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Christianity
원래 원시 종교는 모두 다신교(多神敎)였다. 로고스(이성)가 발달하지 못한 미토스(신화)의 세계에서는 불가해한 자연 현상을 종교로써 설명했다. 따라서 그런 현상의 가짓수만큼 많은 신들이 필요했다. 비의 신, 번개의 신, 폭풍의 신, 숲의 신 등 두려운 미지의 대상에 대해서는 모조리 신을 갖다 붙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 히브리인들이 유일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좁은 지역의 한정된 인구였기 때문일까? 주변 민족들과 다툼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별성을 가지게 된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히브리인들은 일찍부터 야회(YHWH)라는 유일신을 섬겼고, 이들의 신앙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유대교로 계승되었다. 그 뒤 조로아스터교 같은 또 다른 일신교도 생겨났다. 고대 세계에서 문명의 빛이 가장 밝았던 오리엔트 지역에는 여전히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신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예수 그리스도(Jesus of Galilee)가 등장한 것이다【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올림포스 산의 신들처럼 신화를 통해 인간사에 간섭한 신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신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물론 그 무렵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으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하늘이란 인격신의 개념이 아니라 천리(天理), 즉 하늘의 이치를 뜻했으므로 종교적인 신과는 다르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예기치 않은 일이었을지 몰라도 철학적으로는 유일신앙이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인류 최초의 신화이자 서사시의 주인공인 길가메시(Gilgamesh)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영생을 얻고자 여행을 떠나는데, 이는 오리엔트 문명 세계가 이미 불멸과 불변의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관심은 바로 서쪽 이오니아 세계로 전해져 최초로 철학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탈레스(Θαλής, BC 640~546)를 비롯한 초기 철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서 단일한 아르케(근본, 본질)를 찾으려 한 것을 보라!(→ 연금술).
그 문제의식은 다시 서쪽의 그리스로 옮아갔고 아테네의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이어받았다. 플라톤은 가시적인 현실 세계가 이데아 세계의 모방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유일신의 근거를 마련한다. 또다시 문명의 중심이 서쪽의 이탈리아로 옮겨진 뒤에는 로마세계에서 발달한 스토아 철학이 유일신앙의 교리를 낳은 지적 토양이 된다【금욕주의, 목적론, 신의 의지, 신 앞에서 평등한 인간의 개념 등 스토아 철학의 기본적 내용은 거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무대가 다 갖춰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했다.
그러나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가 ‘슈퍼스타’로 발돋움하기까지는 그가 죽고 나서도 3세기가 더 필요했다. 로마제국 시대에 꾸준히 교도의 수를 증가시킨 그리스도교는 313년 마침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재위 409~411)에 의해 공인을 받게 된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탓에 권력을 안정시켜야만 했는데, 마침 그리스도교라는 신흥 종교가 그의 이해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내부 진통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밖으로 완전한 합법화를 쟁취했으나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숙제가 발목을 잡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다. 창시자인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라 신의 아들임을 자처한 이상 어떻게든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으로 간주하는 입장과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입장이 충돌한 결과 전자가 승리했고, 성부(신)와 성자(그리스도)를 성령이 이어준다는 절충적 삼위일체설이 정론으로 굳어졌다.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몰린 일파는 이후 게르만족에 흡수되어 그리스도교를 간접적으로 전파했으며, 7세기에는 아라비아에서 또 다른 일신교인 이슬람교가 탄생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이슬람교에서는 그리스도와 마호메트(Muhammad, 570~632)를 다 예언자라고 간주한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본산이 된 유럽 세계는 동로마의 동방정교와 서유럽의 로마가톨릭으로 분화되었다.
1천 년의 중세 동안 유럽 세계는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다. 기본적으로는 교회가 신성의 영역을 관장하고 세속의 영역은 군주들이 다스리는 분업 구도였으나, 교회는 하나이고 군주들은 다수였으므로 교회의 권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권좌에 오른 교회는 곧바로 부패하기 시작했고 그 모순은 결국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터져나왔다.
중세의 신학적 쟁점은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문제와 더불어 신앙과 이성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지, 다시 말해 믿고 알 것인지 알고 믿을 것인지의 문제였는데, 이 토론 과정에서 인간 이성은 점차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종교개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인문주의 운동이다.
교회와 신앙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인간 이성이 세계의 주인으로 올라섰다. 교회라는 질서의 축이 무너졌으니 혼란은 피할 길이 없다. 중세 내내 바깥 세계와의 전쟁(십자군 전쟁) 말고는 큰 규모의 전쟁이 없었던 유럽 세계가 근대의 문턱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전란에 시달렸다.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영토전쟁인 17세기 초의 30년전쟁(1618~1648)을 시작으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3세기에 걸친 유럽 세계의 혼란은 교회가 예전과 같은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유럽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지난한 진통을 겪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UN은 중세 유럽의 교황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현대의 UN처럼 중세의 교황은 권위의 상징으로 군림했으며, 세속군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미국 같은 강대국의 입김에 놀아나는 오늘날의 UN처럼 중세의 교황도 막강한 세속군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그런 점에서 사실상 미국이 지배하는 지금의 UN은 14세기의 아비뇽 시대와 닮았다. 조지 부시는 필리프 4세에 해당하는데, 필리프의 별명은 미남왕이었다!】.
국교(國敎)라고 할 만한 특정한 종교가 없는 우리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가 역사 전체를 관류하는 현상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리스도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세계관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단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세계관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곧 한 사회의 생활양식과 통한다. ‘우리에게 설과 추석을 쇠지 말라’면 저항할 수밖에 없듯이 다른 민족에게 특정한 종교를 강요한다면 마찰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강력한 세계종교이자 포교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중세에 십자군 원정으로 이슬람 세계를 침략했고, 중세 사회가 해체될 무렵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그 세계의 토착 생활양식을 유린했다. 비록 지금은 강제적인 포교 정책을 포기했으나, 그리스도교 문명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슬람권의 한복판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함으로써 오랜 분쟁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디아스포라). 아직도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 다른 세계관을 배척하는 자세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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