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신세를 졌으니 교회에 다녀야죠
오늘은 많이 걷지 않고 바로 서천읍에 들어왔다. 재림교회에 찾아갔으나 당진에서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더라. 교회에 낯선 사람을 들이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시며 거절하셨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여러 교회를 지나쳐 왔지만 흔쾌히 승낙해주는 경우도 있었고 오늘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주기에 어려운 부탁인 양 완만하게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낯선 사람을 들일 순 없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남을 자게 해주는 일은 쉬운 일인가, 어려운 일인가? 이것 자체가 쉬운지 어려운지는 어디까지나 목회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라고 서산 부석면으로 걸어갈 때 얘기했었다. 이처럼 생각에 따라 쉬운 일도 어려운 일이, 어려운 일도 쉬운 일이 될 수 있으니 케바케(case by case)라고 해야겠다.
어제 ‘거절의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했다시피, 거절을 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더욱이 종교단체는 ‘모든 사람을 품어준다’는 기본 상식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이상, 거절당하는 사람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면서 거절하기는 더욱 힘들다. 부석감리교회의 목사님 말마따나 ‘당연히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도와줄 경우, 사람들에게 그 교회는 묻지도 따지지 않고 누구든 무조건 도와준다는 인식이 생겨서 그걸 역이용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어찌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역이용하러 나를 찾아온 사람인지, 정말 간절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말이다. 역이용하려는 사람이라면 거절해야 하고 간절히 지금 이 순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종교의 기본 정신에 맞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 또한 사람을 편 가르고, 색안경을 끼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에 종교적인 포용력에 위배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현실에서 종교적인 포용력은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야 하는지 말이다.
뭐 이런 여러 생각을 했지만, 서산재림교회 목사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쩔 수 없다. 그 목사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보다 ‘남을 재워주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엔 생소하고, 전혀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끼어들어 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당황하시는 표정에서 그와 같은 견고한 벽을 느꼈기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감리교회로 왔다. 엄청 큰 규모인데 목사님이 안 계셔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 과연 결과는?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셔 힘들다고 하더라. 아무리 얘기해봐도 안 될 것 같기에 결국 자리를 옮겼다. 이미 6시가 넘은 시간. 조금 더 가니 광야교회가 있어 이야기했더니 바로 허락해주셨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신세를 졌으니 그대로 갚아야 한다?
교회에서 많이 자니, “여행 끝나면 교회 다녀야겠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부분 교회에서 신세를 졌으니, 그 종교를 열심히 믿는 것으로 보답하라는 의미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이런 생각은 어떤가? ‘안 된다고 거절한 교회도 많았으니 믿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 말이다. 그리고 이번엔 특히 재림교회의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그렇다면 난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를 다녀야 하는 걸까? 재림교회에 다녀야 하는 걸까? 어찌 되었든 이런 식의 ‘Give & Take’는 결국 도로 아미타불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 본질적인 얘길 해보자면, 종교를 갖는 건 신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신념의 문제다. 지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그 종교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신념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는 당사자 말고 외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당사자가 신념으로 굳히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일들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그와 같은 신념을 가지게 된 걸 거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그 신념의 뜨거움 내지는 진심을 넌지시 알려줄 수는 있어도 100%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진심을 시시때때로 이야기하고 믿으라고 한다면 그건 강요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예들을 ‘거리 전도’라는 미명의 활동을 통해 수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그건 전도라기보다 차라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킨다고 해야 맞는데도, 그러한 인식이 없으니 더욱 가열차게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면서까지 행동을 한다.
신제를 졌으니 그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말엔 100% 동감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보답이 꼭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도움을 준 사람에겐 감사하며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시하면 되는 것이고, 정작 나의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 도움은 ‘교환’의 개념이 아닌 ‘증여’의 개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밀양에서도 잠시 얘기했듯이 교환은 나누고 분별하는 것임에 반해 증여는 연결하고 확장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무한 감사를 전하되 정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도와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지출내역
내용 |
금액 |
맥주+과자 |
2.000원 |
일일 총합 |
2.000원 |
총 지출 |
227.400원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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