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의 본질에 관해
우리가 이사 가려던 집이 27일에 빈집이 되었다. 새집이라면 그냥 바로 이사 가면 그만이겠지만 20년이나 된 집이기에 그냥 갈 순 없고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샷시 설치, 싱크대 설치 등이 일주일 만에 다 끝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정했던 대로 4월 4일에 이사 갈 수 있고 9일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리모델링 공사 일정이 늦춰지다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다. 공사는 제법 길어질 태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도 언제 갈 지 기약도 없어졌다. 허~걱!! 대략 난감이다. 실컷 큰 맘 먹고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추진해보기도 전에 묻힐 운명에 직면했으니 말이다. Oh! My Head!!
운명이 왜 이리도 기구하단 말인가? 솔직히 떠나기까지 문제가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이사 문제가 없었더라도 국토종단을 반대하시는 어머니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나마 이사에 집중하느라 국토종단엔 어머니가 덜 신경 쓰시게 되었으니 오히려 절망과 희망이 함께 곁들여 있는 양상이라고나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 또한 내가 살아가는 과정 속에 겪고 헤쳐나가야 할 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맘과는 달리 그것을 가로막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던가? 인생의 한 과정을 지금 미리 선경험 해보는 것이니, 내가 여기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난관도 좋게 받아들이려 한다. 이런 예측치 못한 일을 겪기 때문에 삶은 다채롭고 흥미로운 게 아닐까.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는 마음의 본질
어제 컬투쇼에선 극도로 소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윗집이 저녁만 되면 쿵쾅거려 괴로운데도 그걸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야기, 집을 찾기 위해 길거리에서 물어봐야 함에도 1시간이 넘도록 못 불어보던 남자친구 이야기 등이 흘러나왔다. 참 웃긴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나는 좀 씁쓸한 미소만을 띄울 뿐이었다. 그들의 소심함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런 소심함에서 일정 부분 벗어났지만 말이다.
왜 그렇게 소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의 상황을 토대로 이야기해보겠다. 난 내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하거나 이야기하는 게 어려웠던 거다. 그런 맘 상태는 이런 식으로 합리화된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 결국 남을 위하는 척 위장되지만 그 마음의 본심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그런 합리화 자체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합리화를 어느 순간 진심이었던 양 착각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때부터 이런 말도 곧잘 하게 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희생했는데(자신감 부족으로 무작정 인내하며 받아들였을 뿐이었는데), 어찌 그런 마음을 못 알아주고 이럴 수가 있어?” 어느 순간 자신의 소심함은 타인을 위한 배려로 둔갑된 것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면 둘 사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타인 또한 그에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는데, 홀로 그런 식으로 반응하고서 대가를 요구하니 말이다. 이런 걸 우린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하지 않던가. 소심함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자신을 착각으로 몰아넣고 관계를 두절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배려는 방어수단
소심함을 살펴봤던 이유는 이 사건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어떤 결정을 했을지 뻔하다. 당연히 여행을 미루고 이사하는 데에 참여했을 것이다. 나 하나 잠잠히 있으면 쉽게 지나갈 일이, 내가 분연히 들고 일어서면 복잡해지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은연 중엔 이런 마음을 가질 거다. ‘내가 가족을 위해 이렇게 희생했는데 당연히 알아주시겠지’ 이 일 후에 한 번씩 어머님이 날 다그칠 일이 생길 때마다 이 희생했다는 명목은 좋은 방어 수단이 될 것이다. 그것뿐인가. 또한 극단적으론 ‘어머니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포기 했잖아요’라며 평생토록 가족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과연 포기가 가족을 위한 것이 맞을까? 나의 소심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막상 여행을 떠나려 하니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그런 핑계를 대며 물러선 것은 아닐까?
도망가느냐 맞서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내가 국토종단이란 걸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 것 자체가 예전의 나와는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삶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음도 잘 알고 있으며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가득하다. 사는 이유는 단 하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왠지 쾌락주의자처럼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난 이상주의자인 플라톤보다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를 더 좋아하니 상관없다.
진즉 말했듯이 국토종단이란 기획은 ‘발악’에서 나왔다. 기존의 소심함, 짜인 각본, 안주하려던 정신의 나약함, 내면의 벽을 쌓던 폐쇄성에서 벗어나려던 발악이었다. 그게 직접 실행되고 안 되고는 차후의 문제지만, 그런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여정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먼저 사용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대화를 하기도 전에 합리화하여 꼬리를 내빼는 것이나 반항심에 짐을 그냥 싸들고 나가는 것은 둘 다 똑같이 사태를 회피하려는 소심함에서 나온다. 정말 조금이라도 나 자신이 변했다고 한다면 나의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대화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도출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난 지금 그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역시 사태를 부풀려 인지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솔직히 아직도 떠난다는 게 두렵고 걱정도 된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을 핑계 대며 내가 맘먹었던 것을 미룰 순 없다. 그래서 난 여행을 꼭 떠날 것이다. 어느 정도 공사 현황을 보고서 적당한 때 떠나려 한다. 그렇게 한참 나의 여행을 즐기다가 집이 이사 가는 날에 전주로 와서 이사를 돕고 또 다시 돌아온 장소부터 최종목적지까지 여행을 계속하려 한다. 이런 나의 계획이 잘 전달해야겠다. 어머니에게 잘 설득할 수 있으려나?
이와 같은 난관에 부딪침으로 나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사태를 해결해가는 나의 모습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오늘 대담의 결과는 어떨까?
갈림길의 결과
어제 저녁에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랬더니 잘하면 12일엔 이사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하는 수없이 난 13일에 떠나겠다고 했다. 이사가 완료됐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완전히 선전포고 같다. 물론 그 전까진 내가 리모델링하는 상황들을 다 지켜보아야 한다.
어머니는 “계속 아예 더 미룰 수 있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국토종단에 반대하셨으니 그렇게 미뤄지다 보면 가지 않을 거란 기대를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자꾸 늦춰지는 상황을 보며 흔들렸다. 막상 떠난다고 하니 두렵고 맘은 심난했고 집이 이사 가기도 전에 내가 여행을 떠나면 걷고 있는 도중에도 신경이 쓰여 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에 대한 배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초에 이맘을 먹게 된 계기를 곱씹었던 것이다. 그렇게 맘을 다잡고 나니 별다른 흔들림 없이 강고하게 나의 입장을 어머니께 말할 수 있었다.
왜 꿈만 꾸고 있는가. 한 번은 떠나야 한다.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돌아와 일상 속에서 더 잘 살기 위해서다
『On The Road』, 박준, 넥서스BOOKS, 2006년, 321쪽
꿈만 꾸어보고 말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떠날 것인가? 국토종단에 대한 나의 생각과 대답은 명확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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