은 뜻을 알 수가 없어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쟁이가 써준 것은 장두체(藏頭體)라고 불리는 일종의 잡체시이다. 문자 퍼즐의 한 종류로, 그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각 구의 맨 끝자를 파자(破字)하여 그 아래 토막을 그 다음 구의 첫 자로 사용하면 된다. 즉 첫 구의 끝자가 ()’이니 이를 파자(破字)하여 둘째 구 첫 자에 ()’를 얻을 수 있고, 둘째 구 ()’에서는 ()’을 얻게 된다. 같은 원리로 ()’에서 ()’, ‘()’에서 ()’를 얻을 수 있다. ‘()’에서 ()’, ‘()’에서 ()’를 떼어내고, ‘()’에서 ()’를 얻는다. 끝구의 ()’에서 다시 ()’를 취해 맨 첫 자에 이어 붙임으로써 이 퍼즐은 완성된다. 이와 같이 해서 위 시를 다시 원래 상태대로 복원시키면 다음과 같다.

 

少年壯氣拔天摩 젊은 날 장한 기운 천마(天摩)를 내뽑으니
手把龍泉幾歲磨 손에 용천검(龍泉劍) 잡고 몇 해를 갈았던가.
石上梧桐將發響 섬돌 위 오동잎은 가을 소리 내는데
音中律呂有時和 그 소리 율려(律呂)에 맞고 때와 부합하는도다.
口傳三代詩書敎 입으로는 삼대(三代) 시서(詩書)의 가르침 전하였고
文起千秋道德波 그 글은 천추의 도덕 물결 일으켰네.
皮幣已成賢士價 폐백으로 이미 현사(賢士)의 이름 이뤘거늘
賈生何獨怨長沙 가생(賈生)은 어찌 홀로 장사(長沙)를 원망했나.

 

한 사람의 운명을 예언한 시이므로 행간에 심상찮은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처음 12구는 한충(韓忠)이 젊은 날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때를 기다리던 시절을 이름이다. 섬돌 위 오동잎이 가을 소리를 내니, 그 소리가 율려(律呂)에 맞고 때에 부합된다는 34구는 그가 학문적 온축을 더해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로 성장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56구에서는 다시 그의 벼슬길에서의 경륜을 기렸다. 곧 입으로는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외우고 그 문장은 천추의 도덕(道德)을 일으켜, 바른 학문과 도덕의 표양으로 내세울 만한 인재였음을 말했다. 7구의 피폐(皮幣)는 예전 현사(賢士)를 등용할 때 임금이 하사하는 가죽과 비단 등의 예물이다. 그러므로 7구는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그 이름이 높이 드날림을 말한다. 마지막 8구는 한() 나라 때 가의(賈誼)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젊은 시절 모함을 입어 먼 곳으로 귀양 가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과연 그는 젊은 나이에 당당히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 등의 요직을 거쳐 1518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막중한 사명을 띠고 주청사(奏請使) 남곤(南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 갔다. 그러나 현지에서 남곤(南袞)과 잦은 의견 대립으로 마침내 그의 미움을 사, 돌아와서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고, 재임 중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지목되어 그는 8구의 예언처럼 거제도로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듬해 신사무옥(辛巳誣獄)에 다시 남곤의 책략으로 연좌되어 마침내 옥중에서 비명에 죽었다. 김정국(金正國)사재척언(思齋摭言)과 자신의 문집 송재집(松齋集)에 실려 있다.

 

 

장두체(藏頭體)란 글자 그대로 각 구절 첫 글자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시체(詩體)이다. 이를 달리 말해 옥련환(玉連環)이라고도 하는데, ()이란 옥편(玉篇)’의 예에서도 보듯 글자를 말하니, 옥련환(玉連環)이란 글자가 이어져 고리를 이루는 꼬리따기 노래라는 뜻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한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감춰진 규칙을 고려하면 각 구의 끝 글자가 놓이는 순간 다음 구절의 첫 글자가 제한되니, 창작 상 고도의 기교와 언어 구사력이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운자는 엄격하게 지켰다.

 

木葉蕭蕭正着霜 낙엽 우엔 쓸쓸히 서리 내리고
相如多病臥虛堂 상여(相如)는 병 앓으며 빈 집에 누웠네.
土階荒草秋猶碧 흙 계단 황량한 풀, 가을에도 푸르고
石澗黃花晩更香 시내가 국화꽃은 늦저녁에 향기롭네.
日色暎雲明遠昊 구름 사이 햇빛은 먼 하늘에 밝은데
天風吹雁度高岡 바람은 기러길 불어 높은 뫼를 건넨다.
山村覽物驚時晏 산촌에서 사물보다 때늦음에 놀라니
安得蛩聲不近床 어찌 하면 벌레 소리 멀리로 쫓을건고.

 

권벽(權擘)추일산재(秋日山齋)란 작품이다. 소소한 가을날의 감상을 잘 포착하였다. 서리 진 낙엽, 병들어 빈 집에 누워 있는 고단한 신세이지만, 황량한 듯 푸른 풀과 늦저녁에 향기로운 국화를 자임(自任)하며 오롯한 몸가짐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릴 것이랴. 이 작품 또한 앞서의 규칙이 꼭 같이 적용되고 있는 장두체(藏頭體)이다. 첫 구 끝 자 ()’에서 둘째 구 첫 자 ()’이 나왔고, 8구 끝 자 ()’에서 첫 구 첫 자 ()’이 나왔다. 꼬리따기로 이어진다.

 

사실 필자가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문집 어디에도 이러한 규칙을 설명해 놓은 것이 없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시를 잡체시의 범주에 넣어 두었는지조차 의아했었다. 이 규칙을 발견한 것은 엉뚱하게도 일단 번역이나 해 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원문을 옮겨 적던 과정에서였다. 이상하게 구절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글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 규칙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새삼스럽다.

 

일전에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의 기념관에 들렸을 때, 그곳에서 윤의사(尹義士)가 젊은 시절 지었다는 한 수의 흥미있는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不朽聲名士氣明 썩지 않을 이름으로 선비 기개 밝으니
士氣明明萬古淸 선비 기개 밝고 밝아 만고에 해맑도다.
萬古淸心都在學 만고에 맑은 마음 배움에 달렸으니
都在學行不朽聲 배워 행함 속에 썩지 않을 이름 있네.

 

앞서 본 장두체(藏頭體)가 앞 구의 끝 자를 파자(破字)하여 다음 구의 첫 자로 삼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각 구절 끝의 세 글자가 다음 구절에 그대로 반복되고, 4구의 끝 세 자는 다시 첫 구의 첫 부분에 되풀이 되어 꼬리따기로 맞물리는 완벽한 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장두체(藏頭體)의 아종(亞種) 쯤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이를 달리 첩자시(疊字詩)라고 한다.

 

 

다른 구절들도 모두 비슷한 발상으로 지은 것이다.

 

舞臺小天地 天地大舞臺 무대(舞臺)는 작은 세상이요, 천지(天地)는 커다란 무대(舞臺)일러라.

 

()’()’를 중앙에 두고 무대(舞臺)’천지(天地)’의 위치를 서로 바꾼 것인데, 의미는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축을 담았다.

 

 

思伊久阻歸期

靜 憶

轉漏聞時離別

 

 

위 시도 첩자시(疊字詩)이다. 지은이는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진소유(秦少游)이다. 이 시는 왼쪽 ()’에서 시계 방향으로 7언으로 끊는데, 뒤의 넉 자 또는 석 자가 다음 구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읽는다.

 

靜思伊久阻歸期 돌아올 기약 늦는 그대를 생각타가
久阻歸期憶別離 돌아올 기약 늦어지니 이별을 떠올리네.
憶別離時聞遲轉 이별을 떠올릴 젠 시간도 더디 가고
時聞遲轉靜思伊 더딘 물시계 소리 들으며 그대 생각 잠기었소.

 

진소유(秦少游)의 아내 진소매(蘇小妹)가 친정 오라비인 소동파(蘇東坡)의 집에 다니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를 그리며 보낸 시이다. 이 시를 받아본 아내와 소동파(蘇東坡)는 똑같은 시체(詩體)로 각각 한 수씩 시를 지어 화답하고, 서둘러 남편에게 돌아왔다. 그녀가 답장으로 보낸 시는 이러하다.

 

 

蓮人在綠楊津

採 一

玉漱聲歌新闋

 

 

이를 다시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읽어보자.

 

採蓮人在綠楊津 연밥 따는 사람은 버들 나루에 있는데
在綠楊津一闋新 푸른 버들 나루엔 한 곡조 새 노래.
一闋新歌聲漱玉 한 곡조 새 노래, 소리는 옥 같은데
歌聲漱玉採蓮人 옥같은 노래 소린 연밥 따는 사람일레.

 

남편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녀는 마침 오빠와 함께 호수 위에서 연밥 따는 광경을 보고 있던 참이었고, 연밥 따는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 가락에 정신을 뺏기고 있던 중이었다.

 

 

 

 

인용

목차

1. 빈 칸 채우기, 수시ㆍ팔음가ㆍ약명체

2.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3. 파자놀음과 석자시

4. 이합체와 문자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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