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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11년 사람여행 - 113. 아픔이 스민 호남평야와 아픔이 키운 군산을 걷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11년 사람여행 - 113. 아픔이 스민 호남평야와 아픔이 키운 군산을 걷다

건방진방랑자 2021. 2. 1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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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스민 호남평야와 아픔이 키운 군산을 걷다

 

 

군산시청 근처를 걷고 있는데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그때 눈에 딱 중화요리집이 보여서 들어갔다. 들어가서 삼선볶음밥을 시켰는데 처음엔 “1인분은 안 되요라고 말하더라. 쟁반짜장 같이 애초에 2인분으로 나오는 음식의 경우에 이런 말을 듣는 건 이해가 되지만 볶음밥이 1인분이 안 된다는 건 처음 들어봐서 당황했다. 그래서 뻥찐 상태로 다른 메뉴를 찾고 있으니, 주방과 속닥속닥 얘기하며 해주겠다고 하더라. 삼선볶음밥이 이렇게 귀한 음식인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막상 기다렸다가 먹는 보람은 있었다. 밥알 하나하나가 기름코팅도 잘 되었고 해산물도 풍부했으니 말이다.

 

 

▲ 정말 잘 볶아진 볶음밥이다. 배불리 잘 먹었다.

 

 

 

아픔이 스민 호남평야와, 아픔이 키운 군산

 

점심을 먹고 배가 부른 상태로 걷는 기분이 정말 좋다. 더욱이 개정면을 지날 때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하늘엔 무지개가 걸렸다. 마치 전북에 온 걸 축하해주기라도 하듯 떠오른 무지개를 보고 있으니 절로 맘이 푸근해진다.

 

 

▲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이런 게 축복인가?

 

 

26번국도 양편으론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김제ㆍ만경평야에 보리가 파릇파릇 익어가고 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돌이라고 불리는 김제ㆍ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의 안에서도 김제 만경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는 곳이다.

-조정래, 아리랑

 

 

역사적인 수탈을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을 지금 걷고 있다. 이 평야 때문에 지금 걷고 있는 26번 국도로, 전군간 도로(全郡間 道路)로도 불리고 번영로(繁榮路)로도 불린다. 이 도로가 만들어짐으로 군산이 발전할 수 있었다. 호남은 자고로 넉넉한 인심이 있는 곳이라 했다. 드넓은 평야에서 식량이 생산되고, 물자가 넉넉하니 음식을 만들 재료들이 넘쳐나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넉넉한 물자를 향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도 지주와 마름, 소작농이라는 계층이 있었고 소작농은 입에 풀칠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 위의 글처럼 지평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호남평야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본은 전쟁을 위해 무수히 많은 쌀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이 눈여겨 본 곳은 호남평야였고 이 쌀을 능률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번영로(번영은 많을 번[], 영화로울 영[]으로 번성하여 영화롭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번영의 대상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니 땅을 치고 통곡할 밖에)를 만들고, 철도를 깐 것이다. 이들 쌀이 번영로를 따라 이동하고 철도를 타라 이동하여 군산항에 집결했다. 아리랑을 보면 째보선창을 간척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 근처에 미곡 처리장이 성황을 이루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에서 수많은 처녀들이 쌀과 모래를 걸러내는 일을 했고, 쌀이 귀하던 시절이라 속치마에 쌀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작업반장들이 쌀 유출여부를 검사한다며 노골적으로 성추행ㆍ성폭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 째보선창과 부잔교의 모습.

 

 

째보선창 옆의 부잔교(뜬다리)는 특별한 기계 장치나 전력의 힘없이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배를 정박하고 쌀을 실어 나르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 한반도의 쌀들이 별다른 제약 없이 수탈당했고, 그 때문에 일본인들이 군산에 들어와 본정(本町, 혼마찌)을 이루며 살게 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역사가 흐르는 공간을 지금 걸으며 지나가고 있다.

 

 

▲ 부잔교를 통해 호남평야의 쌀은 반출되었다.

 

 

 

익산 오산리에 둥지를 틀다

 

교회가 보이기에 안쪽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 갔다. 교회에 요양원도 있고 목사님 사택도 따로 있는 꽤 큰 규모였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바로 승낙해주시더라.

익산 모산교회는 순례지 교회로 선정된 곳이었다. 익산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이곳에서부터 익산 전체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단다. 역사관도 별도의 건물에 있을 정도로 기독교 전파지로서의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기독교의 역사를 찾아 순례를 오는 사람이 많은지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게스트하우스도 만들었다. 그래 봐야 컨테이너 박스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어딘가? 더욱이 난 이곳에서 최초로 묵는 손님이 된 것이니 이런 영광도 따로 없다. 난 기독교인도 아니고 순례자도 아니니 그 취지에 벗어나긴 하지만 사람여행도 나름 순례의 일종이니 쌤쌤이라고나 할까.

컨테이너에 들어가 보니 TV도 있고 판넬도 설치되어 있다. 최고의 숙박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넓은 공간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누구의 간섭도 없이 따뜻한 방에서 혼자 잘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TV에선 위대한 탄생이 방영되며 정희주가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열창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라는 노래가사가 내 마음을 흔들어 댔다. 도보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처음으로 '위탄'을 봤다. 정희주의 노래는 가슴을 울렸다.

 

 

 

 

 

지출내역

내용

금액

라면

1.000

삼선볶음밥

7.000

맥콜+

2.000

일일 총합

10.000

총 지출

237.400

 

 

인용

목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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