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자아실현
하늘은 좀 흐리지만 그렇게 많이 춥진 않다.(10:07)
어제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전국 일제고사가 치러졌다. 10월에 치러진 일제고사에서 현장 체험학습을 떠나보냈다는 이유로 8명의 교사가 해임된 사건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도 어떤 불상사가 생기지나 않을까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취업도 어려운 시기임을 감안할 때 해직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는 소신을 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더욱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가라는 실체는 보이진 않지만 개개인의 소신과 생각마저도 어느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철저히 봉사하고 종속되도록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어제 치러진 일제고사에서도 몇 몇 학생은 체험 학습을 떠났고 전북의 세 학교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수업을 했다. 아래에 보이는 사진은 극명하게 갈린 일제고사에 대한 두 상황을 보여준다. (한겨레 신문, 일제고사 사진과 촛불집회하는 사진을 동시에 보여줌)
▲ 일제고사를 보는 학생들과 부당함에 맞서는 학생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이유
시험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하나의 잣대로 모두를 평가하려는 그 어리석은 생각에 대한 반항이니까. 더욱이 그게 모두에게 공개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각 개인은 하나의 잣대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게 되며 그건 또 학교의 등수로까지 확대되어 좋은 학교, 나쁜 학교라는 평가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매겨진 평가가 올바를 리 없지만 대부분은 그게 정확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숫자화된 객관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선 그 문제를 출제한 사람들과 그런 문제 유형에 익숙해져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출제자는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만을 냈다.’고 할 테지만 거기엔 변별하기 위한 어려운 문제도 꽤 있을 것이다. 더욱이 객관식으로 문제가 출제되다 보니 창의성ㆍ개성을 추구하는 교육보다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교육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런 교육의 최대 수혜자는 부모의 경제적 자본이 높은 아이들이다. 학원에 다니며 그런 문제들을 배워왔던 터라 그냥 학교만 다니며 공부했던 아이들보다 높은 성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졸지에 실력이 없는 아이로 뽑힌 아이들은 어떨까? 그들은 그 상황을 깨닫고 명렬히 공부하여 상위권 대열에 끼려 할까? 일제고사를 찬성하는 쪽에서 내세우는 논리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 오히려 ‘공부는 나의 길이 아닌가봐’란 생각만 하지 않아도 감지덕지다. 대부분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평가가 외부에 알려질 경우, 학생들은 더욱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으며 학교가 낙인 찍힐 경우엔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그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차갑게 짓밟히게 될 것이다. 꽃도 피기 전에 시들어 버리는 형국이란~
무한 경쟁의 편의주의
이런 이유 때문에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것이다. 전혀 교육적이지 않을뿐더러 전혀 인간적이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좀 더 교육정책 입안자들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어느 획일화된 교육이나 경쟁이 아닌 자신의 분야, 사진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말했다시피 일제고사를 잘 봤다해서 그가 재밌게 공부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말만 잘 듣고 정해진 범위 안에서 순종하며 잘 따라가는 정형화된 인간일 뿐이겠지. 경쟁은 좋다. 하지만 경쟁의 의욕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경쟁하게 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교육이 그런 경쟁을 부추긴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주체가 되는 삶
지금의 이 사태는 뭐든 명료한 잣대로 객관화하고자 하는 편협함과 조급함이 불러들인 재앙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교육이 올바로 설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무엇인지? 자아실현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다. 공부는 어떤 정답을 맞추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내 자신을 알아가며 그렇게 하나하나 깨우쳐 나와 너와의 간격을 좁히고 나와 세상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의 본래면목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정답을 맞추고 그 성적으로 타인과 경쟁하는 죽고 죽이는 공부가 허망한 것임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과의 선의의 경쟁만이 의미 있을 뿐이지 거기에 타인이 들어설 공간은 없으니 말이다. 자아실현, 그건 나 자신을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이며 어떤 길을 따라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두 사진의 극명한 차이는 자신이 있고 없고이다. 왼쪽 사진은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의 의지를 내세운 것인데 반해 오른쪽 사진은 체제에 순응하며 시험을 보고 있다. 어느 게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니다. 때론 왼쪽처럼, 때론 오른쪽처럼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오른쪽처럼 자신의 의지가 없을 때조차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다. 때론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며 ‘내가 원해서 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든 상황을 대처하는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그걸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생각들이 차고 넘친다면 일제고사 논란은 과거의 불행한 유산으로 묻힐 것이다. (11:05)
▲ 한겨레 신문, 12월 24일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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