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롱망촉(得隴望蜀)
만족이 없는 욕심
十二年, 公孫述亡. 述茂陵人, 自更始時, 據蜀稱帝, 國號成.
上旣平隴右曰: “人苦不自足. 旣得隴復望蜀.”
遣大司馬吳漢等, 將兵, 會征南大將軍岑彭, 伐蜀. 彭戰船竝進, 所向無前. 述使盜刺殺彭. 吳漢繼進, 至成都, 擊殺述, 蜀地悉平.
漢在軍或戰不利, 意氣自若, 上歎曰: “吳公差强人意, 隱若一敵國矣.” 『십팔사략(十八史略)』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隴西:감숙성)에 외효(椳囂),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睡陽: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割據)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분자(劉盆子), 유영(劉永), 이헌(李憲), 공손술(公孫述)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僣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A.D 33), 광무제와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외아들 외구순(椳寇恂)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隴望蜀]’.”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A.D 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宿願)을 이루었다.
겉뜻: 농을 얻고서 촉을 바란다.
속뜻: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만 부림’을 이르는 말.
유의어: 평롱망촉(坪隴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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